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6장 11~24절 “야훼 샬롬,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
2026년 7월 5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사사기 6장 11~24절 “야훼 샬롬,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
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14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15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17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18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 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너 돌아올 때까지 머무르리라 하니라
19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20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하니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라
21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4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의 참 은혜와 평화가 성도님들과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포도주 틀 안에서
이스라엘은 전쟁 중입니다. 정확히는 침략당하고 있습니다. 가혹한 수탈이 계속됩니다. 미디안이 “온 땅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삿 6:4~5, 새번역). 이러한 거친 현실을 온 몸으로 살아가던 한 남자가 있습니다. 바로 기드온입니다. 전쟁 중에도 삶은 이어집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먹어야 합니다. 먹을 걸 구하려면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밀을 수확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원래대로 넓은 들에서 타작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정반대의 장소로 들어갑니다. 바로 포도주 틀입니다. 이스라엘의 포도주 틀은 바위를 파내 만듭니다. 기드온은 어둡고 습한 그곳에 숨어들었습니다. 긴장하며 벌벌 떠는 몸으로 밀 이삭을 몰래 탈곡합니다. 살아남기 위한 비참하고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기드온은 그의 생애 가장 결정적인 만남을 경험합니다. 12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2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힘센 장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말하였다.
천사가 나타나 기드온을 이렇게 부릅니다. “힘센 장사야!”. 어쩌면 비웃고 놀리는 것처럼 들렸을 겁니다. 그는 지금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힘센 장사’라는 호칭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결정적인 선언이 이어집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성경 전체가 한결같이 증언하는 복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고결한 진리도 때로 누군가에게는 날 선 칼처럼 다가올 수 있습니다. 아프고 지치는 시간을 보내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 칼끝이 기드온의 내면에 깊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영혼에 거센 소용돌이를 불러왔습니다. 그 결과 그는 대담한 행동을 합니다. 바로 ‘질문’입니다. 이때 기드온이 말한 첫 마디를 새번역과 공동번역 성경은 각각 이렇게 옮깁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새번역). “외람된 말씀입니다만”(공동번역).
어떤 질문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질문이란 기본적으로 강자가 지닌 권한입니다. 약자는 강자가 허락해야 무언가를 물어볼 수 있습니다. 질문은 곧 대답을 요구합니다. 상대방의 반응을 끌어냅니다. 때로는 권위자를 불쾌하게 합니다. 폭군이 질문을 싫어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기드온도 알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영혼 한쪽에서 무언가가 그를 만류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울분을 터뜨렸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화면 보시면서 본문 13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13 그러자 기드온이 그에게 되물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째서 우리가 이 모든 어려움을 겪습니까?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주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어 우리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말하였는데, 그 모든 기적들이 다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지금은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시기까지 하셔서, 우리가 미디안 사람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삿 6:13, 새번역).
한 마디 한 마디가 매섭습니다. 오랜 고뇌가 빼곡히 들어차 있습니다. 글자 사이로 씩씩거리며 들썩이는 어깨, 글썽이는 눈망울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이 모두를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반문’(反問)입니다. “정말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까?”라고 되묻는 절규입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뉴스를 통해 가슴 아프게 확인합니다. 전쟁은 짐승의 시간입니다. 악독한 폭력에 의해 땅은 피로 흥건해집니다. 사사기가 더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벌어졌을 온갖 참극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절망은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신앙 때문에 오히려 더 깊어집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정체성 그 자체입니다. 휘황찬란한 이집트 우상들을 굴복시킨 하나님, 기세등등한 파라오 군대를 궤멸시킨 하나님, 바다를 열어 자기 백성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 그런 이야기를 이스라엘 아이들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서 부모에게 전해 들으며 자랐습니다.
기드온도 그러했습니다. 미디안은 이집트와 비교하면 훨씬 작고 약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너끈히 물리치시리라고 기대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희망은 금세 꺾였습니다. 원망과 울분으로 변했습니다. 기드온은 이렇게 항변합니다. “지금은 야훼께서 우리를 버리셨습니다”(삿 16:13, 공동번역). ‘주님이 함께하심’을 온몸으로 부정하는 절규입니다.
기드온과 온 이스라엘을 덮친 재앙은 두 가지 차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미디안이 벌인 침략입니다. 참혹한 착취와 끔찍한 살육입니다. 동시에 또 다른 고통이 그들 내면을 덮쳤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느낀 배신감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더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 결과 뿌리 깊은 절망에 허우적 거립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이 드러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맹종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감정을 짓밟지 않으십니다.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신음이 새어 나오는 입을 억지로 틀어막지 않으십니다. 거침없이 따져 묻는 고함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심지어 그 울부짖음을 성경 곳곳에 남겨 두셨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이 바라시는 믿음의 깊이와 넓이를 알게 됩니다. 모든 아픔에 공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상 밖의 부르심
주님은 절망하며 울부짖는 기드온에게 기꺼이 응답하셨습니다. 그가 기대했던 차원을 훌쩍 넘어서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기드온은 그 시절처럼 하나님이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때처럼 당신과 함께 일할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또 다른 모세를 원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기드온입니다.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는 일꾼으로 그를 부르셨습니다. 천사가 그를 가리켜 “힘센 장사”라고 부른 이유입니다. 기드온의 반문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14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주님께서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래전 모세가 불붙는 떨기나무 앞에서 부르심 받았을 때와 많이 비슷합니다.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건지는 사명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내용과 문학 형식까지 같습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사사기 저자가 의도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기드온은 ‘새로운 모세’로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또 다른 출애굽을 이끌 지도자로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기드온은 출애굽의 영광이 어디 있냐고 번민하며 묻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네가 이 시대의 모세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드온의 오해가 드러났습니다. 철저히 버림받았다고 느꼈던 그 순간에도 주님은 당신의 뜻을 변함없이 신실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단지 때와 방법이 사람들의 기대와 다를 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역설을 깨닫습니다. 고난을 겪는 누구나 주님의 신실한 손길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막상 그 사명에 직접 참여할 때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현실에 자리한 악이 너무나 거대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자신은 초라하게 느낍니다. 자기를 미디안에게 보내겠다는 말씀이 마치 사지(死地)로 내보내는 명령처럼 들립니다. 15절 앞부분은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5 기드온이 주님께 아뢰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습니까?
앞서 그가 했던 질문의 주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짓밟힌 현실 가운데서 피어오른 물음표입니다. 지난날 홍해를 가르셨던 주님은 지금 대체 무얼 하시는지 따져 물었습니다. 이제는 질문의 폭이 한 사람, ‘기드온 자신’으로 급격히 좁아집니다. 대체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기드온은 모세 같은 영웅의 등장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놓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출애굽 소명을 받았을 때, 모세는 여든 살 노인이었습니다. 당시 모세는 지금 기드온 못지않게 철저한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토록 연약한 한 인간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권능을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당신의 임재를 거듭 약속하십니다. 앞서 12절에서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기드온을 덮친 불안은 잠잠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확실한 증거를 요구합니다. 지난날 모세가 떨기나무 아래서 보았던 표징을 자신도 경험하길 원했습니다.
기드온은 서둘러 집으로 달려가 염소 새끼와 밀가루로 각각 국물과 빵을 요리해서 돌아왔습니다. 음식을 바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국물을 부었습니다. 천사가 지팡이를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바위에서 불꽃이 피어나 축축한 음식을 불살랐습니다. 인간의 경험과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장면입니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그 어떤 의심도 사라지게 하는 주님의 분명한 임재를 보여줍니다.
또 다른 두려움과 위로
여기서 또 다른 모순이 이어집니다. 앞서 기드온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의 권능을 목격하자 무서워 떨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삿 6:22). 언뜻 이해가 안 됩니다. 천사를 가까이서 보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게다가 놀라운 이적을 경험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극적인 종교 체험입니다. 그 자체로 감격스럽고 황홀해 보입니다.
하지만 사건 당사자의 입장은 전혀 달랐습니다.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한 인간의 존재가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여름 한낮에 작열하는 태양을 마주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금세 눈을 감습니다. 거대한 빛 앞에 인간은 지극히 무력합니다. 하물며 절대자이신 주님과 감히 마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은 것만 같은 고통 또한 주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그분이 그만큼 자신을 낮추신 덕분입니다. 기드온에게도 하나님이 먼저 손을 내미십니다. 이렇게 그를 위로하십니다.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영원한 진리입니다.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음습한 포도주 틀 안에서 숨죽여 울 때, 내 삶에 온통 고통뿐인 것만 같을 때, 변함없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평화의 주님께 드리는 예배
생명의 말씀을 듣자, 싸늘하게 얼어붙었던 기드온의 심장에 비로소 온기가 돌았습니다. 산산이 부서진 삶의 조각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살아갈 힘을 다시 얻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가장 중요한 행동을 합니다. 바로 ‘예배’입니다. 24절 함께 읽겠습니다.
24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기드온은 주님을 향해 제단을 쌓았습니다.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바로 ‘야훼 샬롬’(יְהָֹוה ָשׁלֹום), 즉 ‘샬롬이신 주님’입니다. ‘샬롬’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무척 친숙한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평화’라는 뜻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더 깊고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온전함’입니다. 가령 신명기에서 ‘샬롬의 저울추’는 평형을 이루는 정확한 계량 도구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샬롬의 돌’은 주님의 제단을 쌓는 데 사용하는 억지로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경이 알려주는 샬롬은 막연한 고요함이 아닙니다. 불균형을 잠재우는 균형, 혼란을 잠잠하게 하는 조화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샬롬의 의미가 기드온을 통해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습니다. 포도주 틀 안에서 밀알을 타작하는 모습이 이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작은 소리에도 움찔하며 퀭한 눈으로 초조하게 주위를 살핍니다. 비참한 자기 모습에 한숨만 흘러나옵니다. 삶은 버겁고 사람은 무섭습니다. 일상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주변 곳곳마다 죽음의 검은 물결로 가득합니다. 마침내 그는 주님께 버림받았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런 기드온을 향해 주님은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때 ‘안심’으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 역시 ‘샬롬’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몸소 선언하신 ‘샬롬’을 들었습니다. 그 샬롬이 그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와닿았습니다. 기드온은 즉각 반응했습니다. 하나님을 가리켜 ‘샬롬이신 주님’이라고 부르며 예배 했습니다.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연약한 인간이 외치는 가장 절절한 고백입니다.
이때 기드온이 이해한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끝나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드온과 온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뒤흔들었던 공포를 가라앉히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실망을 씻어내는 희망입니다. ‘샬롬’은 구약에서 총 237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이 가장 바라고 기대하는 소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해 ‘야훼 샬롬’이라는 이름을 직접 부른 사람은 기드온이 유일합니다. 그는 샬롬의 의미를 성경에서 가장 잘 경험하고 드러낸 인물입니다.
결국 기드온은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샬롬을 이루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끌고 미디안과 맞서 싸워 이겼습니다. 심지어 군사 300명으로 수많은 적군을 격퇴했습니다. 사사기에 담긴 가장 화려한 승리입니다. 이제 미디안이 이스라엘에 복종했습니다. 황폐한 땅이 평온해 졌습니다(삿 8:28). 마침내 이스라엘에 샬롬이 찾아왔습니다.
불완전한 샬롬
그러나 기드온을 통해 이룬 샬롬은 곧 치명적인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는 백성에게 받은 막대한 금으로 대제사장 의복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훗날 이스라엘을 타락시키는 빌미가 됩니다. 게다가 그의 첩이 낳은 아들 아비멜렉이 아버지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거침없이 살육을 저지르는 폭군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또다시 황무 해지고 샬롬이 사라졌습니다.
사사 시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 내내 샬롬의 회복과 상실이 반복되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황금기가 잠시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나라는 남과 북으로 나누어집니다. 외적의 침입이 반복됩니다. 정치적 혼란이 이어집니다. 마침내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당합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충격적인 절망을 경험합니다. 시간이 흘러 놀라운 은혜로 바벨론 포로살이에서 돌아와 성전과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 가운데 여전히 불안은 잠잠해지지 않습니다.
온전함을 다 이루신 예수님
그렇지만 하나님은 백성이 겪는 모든 절망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이 땅에 참된 샬롬을 이루기 위해 마침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구약의 ‘샬롬’을 계승해 사용한 헬라어 단어가 있습니다. ‘에이레네’입니다. 안전과 번영을 이루는 평화와 조화를 가리킵니다. 즉 샬롬과 마찬가지로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그런 까닭에 천사들이 깊은 밤,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며 이렇게 찬송합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에이레네]로다”(눅 2:14).
이어서 마태복음 5장 9절 함께 읽겠습니다.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팔복’을 말씀하시며 “화평하게 하는 자”, 곧 ‘에이레네(샬롬)를 이루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마 5:9).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의 샬롬을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참 사람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며 겪는 모든 아픔과 시련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고통은 지난날 기드온이 경험했던 ‘하나님께 버림받음’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절규하셨습니다.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아득한 고독입니다. 온 우주를 관통하는 암담한 절망의 절정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십자가는 이대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날, 예수님이 숨을 거두기 직전에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 함께 읽겠습니다.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주님은 마지막 호흡을 다해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십자가는 가장 완전한 ‘온전함’입니다. 샬롬의 완성입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샬롬은 공허한 고요가 아닙니다. 창백한 적막도 아닙니다. 처절한 신음과 솟구치는 눈물을 거쳐 피어난, 진정한 평화입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술관 한쪽에 전시된 도자기처럼, 매끈한 윤기를 지니며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깨지고 짓밟히고 비틀거린 채로 살아갑니다. 영혼 어딘가를 절룩거립니다. 단지 겉으로만 아닌 척 애쓸 뿐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포도주 틀 안에 웅크린 채 울부짖는 기드온이 존재합니다.
저마다의 기드온을 끌어 안으시길 바랍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품고 내 안의 가장 깊은 어둠을 마주 보시길 바랍니다. 담대히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철저히 망가지고 부서진 그 틈새로 하나님의 포근한 샬롬이 기어이 찾아옵니다. 도무지 회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모든 절망까지도 끌어모아 당신의 형상으로 기어이 완성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따뜻하고도 굳세 음성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짙은 고난을 통해 비로소 열리는 진정한 샬롬을 신뢰해야 합니다.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주님의 온전함을 전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지금 이곳에서 평화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그 모든 걸음과 헌신을 귀하게 보십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귀한 자녀로 부르심을 믿습니다. 그 믿음을 가슴에 품고 어떤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샬롬을 바라보며 살아가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야훼 샬롬’, 당신 자녀들을 온전하게 하시는 주 하나님.
황폐한 일상을 살아가던 기드온에게서 저희 모습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울부짖는 그의 한탄에 귀 기울입니다. 삶의 여러 모순에 방황하는 마음을 헤아립니다. 저마다 겪는 삶의 전쟁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모두에게 주님의 참된 평화가 넘치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만 높이며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세상에 전하게 하옵소서.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