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17:45~47; 삼하 5:9~10 "야훼 츠바오트, 만군의 주님"
2026년 8월 9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정대진 목사
삼상 17:45~47; 삼하 5:9~10 "야훼 츠바오트, 만군의 주님"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9 다윗이 그 산성에 살면서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고독한 소년
그는 혼자였습니다. 하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한 소년이 전쟁터에 서 있습니다. 참혹한 공간 속 매우 이질적인 존재입니다. 그는 군인이 아닙니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먼 길을 걸어온 천덕꾸러기에 불과합니다. 형들에게 전해줄 많은 먹을거리를 짊어지고 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런 막내를 큰 형 엘리압은 반갑게 맞이하지 않습니다. 대신 분노를 쏟아내며 몰아붙입니다. 사무엘상 17장 28절 후반부를 새한글 성경으로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네가 무슨 까닭으로 내려온 것이냐? 광야에 있는 보잘것없는 그 양 떼는 누구한테 맡기고? 네가 주제넘고 네 맘이 못된 건 내가 잘 알아. 그저 전쟁 구경을 하려고 내려온 거지.”
하나하나 매우 매섭습니다. 단순한 핀잔이 아니라 경멸입니다. 다윗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단지 한순간 욱하고 내뱉은 말이 아닙니다. 다윗이 그동안 어떻게 자라왔는지, 가족 안에서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를 낱낱이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지독한 고독입니다. 형들이 기뻐할 만한 음식을 손에 들고도 전혀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엘라 골짜기로 가기까지 험한 고생이 외면 당했습니다. 형제들을 위하는 진심이 완전히 짓밟혔습니다.
사울 왕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골리앗과 싸우겠다는 다윗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삼상 17:33) 다윗의 집요한 설득으로 어쩔 수 없이 자기 갑옷과 투구를 내어주었습니다. 체념 끝에 마지못해 내린 결정입니다. 사울 뿐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군대 어느 누구도 그에게 아무런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불편한 상황이 얼른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다윗 맞은편에 서 있는 골리앗의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격투기 시합 결승전에 오른 헤비급 선수 혹은 액션 영화에 등장하는 거대한 몸집의 전사를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골리앗이 그러했습니다. 블레셋의 완벽한 살인병기 입니다. 성경기록을 오늘날 단위로 바꾸면, 골리앗은 키가 3미터 가까이 되었습니다. 갑옷의 무게는 57kg, 창날은 7kg 정도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전쟁터에서 다진 강력한 전투력을 한 눈에 보여줍니다.
블레셋 군대와 마주한 이스라엘의 절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정말 두려운 사실은 두 나라 사이의 기술격차입니다. 해양 민족인 블레셋은 철기 제련 기술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아직 청동기 문명에 멈춰 있었습니다. 제대로 만든 철 무기를 가진 사람은 사울 왕과 왕세자 요나단, 이 둘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군인들은 열악한 무기를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마치 최신 장갑차 앞에 녹슨 곡괭이를 들고 마주 서 있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로서는 패배를 당연하게 여기는 지극히 암울한 상황입니다. 그 한복판으로 다윗이 물매와 돌멩이 다섯 개만 들고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제대로 된 군사 훈련을 받지 못한 소년이 뭔가 해낼 거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불쾌하고 건방져 보입니다. 반면에 골리앗의 이름을 외치는 블레셋 군대의 함성은 점점 커져만 갑니다. 그들 눈에는 결과가 뻔한, 그저 즐거운 구경거리일 뿐입니다.
그 순간 다윗이 경험한 철저한 고립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사실 누구나 비슷한 상황에 던져질 때가 있습니다.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나를 비웃고 무시하며 거추장스럽게 여깁니다. 온통 싸늘한 눈길에 둘러싸여 완전히 홀로 남은 것 같은 절망에 사무치곤 합니다.
소년 다윗이 거둔 우주적 승리
하지만 다윗은 당당히 일어났습니다. 자신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물맷돌을 정확히 그의 머리에 명중시켜 쓰러뜨렸습니다. 상황을 완전히 뒤바꾸었습니다. 전혀 예상 못했던 눈부신 승리가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 결정적인 순간, 다윗이 외친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은 자기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만군’으로 옮긴 히브리어는 <츠바오트(צְבָאוֹת)>입니다. ‘많은 무리’ 혹은 ‘군대’를 뜻하는 <차바(צָבָא)>의 복수형입니다. 쉽게 말하면 ‘많은 군대가 모여 이루 훨씬 더 많은 군대’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를 넘어서는 천사들이 이루는 영적인 군대, 더 나아가 밤하늘을 빼곡히 채우는 수많은 별과 우주 전체의 대자연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해 ‘야훼 츠바오트’라고, ‘만군의 주님’으로 부른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벅찬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 군대만 지휘하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온 우주를 가득 채운 군대의 총사령관이시다.’라는 감격스러운 선언입니다. 그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녀들은 언제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눈부신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별처럼 하늘에 가득한 군대로 지켜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당시 옛날 사람들이 우주를 바라보는 생각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천문학의 발달로 별의 실체를, 적어도 수천 년 전 보다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을 비롯한 고대 서아시아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별을 우주에 떠 있는 물질이나 가스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신적 존재로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상 숭배를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밤 하늘을 메운 수많은 별은 야훼 하나님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대에 불과했습니다. 다윗이 믿는 만군의 주님은 온 우주를 이끄시면서도, 동시에 가장 연약한 자기 백성을 품에 안고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런 눈부신 깨달음을 얻었을까요? 물론 성경이 정확히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가 홀로 양 떼를 돌보던 광야입니다. 오늘처럼 공해가 없던 옛날 밤하늘에는 별들로 빼곡히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나운 맹수들이 울부짖고 싸늘한 밤공기가 뼈를 파고드는 그 고독한 들판에서, 소년 다윗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영롱하게 빛나는 별들을 향해 만군의 주님이 뻗으시는 손길을 깨달았습니다. 가슴 시리게 외로운 고통의 자리가 오히려 그에게 참 진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사울의 무거운 갑옷을 주저 없이 벗었습니다. 담대히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 그를 쓰러 뜨렸습니다.
광야 훈련
그 후 다윗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한순간에 온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탄탄대로가 놓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삶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급격한 추락을 경험합니다. 또 다른 시련이 덮쳐 옵니다. 다윗을 향한 사울의 병적인 질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비참한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목 끝에 누군가 항상 칼을 겨누는 것 같은 서늘한 살기를 느끼며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 모두가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엘라 골짜기의 찬란한 승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현실이었습니다. 또다시 다윗은 눈물겨운 광야를 지나야 했습니다. 너무나 잔인하고 힘겨운 고독입니다. 얼핏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 만군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든든한 성공을 계속 허락하지 않으셨을까요? 동시에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 주님은 끊임없이 자녀들을 사울 곁으로 밀어 넣으실까요?
답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만군의 주로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방식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폭군이 아닙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욕망에 따라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사랑으로 돌보는 목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하고 품어주는 넉넉한 내면의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따뜻한 품을 넓히려면 고통 가운데 부서지고 다듬어지는 시간을 거쳐야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꺾고 곧바로 왕이 되지 못한 이유입니다. 만약 그가 화려한 승리 이후에 곧바로 왕관을 머리에 썼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자기가 노력해 이룬 성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내 능력으로 쟁취한 결과로 오해하기 마련입니다. 주변 다른 나라들처럼 오만한 군주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다윗을 힘겨운 길을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둘람 굴에 모인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품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다스림을 닮는 진실한 지도자로 빚어 가셨습니다.
그렇게 십수 년이 흘렀습니다. 소년은 청년이 되었습니다. 목동은 용사가 되었습니다. 사울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자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장로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몰려왔습니다. 그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웠습니다. 마침내 왕관을 머리에 썼습니다. 너무나 극적인 인생 변화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성공 이야기가 아닙니다. 위대한 영웅 신화도 아닙니다. 다윗의 모든 삶을 이끄신 하나님의 손길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5장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 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온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몰려 들었습니다. 그들은 사울이 여전히 왕이었을 때에도, 주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여기시는 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목자”이자 “주권자”입니다. 여기서 주권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기드>입니다. 백성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앞서 걸으며 돌보는 지도자입니다. 사실상 “목자”와 같은 말입니다. 세속적인 왕과 전혀 다른, 하나님께서 몸소 본을 보이신 다스림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험난한 고독과 시련을 통과하게 하신 이유입니다. 그 어두운 시간을 통해 만군의 주님을 대신하는 목자로서 그의 중요한 정체성 만들어 가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처럼 깊고 깊은 외로움 속에서 아파할 때 귀 기울여야 할 말씀입니다. 당연히 머리에 써야 할 것 같은 왕관을 잃어버렸을 때 명심해야 할 진리입니다. 잠시 숨 고를 시간 없이 계속되는 시련을 홀로 통과할 때 기억해야 할 교훈입니다. 의미 없는 고통은 없습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그 모든 어두운 광야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뜻하신 다스림을 절절히 깨닫고 이루어 가게 하십니다.
산성 앞에서
이렇게 다윗은 무척 어렵게 왕이 되었습니다. 누구라도 잠시 숨을 돌리고 쉬면서 권력을 누리고 싶어할 겁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잠시의 여유도 없습니다. 곧바로 막중한 임무를 완수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정벌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깊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살벌한 내전이 끝난 직후입니다. 여전히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뉘어 상당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다윗이 자기가 속한 유다 지파가 자리 잡은 헤브론에 계속 눌러 앉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금세 심각한 분열을 다시 겪게 됩니다. 지도자로서 심각한 고민거리입니다.
결국 다윗은 이스라엘 땅 중앙 있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곳에 이방인인 여부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나라 가운데 위협적으로 존재하는 적을 물리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느 지파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수도로 세워 온 나라를 하나로 모으기에 적합한 성읍입니다. 다윗은 민족의 통합을 위해 헤브론을 중심으로한 자기 기득권을 내려놓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해발 800미터 고지대에 위치합니다. 게다가 동쪽으로 기드론 골짜기, 남서쪽으로 힌놈의 골짜기가 깊이 패어있었습니다. 여호수아도 함락하지 못한 철옹성이었습니다. 사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까닭에 여부스 사람들은 성벽 위에서 조롱을 퍼부었습니다. 본문 6절을 화면 보시면서 새번역 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6 다윗 왕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에 사는 여부스 사람을 치려고 하니, 그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너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 눈 먼 사람이나 다리 저는 사람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이 그 곳으로는 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부스 사람들은 시각장애인들만 대충 세워놔도 절대 올라올 수 없다며 노골적으로 비웃었습니다. 매우 오만한 군사 도발입니다. 동시에, 이제 막 왕으로 등극한 다윗의 지도력을 흔드는 심리전입니다. 다윗도 우리처럼 끊임없이 번민과 갈등에 휩싸인 연약한 인간입니다. 아직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빈틈을 노리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높이 치솟은 예루살렘 성 앞에서 골리앗을 떠올렸을지 모릅니다. 지독한 고독이 그를 휘감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엘라 골짜기에서 그러했듯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성벽 밖 기혼샘의 물을 안으로 길어 올리기 위해 성 밑의 바위를 뚫어 만든 지하 수직 통로를 발견했습니다. 성의 가장 취약한 약점이었습니다. 그곳에 최정예 요원들을 물길로 보냈습니다. 잠수해 물길을 타고 들어가 좁은 수로를 타고 올라는 과감한 작전을 성공시켰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을 차지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작전입니다.
다시 찾아온 이름, 만군의 주님
사무엘 역사가는 이 사건을 두고 매우 의미심장한 평가를 남깁니다. 사무엘하 5장 10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함께 읽겠습니다.
10 만군의 주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다윗이 점점 강대해졌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점점 강대해졌습니다. 이 구절만 떼어 보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권력과 재력을 갖춘 든든한 아버지 덕분에 탄탄대로를 걷는 자녀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여기에 다시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만군의 주 하나님”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다윗이 지난날 골리앗과 맞서 싸울 때 고백한 그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양 떼와 밤을 새며 수많은 별을 올려다보던, 어린 다윗의 심장 깊은 곳에 새겨진 하나님. 그리하여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대결을 하며 골리앗을 향해 외쳤던 바로 그 이름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다윗의 소년 시절은 물론이고 어느새 왕이 되어 막중한 부담감에 짓눌리던 순간에도 변함없이 함께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만군의 주님’이라는 어찌 보면 흔하고 뻔한 표현이 사무엘서에 처음 등장합니다.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구약 전체 흐름에서 보면 전에 없었던, 새로운 표현입니다. 사무엘서의 중심인물인 다윗을 통해 드러난 주님의 고유한 성품을 가장 잘 드러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즉, 다윗이 경험했던 철저한 외로움에 함께 하시고 참된 권능을 이루신, 온 우주를 가득 채운 하나님의 손길을 드러내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점점 강대해졌다는 의미를 더욱 정확히 깨닫게 됩니다. 다른 나라 왕들처럼 많은 군사를 모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크고 화려한 왕궁을 짓고 거대한 권위로 백성을 짓누른 것도 아닙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목자로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세상이 속삭이는 헛된 규칙을 밀어내고 어리석은 비교를 물리치는 결단입니다. 섬기고 비우며 비로소 얻는 진정한 강함입니다.
만군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러므로 만군의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관련해서 요한계시록 19장 11절에 나오는 흰 말을 탄 존재를 주목해야 합니다. 참고로 요한계시록 6장 2절에 나오는 ‘흰 말 탄 사람’은 겉모습만 비슷할 뿐 전혀 다릅니다. 19장 11절에 나오는 그를 가리켜 16절에 이렇게 외칩니다.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이분은 다름 아닌 다윗이 고백했던 만군의 주님입니다. 그분의 옷차림을 주목해야 합니다. 13절을 화면 보시면서 새한글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13 그분은 피로 물든 겉옷을 둘러 입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렸습니다.
주님을 피로 물든 겉옷을 둘러 입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악과 싸우기 전입니다. 옷을 적신 그 피는 적군의 피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피일까요? 당신 자신의 피입니다. 온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입니다. 그 피로 옷이 물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뜨겁게 확인합니다. 예수님께서 곧 만군의 주님이십니다. 그 옛날 다윗과 함께 하시어 어떤 고난에도 함께 하시어 마침내 목자로 세우셨습니다. 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관련해서 요한계시록의 배경을 유념해야 합니다. 당시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시민들에게 자신을 “우리의 주와 하나님(Dominus et Deus)”이라 부르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명령을 거부하여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온갖 박해를 겪었습니다. 가족과 이웃 뿐만 아니라 제국 전체의 따돌림 속에 철저히 고립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 단호하면서도 눈물 겨운 복음을 거듭 들려주셨습니다. 화려한 왕관을 머리에 쓴 황제가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온 우주 가운데 가장 처참한 고독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소외당하고 외로움에 울부짖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시어 온 우주의 사령관이 이끄는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만군의 주님이심을 진심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엘라 골짜기에서 골리앗과 마주 서서 벌벌 떨고 있는, 난공불락의 예루살렘 성 아래에서 좌절하는 모든 순간에 함께 하십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싸우십니다. 인생의 가장 외로운 순간에 가장 친밀한 사귐과 연합을 이루십니다. 휘어잡고 조종하는 게 아니라 선함과 인자함으로 참된 다스림을 펼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혼자입니다. 가족도 친구도 대신 할 수 없는, 결국 홀로 오롯이 짊어져야 할 절망의 순간이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질병으로, 끝내 좌절한 꿈으로, 도무지 해결할 길 없는 경제적 문제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릴 때가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나만 덩그러니 남아 고통만이 나를 에워싸는 것 같은 상황이 몰아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만군의 주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 밝게 빛나듯, 고독의 침묵이 적막하면 적막할수록 은혜는 더욱 찬란하게 앞길을 비춥니다. 따라서 다윗의 일생에 함께 하신, 만군의 주님이 베푸시는 사랑을 마음에 품으시길 바랍니다. 온 우주를 가득 채운 권능을 붙잡고 저마다의 골리앗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야훼 츠바오트, 만군의 주 하나님
주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과 맞서는 용기를 주셨고, 고단한 도망자 신세를 이겨내게 하시며, 담대하게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하신 은혜를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온 우주를 아우르는 만군을 지휘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또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저희 일생을 신실하게 이끄시고 돌보심을 고백합니다. 삶의 골짜기마다 만군의 주님을 붙잡고 일어서게 하옵소서. 날마다 주님의 임재 안에 머물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 이루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가장 외로운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시어 온 세상을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