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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3장 1~9, 14~16절 “야훼 치드케누, 의로우신 주님”

2026-08-23
정대진 목사

2026년 8월 23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예레미야 33장 1~9, 14~16절 “야훼 치드케누, 의로우신 주님”


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참호와 칼을 대항하여

5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여움과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시체로 이 성을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6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8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9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참으로 의로우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님들과 풍성히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상처투성이 성경

성경이 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일까요? 성경의 내용과 정서와 감정을 인간의 형태로 빚는다면 어떤 모양일까요? 하얗고 고운 살결을 지닌 귀부인은 아닙니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근육질 용사도 아닙니다. 성경을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읽으신 분들은 충분히 공감하실 겁니다. 성경이 만약 사람이라면 그는 온몸 구석구석에 커다란 흉터가 있을 겁니다. 절뚝거리며 걸을 겁니다.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을 겁니다. 살짝만 건드려도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올 겁니다.


성경은 말끔한 온실 속에서 쓰인 낭만적인 시집이 아닙니다. 인간 역사상 가장 참혹한 눈물과 피눈물이 흐르는 절망의 골짜기 한가운데서 빚어진 책입니다. 그중에서도 예레미야는 가장 크고 끔찍한 상처를 보여줍니다. 아무리 붕대를 칭칭 감아도 여전히 고름 섞인 피가 묻어 있습니다. 그 어떤 약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을 지닌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직 갇혀 있을 때에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그런 예레미야가 처한 극단적인 위기 상황을 보여줍니다. 1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의미심장한 정보를 확인합니다. 예레미야는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습니다. 이것은 앞장인 32장의 상황을 전제합니다. 예레미야 32장 2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2 그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주전 587년경 예루살렘 성벽 밖에는 바벨론 제국의 군대가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완벽히 독 안에 든 쥐였습니다. 성안에는 물도 식량도 모두 바닥났고,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은 물론이고 왕궁까지 허물어 성벽 틈을 메우며 힘겹게 방어 했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시련을 겪을수록 듣고 싶은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진리로 포장한 달콤한 거짓을 원합니다. 특히나 막중한 종교 권위를 지닌 예언자에게 그러한 욕망을 더욱 들이밉니다. 


예레미야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 목숨을 건지고 안전하게 지내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심장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경고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말씀만 전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듣기 원하는 거짓이 아닌 들어야 할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바로 유다의 멸망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 시드기야를 향해 거침없이 선언했습니다. 바벨론 왕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유다 왕은 포로로 끌려갈 겁니다.


이러한 외침의 결과로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 즉 왕궁을 지키는 정예부대가 있는 마당에 갇혔습니다. 그의 예언에 대한 임금의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낸 특별 조치입니다. 게다가 ‘시위대 뜰’이라는 공간은 느헤미야서에서 한 번 언급되는 것 외에, 구약 전체에서 예레미야서 후반부에만 등장합니다. 예레미야가 처한 암담한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겹겹이 둘러싼 억압입니다. 성 밖에서는 적군이 성문을 부수려 합니다. 성안에서는 동족의 배신과 핍박으로 묶여 있었습니다. 철저한 고립과 배신의 한복판에 덩그러니 던져진 최악의 처지였습니다.


32장에 이어 33장에도 예레미야는 ‘아직’ 그곳에 갇혀 있습니다. 아.직. 성경에 나오는 가장 슬픈 두 글자입니다. 32장 2절과 33장 1절 사이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 시간의 무게는 매우 무거웠고, 질감은 무척 거칠었습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의 온몸과 마음이 다치고 찢기고 상처 입었습니다.


우리 또한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눈앞의 문제를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모른 채 숨 막히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극적으로 구해내지 않으셨습니다. 마법처럼 감옥 문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말씀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이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가장 어둡고 어두울 때야말로 주님 안에서 제일 빛나는 순간입니다. 인생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시련이 멈추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건네시는 회복의 대화입니다. 



잊힌 진리,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렇다면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무엇을 말씀 하셨을까요? 본문 2절 함께 읽겠습니다.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예레미야는 백성을 향해, 지금 자기가 전할 말씀의 주인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줍니다. 주님께서는 일을 행하시고 성취하십니다. 여기서 ‘일’은 오랫동안 세밀하게 준비해 온 계획을 뜻합니다. 그 일을 주님은 만들고 이루십니다. 여기서 ‘만들다’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빚으실 때 쓰였던 단어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18장에서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하며 진흙을 짓이겨 완전히 새로운 그릇을 빚어낼 때 사용한 전문 용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일을 행하고 만들며 이루신다는 소개 안에는 평범한 듯 하지만 뜨거운 사랑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실 새로운 창조 의지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구원은 예루살렘 성벽의 허물어진 틈에 대충 때우는 임시방편이 아닙니다. 완전히 뭉개져 버린 진흙 덩어리 같은 이스라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두 손으로 움켜쥐고 완전히 새로운 그릇으로 다시 빚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곧 ‘야훼’입니다. 지난날 출애굽 사건을 암시합니다. 야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하시며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거듭 분명히 알리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에 담긴 인격대로 당신의 자녀들에게 창조와 구원을 행하시고 마침내 이루셨습니다.


이렇게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 먼저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드문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유다 사람들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곧바로 본론을 얘기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어떤 이유로 유다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힘주어 소개했을까요? 바로 그들이 되새겨야 할 ‘잊힌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안에 모인 백성은 주님께서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위기에서 건져주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래야 하나님답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까닭에 기대를 완전히 짓밟는, 패배와 실패를 예고하는 예레미야를 증오하고 위협했습니다. 그들은 거창한 종교 행위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는 차분히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그럴 마음이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실망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표대로 주님이 움직이지 않을 때, 저마다의 시위대 뜰에 갇혀 서늘한 냉기와 어둠 속에서 신음할 때, 누구나 진리를 왜곡하고 복음을 멀리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잠잠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고난받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절 함께 읽겠습니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은 당신께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오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 큰 소리로 기도하는 통성기도의 근거로 잘못 사용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 가게에서 응석 부리듯이, 목청을 높여 외치면 하나님이 응답하실거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부르짖으라는 말은 감정에 겨워 내지르는 절규가 아닙니다. 명료한 이성으로 상대방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주님과 인격적으로 소통하고자 문을 두드리는 손짓입니다. 지금 내 목을 조여 오는 모든 어둠과 혼란 너머에 있는, 숨겨진 뜻을 보여 달라는 적극적인 요청입니다.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그 안을 적신 자녀의 울음에 하나님은 반응하시고 응답하십니다.



새 살이 돋아나는 치유

하나님은 응답하시며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십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6~9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화면 보시면서 새한글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6 보라, 내가 이 도시의 상처에 새살이 오르게 하고 치료해 주겠다. 그렇게 그들을 낫게 해 주겠다. 그들에게 평화와 진실을 넉넉하게 드러내 보이겠다. 7 내가 유다의 운명과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려주겠다. 그들을 이전처럼 다시 세워 주겠다. 8 내가 그들을 그들의 모든 잘못에서 깨끗하게 해 주겠다. 그러한 잘못들로 그들은 나에게 죄를 지었다. 내가 그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겠다. 그러한 잘못들로 그들은 나에게 죄를 짓고, 나와 관계를 끊었다. 9 이 도시가 나에게는 즐거움을 주는 이름, 찬양과 영광이 될 것이다. 땅의 모든 민족 가운데서 그럴 것이다. 그들은 내가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베푸는 온갖 좋은 것에 대한 소문을 들을 것이다. 그러고는 내가 이 도시에 베푸는 온갖 좋은 것과 평화 때문에, 그들은 무서워하고 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군대에 의해 참혹하게 파괴될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놀라운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현재 상황을 두고 보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름다운 회복입니다. 전체 내용의 핵심을 6절 전반부가 알려줍니다. 바로 ‘새살이 돋아나는 치유’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철저히 병들어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들이 바벨론에게 망한 것은 단지 군사나 외교의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깨뜨리고 영혼 깊이 곪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벽만 높이 쌓아봤자 결국 또 무너집니다. 주님은 그 모든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하시고 생명이 움트게 하십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평화와 안전”을 누립니다. 회복되고 죄 용서를 받습니다. 온 세상 가운데 기쁨과 찬양과 영광의 대상이 됩니다. 너무나 가슴 설레는 눈부시고 찬란한 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유념해야 합니다. 이토록 놀라운 앞날을 예언자가 선언하지만, 당장 현실은 어둡고 처참합니다. 여전히 예루살렘 성 주위를 바벨론 군대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시드기야 왕을 비롯한 유다 지도자들은 공포와 광기에 휩싸여 백성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거센 혼란 속에 예레미야의 목숨은 바람 앞에 등불과 같습니다.


이렇듯 현재 유다가 처한 어두운 상황과 미래에 주님께서 이루실 영광은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뚜렷한 대비를 이룹니다. 이를 통해 알게 되는 진리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살은 깊은 상처가 아문 뒤에 새롭게 돋아납니다. 주님의 평화와 안전은 공포와 위기를 거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파괴를 전제합니다. 기쁨과 찬양과 영광은 슬픔과 저주와 암흑을 지나 다가옵니다.


예레미야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진실입니다. 복잡하고 입체적이며 불편한 복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예쁜 선물을 손쉽게 안겨주지 않으십니다. 눈물 맺힌 삶의 자리에서 순식간에 탈출시키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질척이는 땅 위에 굳게 발을 딛고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삶의 터전에서 진정한 회복과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머리로는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본능적으로 거부합니다. 선뜻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뼈와 살을 지니고, 심장 박동에 의지하고, 호흡하며 살아가야 하는 연약한 인간의 숙명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억지로 몰아붙이지 않으십니다. 힘겨워하는 백성을 향해 당신 성품을 오롯이 담은 이름을 들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참된 의로움

본문 16절 함께 읽겠습니다.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그날, 예루살렘은 패배와 정복을 거쳐 포로기를 지나 다시 놀랍게 회복되고 구원 받습니다. 그때 비로소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아난 예루살렘을 향해 사람들은 한 가지 이름을 부릅니다. 그 이름은 곧 하나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바로 <야훼 치드케누>, “의로우신 주님”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를 핍박한 유다의 마지막 왕 이름 ‘시드기야’를 히브리어로 발음하면 <치드키야>입니다. 풀이하자면 “야훼는 ‘나의 의’”라는 뜻입니다. 언젠가 예루살렘을 향해 불릴 <야훼 치드케누>, “야훼는 ‘우리의 의’”라는 하나님의 이름과 비슷하면서도 절묘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시드기야는 온갖 죄악을 벌이며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자기 이름과 달리 하나님의 의로움이 아니라 얄팍한 판단과 처세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온갖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본래 시드기야는 바벨론이 세운 허수아비 왕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을 배신하고 이집트에게 도움 청했습니다. 현재 벌어진 바벨론의 포위와 이후에 있을 참혹한 정복은 이러한 시드기야의 반란에 대한 응징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의 불의함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바벨론의 포위로 예루살렘이 위태롭게 되자 시드기야와 귀족들은 덜컥 겁이 났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하려 했습니다. 그동안 관심 없던 율법을 갑자기 들먹였습니다. 같은 민족이면서 노예로 부렸던 사람들을 풀어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엄숙하게 언약을 맺고 자유를 선포했습니다. 종교의 형식을 빌린, 제발 좀 살려 달라는 눈물겨운 몸부림이었습니다. 


그 후 절묘하게도 시드기야가 도움을 요청한 이집트 군대가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을 들은 바벨론 군대는 전술상 잠시 포위를 풀고 후퇴했습니다. 드디어 성 밖의 적들이 사라졌습니다. 위선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시드기야와 귀족들의 눈빛이 싹 달라졌습니다. 불과 조금 전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자유를 주었던 노예들을 강제로 다시 끌고 왔습니다. 예전처럼 무자비하게 부려 먹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도 뉴스 화면으로 쉽게 목격하는 장면입니다. 재벌 회장이 갑질 논란으로 구속될 위기에 빠지자 갑자기 기업 상생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문제를 해결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하청기업을 착취합니다. 심각한 비리 혐의를 받은 정치인이 갑자기 사람들이 열광하는 법안을 들고 나타납니다. 온화한 표정으로 약자 보호를 외치며 여론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다음 뜻대로 일이 풀리면 다시 정색하고 권력을 휘두르기도 합니다. 인간이 목에 힘을 주고 그럴듯하게 외치는 정의가 얼마나 나약하고 모순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우리 주님의 의로움은 정반대입니다. 약함을 품고 일으키는 공의입니다. 함께 선을 이루는 정의입니다. 관련해서 “의로우신 주님”이라는 이름으로 예루살렘 성이 불린다는 16절의 예고를 다시 주목해야 합니다. 유명하고 권력을 쥔 한 사람이 아닙니다. 훌륭하고 존경받는 지도자 만이 아닙니다. 바벨론의 칼날에 철저히 짓밟히고 무너진 모든 사람을 향한 위대한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그럴듯하게 선전 선동하는 권력을 뛰어넘는 진정한 통치자입니다. 주님의 다스림은 이 땅의 헛된 이념에 메이지 않는 참된 정의와 공평입니다.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진정한 생명과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십니다. 그 뜻을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

이처럼 우리의 진정한 의로움이 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 함께 읽겠습니다.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당시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공의와 철저히 멀어져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자신의 재산과 지식을 자랑했습니다. 가난한 교인을 무시하고 굴욕감을 안겼습니다. 탐욕으로 조급해하며 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자기들만 옳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한마디로 시드기야의 후예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의로움이 되십니다. 예레미야는 오늘 읽은 본문에 앞서, 23장 5~6절에 “여호와 우리의 공의”, 즉 “야훼 치드케누”라는 이름으로 불릴 메시아를 예고합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참사람이 되시어, 이 땅을 거닐며 함께 울고 웃으셨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극한의 고통과 좌절과 모욕 속에 파묻히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시다 숨을 거두셨습니다. 역사상 가장 초라한 무능력과 실패 그 자체입니다.


그렇지만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주님은 사람들이 도무지 알지 못한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온통 새 살로 가득한 새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나시어 기어이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토기장이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완성하신 가장 위대한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믿고 고백합니다. 살아가며 경험하는 그 어떤 고난도 우리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그 어느 시위대 뜰도 시드기야도 바벨론 군대도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죽지만 결코 죽지 않고 주님과 함께 회복되어 다시 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꺼낸 질문을 다시 드립니다. 성경이 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일까요. 온몸에는 온갖 상처로 뒤덮여 있을 것입니다. 눈물과 피로 흥건히 적셔 있을 것입니다. 절뚝거리며 걷고,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을 것입니다. 말씀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땀과 눈물로 철저히 복음을 살아내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우리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막연하게 짐작하지 않으십니다. 흉터투성이인 당신의 온몸으로 끌어안으시고 함께 아파하십니다. 새살이 돋아나게 하시어 의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가장 아프고 으스러진 자리마다 찬란하게 돋아날 부활의 새살을 기대하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의로우신 주님과 동행하며 회복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참된 정의와 공평의 하나님.

살아가며 때로는 시위대 뜰에 갇힌 것 같은 암흑을 경험합니다. 바벨론 군대에 둘러싸인 절망 가운데 휩싸이곤 합니다. 하지만 고통받는 자녀들을 마침내 치유하시고 구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손길을 의지합니다. 새살을 돋게 하시어 완성하실 하나님의 의를 바라봅니다. 성도의 간구에 응답하시어 끝내 이루실 크고 놀라운 일을 소망합니다.

저희의 연약한 믿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굳게 붙잡게 하옵소서. 어떤 시련에도 낙심하지 말고, 지금 이곳에서 이루시는 주님의 창조와 구원에 참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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