이사야 58장 1~12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주현절 후 셋째 주일, 2026년 2월 8일
이사야 58장 1~12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1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2)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영화 “노예 12년”은 본래 자유인이었으나 납치 당해 노예로 살았던 솔로몬 노섭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노섭이 첫 번째 만난 주인은 비교적 합리적이고 온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처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노섭은 두 번째 주인을 만납니다. 그의 이름은 ‘에드윈 엡스’입니다. 그가 등장하는 장면을 영화는 매우 인상적으로 묘사합니다.
엡스는 노예들을 모아두고 성경을 펼쳐 누가복음 12장 47절을 읽어줍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그는 중간중간 단어를 힘주어 반복하며 자기 의도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자기 말을 듣지 않은 노예를 심하게 채찍질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엡스는 성경의 권위를 제멋대로 훔쳐 폭압적으로 노예를 부렸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영화 곳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신앙 언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인 척 합니다. 하지만 정작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주님의 마음은 외면하였습니다. 진정 복음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노예들을 짐승 혹은 재산 취급하며 잔인한 매질을 휘둘렀습니다. 어린 여자 노예를 추악한 욕망으로 유린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실화입니다. 1853년에 출간되어 당시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솔로몬 노섭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합니다. 흑인 노예 해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책으로 평가 받습니다. 책에서 노섭은 농장주 에드윈 엡스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술에 취해 있을 때의 엡스 주인은 난폭하고 으스대며 소란스러운 인물로,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은 ‘자기 흑인 노예들’과 함께 춤을 추거나, 마당에서 긴 채찍으로 그들을 마구 후려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등 위에 커다란 채찍 자국이 남으며 그들이 비명을 지르고 절규하는 소리를 듣는 데서 오는 순전한 쾌락 때문이었다. 반면 맨정신일 때의 그는 과묵하고 신중하며 교활했다. 술에 취했을 때처럼 무차별적으로 때리지는 않았지만, 뒤처지는 노예의 몸 중 가장 연약한 부분을 정확히 노려 생가죽 채찍 끝을 날리는, 그만의 교묘한 솜씨를 발휘하곤 했다.”
영화에서 엡스의 잔혹성이 절정에 이른 장면이 있습니다. 죄없는 여자 노예를 향해 무자비하게 채찍질을 날렸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주인공은 주인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조만간에 어딘가에서 영원한 주의 이름으로 죄 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 위선적인 악인을 향해 외치는 이 음성에서 저는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 58장은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내리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바로 ‘목소리를 아끼지 말고 크게 외치’라는 말씀입니다. 그 내용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잘못과 허물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그들이 뭘 그렇게 큰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은 예언자로 하여금 “외치게” 하셨을까요? 바로 “잘못된 원망”입니다. 3절 앞부분에 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화면 보시면서 새한글 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3a (백성) ‘무엇 때문에 우리가 금식했습니까? 주님이 보지 않으셨다니요! 무엇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욕구를 억눌렀습니까? 주님이 알아주지 않으신다니요!’
이스라엘은 욕구를 억누르며 힘겹게 금식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보지도 않고 알아주지도 않으셨습니다. 이 사실에 몹시 서운해 하며 한탄을 늘어놓았습니다. 사실 스스로 음식을 끊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문제는 금식만 하고 정작 하나님의 뜻에는 무감한 것입니다. 3절 후반부와 4절을 화면 보시면서 새한글 성경으로 다함께 읽겠습니다.
3b (하나님)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너희는 너희 좋아하는 것만 찾고, 너희에게 빚진 모든 사람들을 다그치는구나. 4 보라, 다투고 싸우려고 너희가 금식하는구나. 무자비한 주먹으로 때리려는 것이구나. 오늘처럼 금식하지 마라, 너희 목소리가 높은 하늘에까지 들리게 하려면!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향해 준엄하게 질책합니다. 그들은 금식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만 찾았습니다. 빚진 사람들을 다그쳤습니다. 다투고 싸우며 약한 사람들을 향해 무자비한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비록 열심히 금식은 하였지만 정작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는 외면했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죄와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결론적으로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냉철하게 정리를 내립니다. “오늘처럼 금식하지 마라.” 그들이 금식하며 외치는 목소리가 하늘에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의 금식이 헛수고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금식하며 간절히 부르짖어 봐야 아무런 소용없는 일입니다.
5절은 이스라엘이 금식하는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머리를 갈대 같이 풀은 채 힘없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불편한 굵은 베옷을 입었을 뿐 아니라 재를 깔고 누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열심과 열정이 없으면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외치십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느냐?”
비록 그들이 그토록 힘겹게 금식을 할지라도 단지 사람들 눈에만 거룩하게 보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금식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우리의 질문 앞에 주님께서 직접 답을 주십니다.
6-7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새한글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6 내가 좋아하는 금식은 이런 것이 아니냐? 불의의 사슬을 끌러 주는 것, 멍에끈을 끊어 주는 것이 아니냐? 짓눌리는 사람들을 내보내 자유롭게 해 주는 것, 멍에는 무엇이든 부수어 버리는 것이 아니냐? 7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빵을 떼어 주는 것, 집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집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아니냐? 헐벗은 사람을 볼 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살붙이를 피해 숨지 않는 것이 아니냐?”
6절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좋아하는 금식의 기준은 음식 문제가 아닙니다. 열정과 열심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 대신 ‘불의의 사슬을 끌러 주는 것’, ‘멍에 끈을 끊어주는 것’, ‘짓눌리는 사람들을 내보내 자유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다양한 표현을 사용했지만 결국 한 가지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눌리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7절을 보면, ‘굶주린 사람에게 빵을 떼어 주는 것’, ‘집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집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살붙이’, 즉 ‘가까운 친척의 어려움을 피해 숨지 않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역시 여러 행동을 언급하지만 사실 하나의 핵심을 드러냅니다. 바로 ‘가난한 자를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굶주리는 이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단지 ‘금식’이라는 특정 종교 행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가 믿음을 보여 드릴 때, 신앙의 진면모를 드러낼 때, 과연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엄중하게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바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돕는 삶의 자세입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 제국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수많은 사람이 포로로 붙잡혀 있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언자가 말하는 해방과 자유는 단지 개인적인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약한 나라가 악한 제국으로부터 당하는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결론적으로 제국을 극복하는 결단입니다. 끊임없이 높이 올라가고 많은 것을 움켜쥐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다짐입니다. 그 대신 거대한 힘에 짓눌리는 약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고통과 아픔에 함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곧, 금식 그 자체가 아닙니다. 금식을 하는 사람의 참되고 온전한 삶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해야 한다.’라는 강박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리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대단한 무언가를 하려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올바로 깨달으며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섬김과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소중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8~11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주님을 기쁘게 하는 자녀를 향한, 눈부시게 찬란한 여러 가지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새벽 같은 빛이 비치며, 빠른 치유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따라옵니다. 항상 인도하시어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하십니다. 마치 물댄 동산처럼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물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하나 가슴 벅찬 설렘으로 다가옵니다. 이 말씀 그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결국 핵심은 주님께서 그들이 금식하며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거듭, 그들이 포로민이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 옛날 전쟁은 단지 한 나라와 다른 나라 사이의 싸움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양 나라의 신과 신의 대결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뺏기고 성전이 무너진 것은 그 시대 세계관으로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신에게 패배해 백성을 버리고 떠났을 의미합니다. 포로 생활의 가장 큰 고통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은혜는 오해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함께하시고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당신이 기뻐하시는 금식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 눈부신 희망을 선명히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한 언약은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으로 이어집니다. 12절 말씀 새한글 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12 그대에게 속한 사람들 몇이 오래된 폐허를 거주지로 다시 건설할 것입니다. 대대로 무너져 있던 기초를 다시 바르게 놓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대를 ‘성벽 틈새를 막는 사람’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길을 다시 닦아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라 부를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폐허’, ‘대대로 무너진’, ‘틈새’라는 표현이 암시하는 상황은 분명합니다. 바로 전쟁입니다. 즉, 바벨론에게 패배해 겪는 이스라엘의 비참한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그 모든 고통과 절망으로부터 구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 황폐하고 파괴되고 무너진 현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몸과 마음의 건강 문제일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경제적으로 심각한 위기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정 안의 뿌리깊은 갈등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 도무지 다시는 회복될 것 같지 않은 삶의 폐허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세우고, 쌓고 보수하며, 길을 여시기 때문입니다.
이 때, 12절 앞부분에서 ‘네게서 날 자들’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혈연적인 자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이어갈, 즉 참 신앙을 전해 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우리를 ‘성벽 틈새를 막는 사람’으로 ‘길을 다시 닦는 사람’으로 세우십니다. 우리를 통해 황무한 삶의 고난을 넘어, 당신의 약속과 계획을 이루어 가시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의 참 의미를 더욱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금식’이라는 그럴듯한 종교 행위를 통하여 당신을 손에 쥐고 흔들 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대신, 주님의 마음을 품고 화해와 회복을 이루며 사는 삶을 살아가길 더욱 바라십니다. 그런 우리와 함께 하시어 하나님 나라를 넓혀 나가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것은 금식 그 자체가 아니라 당신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을 넓혀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마음 깊이 새기며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뜻합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탐욕을 포장하며 폭력의 질서를 따르는 것을 거부하고, 주님의 사랑을 꿋꿋하게 지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소설 중 하나는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입니다. 미처 못 보신 분들께는 강력히 추천 드립니다. 이 소설은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이 무척 가난하고 어려웠던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 때, 인종차별이 매우 심했던 남부 앨라배마 주의 메이콤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다룹니다.
어느 날 톰 로빈슨이라는 흑인이 메이옐라 이웰이라는 백인 여성을 성폭행 했다는 누명을 썼습니다. 지역에서 가장 존경받는 변호사인 에티커스 핀치가 톰의 국선 변호사로 선임되어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왔습니다. 그러자 백인 우월주의가 가득한 마을 대다수 사람들로부터 심각한 위협과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웃에 사는 괴팍한 성격을 가진 ‘듀보스 할머니’가 핀치 변호사의 아들, 딸인 젬과 스카웃을 향해 끔찍한 비난을 늘어놓았습니다. ‘네 아빠는 네 아빠가 도와주고 있는 쓰레기 같은 깜둥이들보다 나을게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아들 젬은 결국 참지 못하여 듀보스 할머니가 아끼는 꽃밭을 망쳐놓았습니다.
그러자 핀치 변호사는 아들을 엄히 꾸짖으며 듀보스 할머니께 사과하라고 보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어린 딸 스카웃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딸에게 핀치 변호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소설 내용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제 여름이 오면 너는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에 대해 이성을 지켜야 할 거야... 너랑 젬에게 부당하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할 때가 있어.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우리가 어떻게 처신을 하느냐 하는 건 – 글쎄,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너와 젬이 커서 어른이 되면 어쩌면 연민을 느끼면서, 내가 너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이 문제를 되돌아보게 될 거야.
이 사건, 톰 로빈슨 사건은 말이다. 아주 중요한 한 인간의 양심과 관계있는 문제야 – 스카웃, 내가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난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어.”
저는 군대에서 이 대목을 읽다가 잠시 책장을 덮고 먹먹한 가슴을 한참 쓸어내렸습니다.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험을 무릅쓰고 약한 이웃의 편이 되는 게 대체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그냥 양심의 소리에 잠시 귀를 닫은 채 안전하고 편하게 살면서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 드려도 되지 않을까요? 왜 핀치 변호사는 그렇게 어렵고 힘든 결심을 하며 뜬금없이 교회와 하나님을 언급했을까요?
이 책을 지은 하퍼 리는 성경이 전하는 진리를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예배와 삶이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금식은 연약한 사람의 곁에 설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신앙생활은 외로이 찬바람을 맞는 이들의 고통을 끌어안아 줄 때 건강히 세워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손길 역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또 다른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이 몹시 싫어하는 거짓과 위선에서 벗어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몸소 본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고관대작들하고만 어울려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주저앉아, 그 시대 종교적 열망을 타고 화려한 의식과 기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수많은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가장 천대받은 사람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죄인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렇게 결국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그 깊고 깊은 암흑을 거쳐 찬란한 부활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천천히 곱씹으며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헌신을 하기 바랍니다. 일상과 예배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걸으며 다른 이들의 무너진 삶의 자리를 회복시켜 주는 사명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 안에 물이 넉넉한 동산 같은, 당신의 참된 회복과 은혜를 여실 줄 믿습니다.
기도
우리를 참으로 살리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원하시는 금식은 금식 그 자체를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랑과 섬김의 삶을 바탕으로 한 헌신과 섬김을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황폐한 세상 속에서 “성벽 틈새를 막는 사람”이요 “길을 다시 닦아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스스로 자신을 무너뜨림으로써 무너진 모든 이들을 다시 세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