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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7장 8~16절 "야훼 닛시, 승리하시는 주님"

2026-08-02
정대진 목사

2026년 8월 2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출애굽기 17장 8~16절 "야훼 닛시, 승리하시는 주님" 


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1)닛시라 하고

16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승리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님들과 풍성히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닛시’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승리’입니다. 물론 틀린 건 아닙니다. 이날 하나님은 분명 승리하셨고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이 주님의 승리를 소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승리라는 결론으로 성급하게 향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깊은 의미를 본문 말씀을 통해 차근히 묵상해야 합니다.


그 전투는 출애굽 직후 펼쳐진 상황 중 일부입니다. 수백 년에 걸친 노예 생활이 끝났습니다. 거대한 이집트 제국이 열 가지 재앙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습니다. 파라오의 정예 부대가 홍해에 빠져 몰살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현장 한 복판에서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마냥 달콤하지 않았습니다. 감동은 짧고 현실은 힘겨웠습니다. 꿈같은 순간이 계속 펼쳐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은 마라의 쓴물(출 15:22~27)과 굶주림(16장), 목마름(17:1~7)을 겪었습니다.


이제 고난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전쟁입니다. 그전에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앞서 이집트 군대를 마주하기는 했지만 칼을 꺼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심한 배고픔과 타는 갈증을 겪었지만 아슬아슬하게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사실 충분히 예상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길을 나설 때 이집트 사람들에게 상당히 많은 귀금속과 옷을 받았습니다(출 12:35-36). 그 소식은 주변 나라들에 금세 퍼졌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고된 여정에 지친 순간을 노렸습니다. 그 때를 기다려 노략질 하려 했습니다. 특히나 척박한 시내 광야에 살던 민족에게는 한 몫 단단히 챙길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이스라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언제 닥쳐올지 모를 적의 공격을 대비해 긴장하며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훈련은 훈련일 뿐입니다. 전쟁은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야만적인 순간입니다.


르비딤을 지날 때였습니다. 저 멀리서 먼지구름이 사납게 떠오릅니다. 말발굽 소리가 거센 함성과 함께 기괴한 불협화음을 일으킵니다. 섬뜩한 진동이 발끝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집니다. 아말렉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단순한 적군이 아닙니다. 특별히 그들의 공격 방식을 주목해야 합니다. 신명기 25장 17~18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7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아말렉은 광야 여정에 지쳐서 가장 뒤로 처진 사람들, 노인과 병자와 아이들을 일부러 공격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주변 다른 나라들과 확연히 다른, 아말렉의 사악한 속성입니다. 가장 약한 곳을 향해 달려드는 비열함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집트 제국의 정점에 있는 ‘파라오’와 비슷합니다. 아말렉의 기습 공격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악의 끔찍한 특성을 확연히 보여줍니다.


우리 주변에도 야비한 아말렉을 쉽게 발견합니다. 대형병원에서 직급을 낮은 간호사를 괴롭히는 것을 두고 은어로 ‘태움’이라는 부릅니다. 최근까지도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관련한 글을 얼마 전 우연히 인터넷에서 보았습니다. 어느 신입 간호사의 이야기입니다. 입사한 첫날 부모님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별 생각없이 아버지가 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 얘길 들은 수간호사가 다른 간호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얘 소녀가장인가보다. 맘대로 태워 안 나갈거 같아” 그 간호사는 그 후 3년간 태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중병에 걸린 힘겨운 상황을 공감하고 위로하는 게 아니라 정반대입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을 악용해 더욱 괴롭혔습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으십니까? 사실 모양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사람이 겪는 일입니다. 신체 기능이나 정서적인 결핍 혹은 사회적인 결함 등 조금이라도 약점으로 보인다면 집요하게 파고들고 이용하려는 게 인간의 악한 본성입니다. 그런 까닭에 몹시 잔인한, 이 시대의 아말렉 군대의 공격을 당하고는 합니다.



이스라엘은 행렬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때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달려드는 아말렉을 보며 심장이 요동칩니다. 실전은 처음입니다.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훈련한 대로 몸을 움직일 자신이 없습니다. 그 순간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구보다 막중한 책임을 떠안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그는 냉철하게 판단을 내리고 역할을 분담합니다. 9절 함께 읽겠습니다.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군사 지휘를 위임합니다. 그 대신 자신은 산 꼭대기로 향합니다. 이때 그의 손에 든 지팡이를 가리켜 성경은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지 그가 지나온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선명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집트 최상류층이었던 모세가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이집트인들이 혐오하는 목축 일을 40년이나 했습니다. 그가 목자로서 짚고 다닌 지팡이는 세속적인 처참한 몰락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초라한 지팡이를 권능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일에 그 지팡이를 사용하셨습니다. 


모세가 바로 그 지팡이를 들고 산꼭대기로 오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라는 별칭이 이집트를 떠나 처음으로 다시 불립니다. 모세는 막중한 부담감을 느꼈을 겁니다. 자신을 따라 광야로 나온 백성이 아말렉 군대와 일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함성과 비명이 뒤섞이고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모세는 그 모든 혼돈을 헤치고 비참한 현실을 넘어 지팡이를 치켜들었습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승기를 잡기 시작합니다. 아말렉 군대를 강력하게 제압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지팡이를 계속 들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곧 피로를 느꼈습니다. 두 팔이 부들거렸습니다. 차츰 팔이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기세도 조금씩 꺾였습니다.


동행했던 아론과 훌이 이 상황을 목격했습니다. 두 사람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금세 깨달았습니다. 우선 큰 돌을 가져와 모세가 그 위에 편히 앉게 했습니다. 양쪽에서 모세의 팔을 각각 하나씩 붙잡아 올렸습니다. 덕분에 모세는 해가 질 때까지 양팔을 치켜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드높이 계속 올렸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군대가 승리했습니다.



이 사건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크게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우선 첫 번째로 이날 모세의 행동을 주술적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오랫동안 손 들고 기도하는 게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효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무척 위험한 오해입니다. 두 번째로 모세의 손에 들린 지팡이를 마법 도구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지팡이 자체에 신비로운 능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 지팡이를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모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두 팔을 높이 치켜들었을까요? 관련해서 이스라엘이 불과 얼마 전까지, 무려 400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몇 대에 걸친 기나긴 시간을 통해 그들 뼛속까지 이집트의 문화가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중에는 이집트 창조 신화가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단군 신화처럼, 그들의 생각 가장 깊은 바닥에 깔린 이야기입니다.






지금 보시는 사진은 이집트 헬리오폴리스 창조 신화를 묘사한 파피루스입니다. 다음은 좀 더 보기 편하게 AI로 수정한 그림입니다. 신화에 따르면 하늘의 여신 누트(Nut)와 땅의 신 게브(Geb)가 등장합니다. 각각 몸을 아래로 하고 엎드려있는 여인과 누워서 땅을 바라보는 남자로 표현되었습니다. 둘은 본래 빈틈없이 붙어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었기에 세상에는 어떤 생명체도 살아갈 공간이 없는 혼돈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기의 신 ‘슈(Shu)’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림 가장 중앙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그가 두 팔을 번쩍 뻗어 하늘을 밀어 올렸습니다. 공기의 신이 그 자세를 유지하는 동안 창조의 공간, 즉 생명이 숨 쉬는 질서가 유지됩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슈가 지쳐 팔을 내리면 세상은 혼돈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다시 부딪혀 모든 생명이 깔려 죽임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재앙을 막기 위해 두 명의 보조 신이 등장합니다. 지금 화면에 보시듯이, 슈의 지친 팔을 양 옆에서 받쳐주고 있습니다. 이런 장면이 이집트의 여러 벽화에 흔하게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이집트 창조 신화에 너무나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아말렉과 싸우는 르비딤 산 꼭대기에서 벌어진 어떤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두 팔을 높이 뻗고 있는 모세 양옆에서 아론과 훌을 팔을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방금 확인했듯이, 양 팔을 들고 있는 공기의 신 ‘슈’와 너무나 똑같습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는 분명 그러합니다. 그런데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모세와 아론과 훌은 이집트의 신들을 흉내 내고 따라 하는 게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이집트 공기의 신 자리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쥔 모세가 있습니다. 양옆에는 보조 신이 아니라 출애굽의 중요한 역할을 했고, 훗날 주님이 대제사장으로 기름 부으실 아론과 그의 동역자 훌이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의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전쟁에 휘말려 공포에 질린 이스라엘 영혼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거짓을 부수었습니다. 그 자리에 확고한 진리를 심어주셨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존재는 이집트의 우상이 아닙니다. 오직 야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이 아말렉의 공격으로 지치고 상한 백성을 지켜 돌보십니다. 주님만이 그 모든 죽음에서 그들을 일으켜 구하십니다. 참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쌓은 화려한 이집트 제국과 거리가 멉니다. 그 대신 모세처럼 간절히 기도하고, 여호수아처럼 땀 흘리고, 아론과 훌처럼 힘을 합하는 백성의 하나 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 드디어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이 때 모세의 행동을 주목해야 합니다. 15절 함께 읽겠습니다. 


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모세는 아말렉과 싸워 감격스러운 승리를 거둔 후 제단을 쌓고 예배했습니다. 그런 다음 ‘여호와 닛시’, 즉, ‘야훼 닛시’라는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기서 ‘닛시’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이날 모세는 하나님을 향해 ‘주님은 나의 깃발’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조금 뜬금없습니다. 지금까지 본문 어디에도 깃발이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나의 지팡이’라고 고백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때 이스라엘 군대에게 깃발은 친숙한 대상이었습니다. 그 당시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마구잡이로 싸우던 원시 시대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현대처럼 고도로 발달된 통신 장비는 없었습니다. 대신 사전에 훈련한 대로 나팔 소리와 함께 깃발을 높이 흔들었습니다. 깃발의 모양과 색깔에 따라 군대가 민첩하게 움직였습니다. 병사들이 결정적인 순간마다 응시해야 할 대상이 바로 깃발입니다. 그 깃발에 자기 목숨이 걸려 있습니다. 또한 깃발을 통해 마침내 살아남아 승리했음을 확인합니다.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화면에 보시듯이, 옛날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신’을 뜻하는 단어 ‘네체르’(Netjer)는 다름 아닌 장대 위에 걸려있는 깃발 모양입니다. 백성에게 승리를 주신 주님을 가리켜 ‘나의 깃발’로 부른 절묘한 의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신전 앞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보며 자기들 신의 존재를 생생히 느꼈습니다. 거기서 오랜 세월 노예살이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 깊은 곳에도 ‘깃발은 곧 신’이라는 공식이 자리 잡았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나의 깃발이다.” 선언은 단순히 하나님이 이스라엘 군대의 깃발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집트의 수많은 가짜 깃발을 찢어버리는 함성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시라고 외치는 위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정직히 물어야 합니다. 내가 우러러보는 깃발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 시대의 화려한 신전을 장식하는 풍요와 성공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참된 승리입니까? 참혹한 삶의 현실 한복판에서 헛된 탐욕에 나부끼는 우상의 깃발에 눈길을 뺏기면 안 됩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 펼치시는 진리의 깃발만을 우러러보며 눈길을 고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진리는 이어지는 16절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6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모세는 감격스러운 전투를 치른 그곳에서 왜 ‘야훼 닛시’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개역개정 성경이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이라고 번역한 구약 원문이 모호합니다. 곧바로 옮기면 ‘주님의 보좌를 향해 손을 들었으니’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날 산꼭대기에서 모세가 한 행동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보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가운데 자음 하나를 바꾸면 발음은 그대로지만 ‘군기’(軍旗)를 뜻하게 됩니다. 즉 ‘주님의 깃발을 향해 손을 들었으니’라고 번역할 여지도 있습니다. 사실 둘 다 같은 의미입니다. ‘보좌’와 ‘깃발’ 모두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킵니다. 주님은 보좌 위에 계시며 깃발처럼 당신의 자녀들이 나아갈 길을 알려주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십니다. 단순한 ‘아말렉’이라는 특정 민족을 향한 저주가 아닙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아말렉의 본질적 속성은 약자를 향한 비열한 공격입니다. 지치고 병들어 뒤처진 자들의 짓밟는 잔혹함입니다. 그런 아말렉과 하나님은 영원히 싸우십니다. 힘 있는 사람이 힘 없는 사람을,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을 짓밟는 흉악한 짓을 단호히 심판하십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당신과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싸우십니다. 주변을 둘러싼 아말렉을 무찌르십니다. 나의 가장 약하고 아픈 곳을 찌르는 그 모든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십니다.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나의 깃발이신 주님께서 진정 함께 하시기에 약점은 더 이상 약점이 아닙니다. 그 모든 한계와 결핍은 결코 나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바로 그곳에 참된 승리를 이루시는 야훼 닛시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시어 회복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은 성급하게 승리를 먼저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전투를 치르지 않고 신비한 이적으로 적을 물리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보좌와 깃발은 승리로 연결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욕망하는 ‘승리’라는 결론을 곧바로 앞세우지 않습니다. 대신에 주님은 적과 맞부딪혀 치열하게 싸우는 현실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숱한 패배를 경험합니다. 심지어 악인들이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야훼 닛시’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위대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승리가 진정한 승리가 아님을 일깨웁니다. 사람들이 판단하는 패배가 참된 패배와 다름을 깨우쳐줍니다.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지금 당장은 패배자로 굴욕을 겪으며 고통에 몸서리칠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깃발을 온전히 바라본다면, 마침내 온전한 승리를 거둔다는 복음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진정 바라보아야 할 깃발입니다. 십자가는 로마 제국이 반란범을 매달았던 사형틀입니다. 게다가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판단했습니다(신 21:23). 한마디로 십자가는 철저한 패배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누가 봐도 비참한 패배자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십자가의 의미를 정반대로 뒤집었습니다. 승리와 패배의 기준을 완전히 새롭게 제시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처참하게 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참으로 이기셨습니다. 사람들을 짓밟고 오르지 않으셨습니다. 큰 소리치며 윽박지르지도, 자기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으셨습니다. 묵묵히 죽음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을 살리는, 가장 위대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완성하셨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눈부시게 보여주는 장면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 즉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분의 오른손에는 역사 계획이 담긴 두루마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펴서 볼 사람이 없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펼쳐 드러낼 이가 없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그 시대의 아말렉인 로마의 핍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거듭되는 삶의 패배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두루마리를 펼칠 분이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절망적인 소식입니다. 그런 까닭에 요한은 슬피 울었습니다. 그러자 보좌 곁에 있던 장로 중 한 사람이 요한을 위로합니다. 그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떼실 분이 있다고 알려줍니다. 


요한계시록 5장 5절을 화면 보시면서 새한글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5 그런데 원로들 가운데 한 분이 나에게 말합니다. “울지 마세요. 보세요, 유다 지파 출신의 사자이며 다윗에게 뿌리를 두신 분이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그 두루마리 책을 펼치고 그것의 일곱 개 봉인을 열 수 있으십니다.” 


두루마리의 봉인을 뗄 적임자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유다 지파 출신의 사자이며 다윗에게 뿌리를 두신 분이 이기셨습니다.” 등장하는 단어들 모두 압도적인 승리를 선언합니다.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최대 규모와 영향력을 가진 지파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군주입니다. 게다가 ‘사자’라는 용맹한 동물로 그를 표현합니다. 결정적으로 그가 “이겼습니다.”라며 승리를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근육질 용사의 화려한 등장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6절 함께 읽겠습니다.


6 또 나는 보았습니다. 임금자리와 네 생명체 사이에, 원로들 가운데 어린양이 하나 서 있었습니다. 끔찍하게 죽임을 당한 것 같았는데, 뿔이 일곱 개이고 눈이 일곱 개였습니다. 그 일곱 개의 눈은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 온 땅으로 보내심을 받은 영들이지요.


요한은 기세등등한 거인이 아니라, ‘끔찍하게 죽임 당한 어린 양’을 보았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바로 다음 장인 6장 2절에 등장하는, 흰 말을 타고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는 적그리스도와 완전히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죽임 당하신 주님의 패배가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승리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알려줍니다. 이를 통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구원인지 깨우쳐줍니다. 


그러므로 야훼 닛시, 승리하시는 주님을 참으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위대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되었음을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 어떤 좌절의 상처를 품고 몸부림 칠지라도, 주님과 동행하는 것 자체가 진정 승리라는 진리를 품으시길 바랍니다. ‘끔찍하게 죽임 당한 것’ 같을 때, 승리의 빛 한 줌도 들어오지 않은 그 처참한 패배에 순간이야말로 유다 지파의 사자이며 진정한 다윗인 주님의 승리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야훼 닛시’ 하나님께서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와 신실하게 함께하십니다. 때때로 패배의 쓴잔을 마시는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고된 전투에 지쳐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고개를 들어 주님의 깃발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올곧게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따라 참된 승리 거두며 나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야훼 닛시’, 나의 깃발이신 주 하나님.

주님의 자녀라고 해서 광야를 비껴갈 수 없습니다. 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패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현실이 쓰라리고 비참하고 아픕니다. 하지만 그 모든 치열한 전쟁터에서 주님이 함께하심을 고백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결과와 무관하게 저희를 이미 진정한 승리의 길로 이끄셨음을 믿습니다.

그 믿음을 따라 행군하게 하옵소서. 아말렉에게 가장 먼저 공격당한 연약한 이들을 보듬고,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을 품게 하여 주옵소서. 어리석은 승리의 허상을 물리치고 진정한 승리를 이루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구원의 깃발을 펼쳐 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고 문헌

더햄, 존 I. 『출애굽기』. WBC 주석 3. 박문재 역. 서울: 솔로몬, 2001.

프레다임, 테렌스 E. 『출애굽기』. 현대성서주석 2. 정두영 역. 서울: 한국기독교서회, 2000.

Lee, Sanghwan. "Moses, the Lifter of the Sky: A Novel Reading of Exodus 17:8–16 in Light of the Heliopolitan Cosmogony."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47, no. 1 (2022): 56–81.

Peterson, Brian Neil. "The Egyptian Influence on Exodus 17:8–16." Bulletin for Biblical Research 31, no. 2 (2021): 135–153.

Robinson, Bernard P. "Israel and Amalek: The Context of Exodus 17:8-16."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32 (1985):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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