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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장 1~14절 "움직이는 하나님"

2026-08-16
정대진 목사

2026년 8월 16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출애굽기 3장 1~14절 "움직이는 하나님"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사랑으로 움직이시는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님들과 풍성히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어떤 인도하심

하나님은 도무지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적어도 광야를 서성이던 어느 노인에게는 분명 그러했습니다. 400년이나 노예로 신음하는 이스라엘에게 주님은 철저히 무심한 존재였습니다. 고통에 휩싸인 자기 백성에게 달려오지 않으셨습니다. 멀찍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서늘한 침묵 속에 바위처럼 꿈쩍 않고 자기 자리만 지키고 계셨습니다. 


어느 늙은 목자가 처절히 깨달은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그는 자기처럼 메마른 지팡이를 들고 양 떼를 몰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그를 가리켜 한때 이집트 왕궁을 거닐 던 왕자였다고 말한다면 듣는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까요? 대부분 놀리지 말라며 당황해 할 겁니다. 그만큼 80세 노인 모세의 초라한 현재는 찬란했던 과거와 극명하게 다릅니다. 


어린 시절 뛰놀았던 궁궐의 황금 장식과 가축들의 누런 분뇨가, 화려한 궁중 음악과 황량한 모래바람 소리가 명백한 대조를 이룹니다. 모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이집트 제국의 최고 권력자이자 엘리트로 자랐습니다. 남 부러울 것 없는 호화로운 풍요를 누리며 강력한 권력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집트 사람들이 혐오하는 목축 일을 합니다. 성경 인물 중 가장 가파른 수직 낙하입니다. 지난날에 대한 번민과 후회가 그를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날도 그는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습니다. 발걸음은 무심결에 광야 서쪽,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향했습니다. 이 장면을 묘사하는 성경 구절이 인상적입니다. 본문 1절 함께 읽겠습니다.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모세가 장인의 양 떼를 광야 서쪽,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인도했습니다. 여기서 ‘인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하그>는 출애굽기에서 단 세 번만 등장합니다. 흥미롭게도 나머지 두 번은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출애굽기 10장 14절에는 하나님이 강력한 동풍을 불러와 이집트 땅에 메뚜기 재앙을 내렸습니다. 14장 25절에는 이집트 군대 병거의 바퀴를 벗겨서 그들을 패배로 몰아가셨습니다. 두 구절 모두 주님이 역동적인 인도하심을 묘사하며 <나하그>를 사용하였습니다. 역사 속에 힘차게 팔을 뻗으시는 손길입니다.


반면에 1절에서 똑같은 단어로 기록하는 모세의 모습은 정반대입니다. 그가 평소에 하던 뻔하고 소박한 일상입니다. 모세는 늘 그랬듯이 그날도 자기가 가축을 몰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인도하셨습니다. 마침내 오랜 침묵을 깨고 움직이셨습니다. 그를 당신께로 오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정한 인도하심은 가장 소소한 삶 속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모습으로 강력한 이끄심



황당한 부르심

주님과 모세의 만남은 신비로운 장면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어느 떨기나무를 보았습니다. 광야에서 흔하게 자라는 가시덤불입니다. 땔감으로도 쓸 수 없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식물입니다. 모세는 그 떨기나무에서 늙고 힘없는 자신을 발견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나무가 불에 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영롱한 빛을 계속 발하고 있었습니다. 불꽃이 모세의 눈길을 사로잡고, 발길을 잡아당겼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9~10절 함께 읽겠습니다.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멈추어 계시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들을 구하고 가나안으로 인도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 중요한 과업을 맡길 지도자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이집트로 돌아가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노예들을 해방 시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때 모세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무척 황당했을 겁니다. 오래전 그가 이미 시도했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태어날 때 잔인한 유아 살해의 희생자가 될 뻔했습니다.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강 가에 버려졌습니다. 하지만 극적으로 살아남아 이집트 공주의 양자로 자랐습니다. 게다가 어머니 요게벳이 그의 유모로 왕궁에 들어왔습니다. 


긴장감 넘치는 기묘한 성장 배경입니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모세는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일찌감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노예의 아들인 내가 이집트 왕족의 일원이 된 이유를 자연스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무언가 특별한 계획을 세우셨으리라고 확신했습니다. 혈기 왕성하고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통당하는 동족을 구하고자 적극 나섰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과 굴욕을 겪었습니다. 훗날 집사 스데반은 그 사건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7장 24~25절 새한글성경으로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24 또 어떤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불의를 겪는 것을 보고서 모세가 막아 주었습니다. 그 이집트 사람을 쳐 죽여서, 억눌려 고생하는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습니다. 25 모세는 자기 형제들이 이해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손을 빌려 구원해 주시는 것이라고요. 그러나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어느 잔인한 이집트 관리를 처단한 것은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손을 빌려 구원’하시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모세에게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억압에서 구하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을 겁니다. 이집트 입장에서는 ‘역모’입니다. 왕족이라고 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심각한 반역입니다.


그렇게 모세는 그동안 자신이 누려온 모든 기득권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진심을 알아주리라 기대했습니다. 함께 마음을 모아 해방을 성공시키리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싸늘하기만 합니다. 배신과 조롱을 당했습니다. 허무하게 버림받았습니다. 철저히 홀로 남았습니다. 


결국 그는 처벌을 피하려고 광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방 신을 섬기는 장인의 눈치를 보며 양을 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자기 양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털터리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이렇게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유능한 인재로 주목받아 차기 CEO로 거론되었으나 사내 정치에 밀려 회사에서 쫓겨난 사람을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그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서 처가살이 하며 장인이 경영하는 중소기업 말단 직원으로 일하는 처량한 신세와 비슷합니다.


그렇게 4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모세는 어느새 무기력한 여든 살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제야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와서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헛헛한 웃음이 저절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도무지 따를 수 없었습니다. ‘가라’고 명하시는 하나님과 ‘못 갑니다’라고 거부하는 모세 사이에 실랑이가 이어집니다. 



이름을 묻다

그러다가 불쑥 모세는 이렇게 질문 합니다.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자기를 보내셨다고 말하는 상황을 가정합니다. 그러면 백성이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이들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주님과 위대한 언약을 맺은 주인공, 아브라함의 후예인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조상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왜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이름을 물을까요? 더 정확히 말해, 모세는 왜 그들이 그런 질문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을까요?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노예살이 때문입니다. 어느새 그들에게 하나님은 침묵하고 멀리 떠나버린 신이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아무리 고통 속에 울부짖어도 움직이지 않는 분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그분의 존재는 어렴풋이 인정하더라도 이름은 차츰 마음에서 지우고 말았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물으며 주님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이유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근본적으로 모세 자신의 것입니다. 누구보다 모세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간절히 알기 원했습니다. 단순히 몇 글자로 이루어진 명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에 담긴,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주님의 인격을 마주하길 원했습니다.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를 때 온몸과 마음을 휘감는 따스한 관계를 확인하길 바랐습니다. 그 이름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 주님의 사랑을 느끼길 소망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름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지금 우리는 여러 주에 걸쳐 하나님의 이름을 함께 묵상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장 깊은 인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깊이 살펴보는 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 중에서도 주님 스스로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려주는 지 주목해야 합니다. 게다가 본문은 출애굽이라는, 구약에 기록된 가장 중요한 구원 사건과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단연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 개역개정 성경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한 성경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리스 철학의 개념을 바탕으로 합니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분명 틀린건 아니지만 조금 아쉽습니다. 구약 원문에 훨씬 더 풍성한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문장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입니다. 그 이름은 단어 세 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작과 끝은 둘 다 ‘에흐예’입니다. ‘나는 ~이다.’라는 말의 ‘미완료 형’입니다. “나는 될 것이다.” 혹은 “나는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중간에 있는 ‘아쉐르’는 영어의 ‘who’와 같은 관계대명사 역할을 합니다. 뒤이어 나오는 내용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존재’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알려주신 이름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를 이렇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있을 자로 있을 것이다.”, 혹은 “나는 내가 될 바로 그 존재가 될 것이다.”입니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으실 겁니다. 이것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두커니 멈추어 계시지 않으십니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일들을 앞으로 펼쳐 보이십니다. 그러한 역동적인 ‘움직임’을 당신의 이름에 담아 분명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관련해서 본문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름을 알려주시기 직전에, 사명을 맡기며 직접 하신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모세가 계속 부르심을 거부하자 출애굽기 4장 12, 15절에 하나님은 ‘네 입과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모두 하나님의 이름에 포함되는 “나는 있을 것이다.”라는 뜻의 <에흐예>가 나옵니다. 또한 출애굽기 6장 7절에도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될 것’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설명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움직이십니다. 지난날 그러하셨듯이 앞으로도 함께 하십니다. 신실하신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모세와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는 있을 자로 있을 것이다.’라고 분명히 외치신 하나님의 이름을 품고 나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눈부신 복음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집트의 수많은 우상은 자신을 특정 영역과 연관해 드러내었습니다. “태양의 신” 혹은 “죽음의 신”처럼 어떤 공간 혹은 직업의 신으로 경배 받았습니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은 당신을 어떠한 틀에 가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무것에도 규정당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단호한 의지를 이름에 담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이 되고자 하는 존재로 되어가신다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부적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헛된 욕망으로 휘두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얄팍한 주문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 대신 훗날 홍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누구도 감히 예상할 수 없었던 위대한 구원을 당신의 분명한 의지로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멈추어 계시지 않으십니다. 우주 위 높이 솟은 보좌 위에만 근엄하게 앉아 계시지 않으십니다. 지난 날의 경험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일들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삭막한 규칙과 경험으로 묶어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지금 나를 향해 오시는 주님의 열려있는 두 팔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낯선 하나님을 마주하는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그래야 장인의 양 떼를 치는 모세처럼, 내 삶의 가장 비참한 고난을 이겨낼 참된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본질

이렇듯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 안에 적극적인 구원의 의지와 계획을 담으셨습니다. 그 이름이 모세를 일으켰습니다. 마침내 그는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모세는 움직이시고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기 자신과 직면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지난날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 처절한 좌절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결코 인생의 낙오자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모세는 감격을 안고 이집트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행한 출애굽 사역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출애굽은 단순히 정치적 사건이 아닙니다. 거창한 혁명이나 계급투쟁이 아닙니다. 화려한 거짓으로 쌓은 이집트 제국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당당히 드러낸 복음 선포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본질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앞날을 향해 움직이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험난한 노예살이를 지나오며 주님을 과거에 가두었습니다. 옛날 조상들에게는 대단한 분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마주하는 고달픈 삶의 현실과는 무관하다고 여겼습니다. 앞날에 대한 기대를 지워버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어느새 이집트의 우상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러던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주님의 살아 숨 쉬는 이름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그들과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그 증거를 열 가지 재앙으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마침내 파라오의 장자마저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국의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우상이 쓰러졌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했던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그 자리에 주님의 이름이 우뚝 섰습니다.



하나님이 진정 하나님이 되신 곳, 십자가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움직임을 기록합니다. 당신의 자녀들과 항상 동행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유한한 경험과 판단으로 감히 다 담을 수 없는 무한한 신비로 새롭게 찾아오셨습니다. 찬란한 변화를 끊임없이 이어가셨습니다. 그 정점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여기서 놀라운 역설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일찍이 모세에게 ‘나는 내가 될 것이다’라는, 당신의 열린 미래를 담은 신비로운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이루심’과 ‘하나님다움’은 인간과 아득한 거리감이 아닙니다. 웅장한 신성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한 아기로 태어나 내뱉는 울부짖음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임당하며 새어나오는 신음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진정한 하나님다움을 지극히 연약한 ‘참 사람’의 모습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너무나 위대한 모순입니다. 출애굽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주님의 구원은 인간이 보기에 전혀 하나님답지 않은 방식으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절망과 감히 비할 수 없는 혹독한 절망을 거치셨습니다. 그 결과 부활의 생명이 피어올랐습니다. 부활이 부활다울 수 있는 까닭은 십자가를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하나님다울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진정한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자유로운 주님의 의지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마침내 온 세상을 구원했습니다. 따라서 저마다의 떨기나무 앞에 설 때, 나의 가장 치명적인 결핍과 약점을 발견할 때, 나만의 십자가를 지고 넘어질 때, 그때야말로 하나님의 참된 하나님 되심을, 부활의 영광을 온전히 깨닫는 순간임을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쩌면 지금 여든 살 모세처럼 스산한 마음으로 인생의 발걸음을 옮기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도무지 움직이지 않아 보이는 하나님의 침묵에 모든 걸 내려놓고 우두커니 멈춰서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때, 모세를 일으켜 세워 자기 백성에게 보내며 주님이 친히 알려주신 이름을 마음 깊이 새기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열어가시는 놀랍고 위대한 구원을 신뢰하길 바랍니다. 부르심에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변함없이 함께 하시어 우리에게 가장 합당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실 줄 믿습니다.



기도

움직이시고, 이루어가시는 주 하나님.

초라한 일상 가운데 지친 모세에게 찾아와 알려주신 거룩한 이름을 마음 깊이 품어봅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저희를 위해, 앞으로 영원히 하나님이 되어가겠다고 약속하신 위대한 은혜를 바라봅니다. 그 이름 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이루셨음을 고백합니다.

그 믿음을 따라 자신을 돌아보며 어떤 시련에 좌절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 사람이 되심으로 진정한 하나님 되신 신비로운 구원의 길을 올바로 깨닫게 하옵소서.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이스라엘처럼, 고난받고 소외당하는 이들을 향한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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