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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7장 1~14절 “엘 샤다이, 전능하신 주님”

2026-06-28
정대진 목사

2026년 6월 28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7장 1~14절 “엘 샤다이, 전능하신 주님”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1)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무력한 하나님

하나님은 무력합니다. 섬뜩한 포탄 소리에 놀라 울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자연재해로 살아갈 터전을 잃은 이재민에게, 오랜 기근으로 굶주림에 지친 노인에게 하나님은 너무나 무력하기만 합니다.


먼 나라의 거대한 재앙만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계신 누구나 오랫동안 간곡히 기도했지만 도무지 응답을 받지 못해 절망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족이 있습니다. 아무리 간청해도 낫지 않는 병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해결되지 않는 경제적 어려움이 있습니다.


애초에 믿고 의지할 대상이 없으면 차라리 더 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온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를 믿고 섬기기에, 신앙과 현실 사이 아득한 거리 사이에 헤매고, 거대한 공허함에 짓눌립니다. 주님을 향한 깊은 실망과 배신감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받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오랜 침묵에 쌓인 냉소

본문 바로 앞에 있는 창세기 16장 16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창세기 16장은 하갈이 고난 끝에 이스마엘을 낳은 사실을 알려주며 끝을 맺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86세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인 본문 1절은 이러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단 한 절 만에 무려 13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86세였던 아브라함은 어느새 99세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나이는 75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무척 보기 드문, 이미 상당히 나이 든 노인입니다. 그는 자녀가 없다는, 치명적인 비극을 겪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가정이 난임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도 대를 이을 자손을 낳는 걸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고대 서아시아에서 아들의 의미는 훨씬 더 막중합니다. 그의 존재가치가 신에게 인정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아들과 손자와 많은 후손이 생긴다는 것은 조상의 생명이 영원히 이 땅에 이어질 만하다고, 하나님에게 복을 받은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정반대로 아기를 갖지 못한다면, 주위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명확한 저주로 이해했습니다. 그의 숨결이 더 이상 세상에 이어질 가치가 없다고 선언하는 싸늘한 징벌입니다. 도무지 감당하기 버거운 절망의 절정이었습니다.


현대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렇지만 오랜 옛날 가나안 사람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75년 세월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설움이 차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 분은 거대하고 화려한 문명를 자랑하는 도시 우르의 우상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은혜와 정의로 이루어가는 놀라운 다스림을 보여주셨습니다. 가슴 벅찬 감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주님께 기대한 가장 원초적인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아들 하나 낳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능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때로부터 무려 24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한 승리와 영광의 순간도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마음 속 가장 깊은 슬픔과 절망에 대해서는 주님은 너무나 무력하셨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온 75년과 다른 결의 처연한 슬픔이, 하나님을 알고 지낸 24년 동안 내면에 차곡차곡 차올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99세 노인 아브라함의 상황입니다. 주님이 그에게 13년 만에 불쑥 나타셨습니다. 지난날 맺은 언약을 다시 꺼내십니다.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걸 약속하십니다. 그의 수많은 자손이 가나안 땅을 물려받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상당히 도발적으로 반응합니다. 바로 ‘비웃음’입니다. 창세기 17장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은 자기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 본능적으로 엎드렸습니다. 예의를 갖추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주님의 말씀에 감격하진 않습니다. 싸늘한 쓴웃음을 짓습니다.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섬뜩한 냉기가 입 밖으로 스멀스멀 흘러나옵니다. 사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향해 과연 누가 믿음 없다고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성경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성경은 어느 누구도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조상 아브라함 역시 날마다 흔들리는, 평범하고 연약한 사람이었음을 알려줍니다. 그 역시 믿음을 두고 갈등하고 번민했습니다. 불신에 사로잡혔고 심지어 주님을 향해 냉소를 지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순간 못지않게 힘이 풀려 주저않을 때가 많습니다. 기쁨에 겨워 드리는 찬양 뿐만 아니라 실망에 사무쳐 하염없이 신음을 내뱉습니다.



영원한 언약

그렇다면 마음에 온기가 다시 돌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차디찬 쓴웃음을 지우고 따사로운 미소를 되찾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주님의 언약을 더욱더 차근차근 곱씹어야 합니다. 낯설고 새롭게 마주하고 살펴봐야 합니다.


창세기 17장에서 유독 집요하게 반복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언약”입니다. 본문보다 앞서 창세기 15장에서는 딱 한 번(18절)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17장에서는 언약이 무려 열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특별히 7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짧은 한 구절 안에 “언약”이 두 번 등장합니다. 거기다 두 번째는 “영원한 언약”입니다. 이 때 ‘영원’은 창세기 전체에서 13번 나옵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참 절묘하게도 ‘언약’은 17장에만 13번 나옵니다. 그리고 ‘영원’은 창세기에 13번 나옵니다. 이 두 단어가 13번의 ‘영원’ 중 한 가운데인 일곱 번째에 함께 나옵니다. 바로 방금 읽은 17장 7절의 “영원한 언약”입니다. 성경에서 7은 매우 중요한 숫자입니다. 천지창조의 7일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숫자 7은 우주적 질서와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거듭 강조하며 드러내는 언약은, 단순히 하나님과 아브라함 둘 사이의 약속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차디찬 냉소를 짓고 있는 아브라함 앞에 하나님은 그저 값싼 위로의 말 한마디를 건네신 게 아닙니다. 천지 창조의 질서와 맞닿아 있는 우주적이고 영원한 사건입니다. 



이름에 새긴 창조 의지

아브라함을 향한 많은 자손과 땅에 대한 언약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몇 차례 반복되었습니다(창 12:2~3, 15:5, 18절). 그런데 본문에서 눈에 띄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이름의 변화입니다. 본문 5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지금까지 그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습니다. 비슷한 발음이지만 ‘많은 사람의 아버지’라는 다른 의미입니다. 많은 후손을 낳을 거라는, 언약하신 내용을 이름에 그대로 새겨 넣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가장 내밀한 인격을 가리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 피조물을 향해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으로 하여금 동물의 이름을 짓게 하시며 창조 사역에 참여시키셨습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이름에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값싼 위로를 주려고 그의 이름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위태로운 희망에 취하게 하려고 새로운 이름을 건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의지를 단호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진실로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아 많은 백성의 아버지로 만들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약속하십니다. 그의 이름에 영원한 언약을 영롱하게 아로새겨 넣으셨습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그의 이름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관련해서 본문에서 집요하게 반복하는 문장 형식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무엇 무엇 하게 한다.’입니다. 어려운 말로 ‘사역 동사’(히필형)라고 부릅니다. 무언가를 하게 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2절에는 “내가 너로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5절에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라고 선포하십니다.


이러한 표현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누가 주도하고 움직이는 지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오직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열심히 노력해서 크게 번성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된 게 아닙니다.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주권을 단호하게 거듭 선포하셨습니다.


13년 전 아브라함은 어떻게든 자기 스스로 후손을 만들어 보려 했습니다. 마침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인간의 치밀한 계획과 노력의 절정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 심각한 갈등과 폭력이 벌어졌습니다. 본문에서 반복해 보여주는, 무언가를 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그 모든 헛된 몸부림을 완전히 무너뜨리십니다. 그 대신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삭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인간의 노력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이란 이름으로 무기력하고 나태하게 있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대신 주의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무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걸 성급하게 움켜쥐려 해서도 안 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야 합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들을 잠잠히 주목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지금, 이곳에 임하는 전능

따라서 이 순간 아브라함에게 다가오셔서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당신의 이름을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 1절 다시 한 번 더 읽겠습니다.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여기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엘 샤다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엘’을 발전시켜 변형한 여러 이름 중 하나입니다. 이 이름은 구약에 48번 등장합니다. 단지 물리적인 힘이 강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매우 입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선 “충분한 자”를 뜻합니다. “제압하는 자”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근 연구는 “대초원의 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모두를 종합하면 온 땅을 압도하는 능력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창세기를 포함한 모세오경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경 전체에서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딱 여섯 번 등장합니다(창 17:1, 28:3, 35:11, 43:14, 48:3; 출 6:3). 여섯 번 나오는 엘 샤다이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족장들이 자기 생애 안에서 지금 당장 눈으로 볼 수 있는 즉각적 성취를 약속하실 때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수백 년 뒤에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라거나 ‘가나안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겠다’와 같은 먼 미래의 거창한 약속을 하실 때는 이 호칭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오늘 읽은 창세기 17장의 경우 ‘내년에 이삭이 태어날 것이다.’, ‘오늘 네 이름이 바뀔 것이다.’, ‘당장 네 육체에 할례를 행하라.’와 같은 말씀과 함께 당신의 전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먼 훗날이 아닌, 지금 현실 속으로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처럼 당신의 이름을 ‘엘 샤다이’로 알려주시고 찾아오신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주님은 까마득한 미래에만 어렴풋하게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을 힘겹게 했던 13년 묵은 고통을 헤치고 나가오십니다. 현재 내 눈 앞에 놓인 온갖 절망을 무너뜨리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거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오늘도 함께 하시지만 우리의 기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펼쳐나가십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까지의 과정은 하나님의 전능을 매우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한순간에 극적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수많은 좌절과 실망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가정 안에 심각한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모든 여정을 거친 끝에 마침내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할례, 무력함을 몸에 새기는 영원한 아멘

그런데 하나님은 이 엄청난 언약을 선포하시며 뜻밖의 요구를 덧붙이십니다. 바로 할례입니다(9~13절). 언약을 지키는 표징으로 아브라함 집안의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생명과 직접 연결되는, 가장 연약한 피부에 상처를 내야 합니다. 몸에 영원히 새기는 ‘아멘’입니다. 철저한 항복 선언입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처럼 정교한 수술 도구나 소독약이나 마취제가 없던 시대입니다. 99세 된 노인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고 극심한 고통에 휩싸입니다. 끙끙대며 기대 누워 신음을 내뱉습니다. 철저히 연약한 모습입니다. 너무나 굴욕적인 상황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가장 약하고 초라한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하심을 약속하셨습니다.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창세기 17장 26절 함께 읽겠습니다.


26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날, 아브라함만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스마엘도 함께 할례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은 어떤 존재일까요? 철저한 실패작입니다. 2주 전 창세기 16장을 함께 묵상하며 확인 했습니다. 여종 하갈이 주인 사래를 대신 해 이스마엘을 임신한 후 온 집안에 거센 소용돌이가 몰아 닥쳤습니다. 그 이후 집안이 순탄했을 리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점점 자라가는 이스마엘을 바라보며 자기의 어리석음과 못남을 괴롭게 깨달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자신의 가장 처절한 좌절을 상징하는 이스마엘에게도 언약의 표식이 새겨졌습니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후회로 몸부림치는 과거 기억이 있습니다.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영혼 깊은 약점이 있습니다. 이대로 내 인생이 모조리 망가진 것 같은 좌절이 있습니다.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 모든 연약함 가운데, 정확히는 가장 약한 바로 그곳에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흔적이 깊숙이 새겨집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굳게 믿으시길 바랍니다.



십자가의 전능

아브라함으로서는 이 모든 게 너무나 감당하기 버겁고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모든 세월을 통해 당신의 전능하심이 참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제멋대로 욕심을 휘두르는 독재자의 권력이 아닙니다. 많은 제물로 배를 불린 뒤 마법 같은 선물을 던져주는 우상의 권능도 아닙니다. 철저히 무력하고 미련해 보이기에 오히려 이 세상 가장 위대하고 지혜로운 전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이것을 생생히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이렇게 울부짖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을 호소하셨습니다. 온 우주를 압도하는 암흑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절한 무력함의 절정입니다. 


99세 아브라함이 바닥에 엎드려 쓴웃음을 짓던 그 완벽한 무능력과 절망에 겹쳐 집니다. 우리의 숱한 좌절과 아픔에 연결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 십자가의 절망이 부활을 꽃피웠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부활의 생명과 능력은 더욱더 아름답고 위대하게 세상을 가득 채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토록 눈부신 복음을 자기 삶으로 직접 살아내고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8~10절을 새한글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8 이것을 두고 내가 세 번 주님께 간청하기를, 나한테서 그것이 떨어져 나가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9 그런데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충분하다, 내 은혜가! 내 능력은 약한 것 속에서 완전해지기 때문이란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아주 기쁘게 나의 약점들을 자랑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위에 거처를 두시도록 말입니다. 10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 모욕, 쪼들림, 박해와 곤경도 기쁘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 그때에 내가 강하니까요.


바울은 병이 낫도록 세 번이나 간청 했습니다. 바울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길 아브라함처럼 기대했을 겁니다. 그는 하지만 주님의 응답은 명확했습니다. “너에게 충분하다, 내 은혜가! 내 능력은 약한 것 속에서 완전해지기 때문이란다.” 너무나 실망스럽고 뼈아픈 응답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담긴 복음이 바울의 영혼을 완전히 뒤바꾸었습니다.


사도가 들려주는 위대한 진리를 마음에 품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약함과 모욕, 박해와 곤경은 곧 하나님의 능력을 담는 거룩한 그릇입니다. 내가 가장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수치스러워하는 그 약점이야말로 주님의 참된 권능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인간의 능력에 덧붙여 지는 게 아닙니다. 처절한 절망과 무력함 한 가운데를 뚫고 들어와 완성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진심으로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러하셨듯이 당신의 이름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품에 안기시길 바랍니다. 그 주님이 우리 각자를 향해 새롭게 바꿔 부르시는 이름을 마음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삶의 그 어떤 허무함과 시련과 고난을 넘어설 수 있는 참된 능력의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언약에 안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무력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판단으로 볼 때 그러합니다.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계획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전능이 항상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할수록, 서툴고 부족할수록 더욱 찬란하게 빛나시는 권능의 손길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와 주님께서 오늘 하루도 동행하시고 새 힘 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

전능하신 주 하나님.

삶의 여러 고난에 지치고 무너질 때 주님은 무력해 보입니다. 오랜 침묵에 마음을 잃고 주저앉기도 합니다. 저희의 아픔에 영영 무관심한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전능은 인간의 어리석은 기대를 넘어설 줄 믿습니다. 자녀들을 향한 위대한 창조 의지를 헤아리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마음에 새기고 전하는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으로 무력하셨기에 진정 전능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고문헌

빅터 해밀턴, 『NICOT 창세기 I』(서울: 부흥과개혁사, 2016), 521.

Jacob Felton, "El Shaddai," Dor le Dor (Fall 1976), pp. 187~191.

고든 웬함, 『WBC 창세기 16~50』(서울: 솔로몬, 2001),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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