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5장 22~27절 “야훼 라파, 치료하시는 주님”
2026년 7월 26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출애굽기 15장 22~27절 “야훼 라파, 치료하시는 주님”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치료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님들과 풍성히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깨진 트로피
마침내 트로피를 움켜 쥐었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황금색 금속이 아닙니다. 도자기로 만든 값비싼 트로피입니다. 영롱한 빛깔을 자랑합니다. 그것을 손에 쥐려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많은 피와 땀을 흘렸습니다. 마침내 눈부신 승리를 얻었습니다. 힘찬 환호 소리와 함께 감격의 눈물이 솟구칩니다. 이대로 행복하게 끝을 맺을 것 같습니다. 찬란한 성취가 영영 계속될 것만 같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펼쳐진 이스라엘의 상황입니다. 이제 광야를 향해 길을 나섭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드디어 낯선 여정을 떠나 홍해를 건넜습니다. 성경이 기록한 가장 극적이고 화려한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거대한 이집트 제국이 몰락하는 걸 목격했습니다. 용맹하게 달려오던 이집트 정예 부대가 바닷속에 잠기는 걸 지켜보았습니다.
그 순간,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주님을 높여 찬양했습니다. 모세가 알려준 노래를 함께 부르며 용사이신 주님께 찬송을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리암과 여인들도 손에 소고를 들고 나와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높고 영화로우신 주님께서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신 사건을 노래했습니다. 위대한 구원 한복판에 있던 백성이 위대한 찬양을 드렸습니다.
이로써 ‘출애굽’이라는 이야기 단락을 마쳤습니다. 이제 ‘광야 여정’을 시작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2절에서 민수기 20장 27절에 해당합니다.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알려줍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은 이런 광야 여정의 서곡에 해당합니다. 시작부터 매우 숨 가쁜 리듬을 들려줍니다.
22~23절 함께 읽겠습니다.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숨 가쁘게 흐르고 흘러
한글 성경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구약 원문에는 각 동사 앞에 접속사가 붙어 있습니다. 억지로 직역하면 이런 느낌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인도했고, 그리고 광야로 들어갔고, 그리고 걸었고, 그리고 물을 얻지 못하고, 그리고 마라에 이르렀고, 그리고 마시지 못했다." 히브리어 문법 용어로 ‘와우연속법'(Waw-consecutive)’이라고 합니다. 동영상의 ‘빨리 감기’ 기능을 떠올려 보시면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쉴세 없이 빠르게 이어지는 사건 흐름을 강조하는 표현 방식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잠깐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미리암의 찬양에 담긴 기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금세 척박한 현실로 내몰렸습니다. 홍해를 건너자마자 곧바로 광야를 걸었습니다. 제대로 물을 마시지 못한 채 타는 갈증을 견디며 무려 사흘 길을, 즉 3일을 걸었습니다. 인간이 물 없이 최대한 버틸 수 있는 시간입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바닥나는 순간입니다. 더 이상 도무지 견뎌낼 힘이 없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겨우 샘물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마실 수 없는 ‘쓴 물’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의 감정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애쓰고 노력해서 이집트를 탈출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모세에 의해, 전적인 은혜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양쪽에 벽처럼 서 있는 바다 사이를 지나며 이스라엘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을 겁니다. 바람결에 실려 온, 소금기 머금은 물방울이 뺨을 톡톡 건드린 촉감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바닷물에 휩쓸려가는 이집트 군마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도는 것 같습니다.
그런 다음 메마른 광야로 내 던져졌습니다.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비록 노예로 살았으나 적어도 먹을 것은 풍족했습니다. 나일강의 풍성한 물을 마셨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덥고 거친 길을 떠돌며 노예만도 못한 비참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역한 냄새를 풍기며 목을 타고 들어가 뱃속을 뒤집어 놓은 쓴물이 절망을 부추깁니다.
저는 3년 전, 출애굽 여정을 따라 이집트, 요르단, 이스라엘을 둘러보는 매우 뜻깊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일정 중 이집트 북부에서 남부 시내산까지 종일 내려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무척 답답하고 지루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저는 에어컨이 잘 나오는 대형 버스 안에 있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광야가 머금은 자연의 야성에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인생의 예리한 단면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트로피가 사정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모든 게 돌변했습니다. 날카로운 조각에 찔린 발이 피로 흥건해집니다. 이전보다 더 비참한 시련이 펼쳐집니다. 영광의 정점에서 맞닥뜨린 절망입니다. 애초에 트로피를 거머쥐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지 모릅니다. 사정없이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는 아찔한 추락 때문에 더 괴롭고 아픕니다.
자연스럽게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단순히 괴로움을 호소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의심하는 태도입니다. 불과 사흘 전에 홍해를 가르시고 이집트의 말과 전차를 바다에 던지신 하나님의 구원을 부정하는 자세입니다.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분께서 이 갈증도 해결해 주실 거라는 기대가 전혀 없습니다. 여기서 목말라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에 사로 잡혔습니다. 불과 며칠 전의 은혜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 대신 원망이 쏟아집니다. 이런 그들을 과연 누가 함부로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거대한 구원을 경험했다 해도, 당장 내 목을 태우는 갈증 앞에서 금세 믿음이 사라지는게 철저히 무력한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살아오며 모든 걸 계획대로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거침없이 흐르는 인생 물결에 휩쓸려 지금 이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합니다. 위대한 사랑에 감격하여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그렇지만 광야는 여전히 광야입니다. 아무리 전날 밤 배불리 진수성찬을 먹어도 하루 만에 주린 배를 움켜쥐는 게 연약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홍해는 목을 축여주지 못합니다. 찬양이 목마름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저마다의 광야 여정을 시작하며 뜨거운 신앙과 냉혹한 현실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때로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을 생생하게 깨닫고 고백합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 화려한 성과를 이루고 자랑스럽게 간증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기에 세상 그 무엇도 두려울 게 없을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생생한 증표를 마치 도자기 트로피처럼 손에 들고 우쭐해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금세 쓰라린 고통이 덮쳐 옵니다. 트로피는 사정없이 깨집니다. 소름 끼치는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 납니다. 그게 삶의 현실입니다. 직장에서 마주한 상사의 폭언,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서 걸려온 전화, 차디찬 언어로 적힌 진단서, 그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타는 목마름으로 휘청거리며 지나는 마라입니다. 대체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혼란스러워합니다. 불과 조금 전에 경험한 하나님의 굳센 손길을 의심스러워 합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에 혼미한 정신을 붙잡고 애타게 물을 찾습니다.
가리켜 가리치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과 우리를 향해 어떻게 하실까요? 25절 함께 읽겠습니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가르치다, 참조 토라)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참조, 토라)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스라엘이 마라에서 경험하는 고통을 한 단어로 정리합니다. 바로 ‘시험’입니다. 언뜻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는 냉혹한 평가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마치 항공기 날개가 얼마나 하늘 위에서 튼튼하게 버티는지를 확인하는 압력 테스트와 같습니다. 광야에서 생존할 능력을 몸소 체득하게 만드는 훈련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탈락시키려 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영영 버리지 않으십니다. 앞으로 사십 년 광야를 이겨낼 영적 내구성을, 이 마라에서 튼튼하게 단련시키셨습니다.
백성의 거센 원성을 들은 지도자 모세는 주님께 해결책을 구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한 나무를 가리켜 보여주셨습니다. 모세는 말씀에 순종해 그 나뭇가지를 물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독성이 사라지고 마실 수 있는 물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고통을 물리친 놀라운 이적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가리키다’입니다. 한글 맞춤법에서 흔히 헷갈리는 동사가 ‘가리키다’와 ‘가르치다’입니다. 둘은 발음은 비슷하지만 뜻은 다릅니다. ‘가리키다’는 어떤 대상을 표시하는 행동입니다. ‘가르치다’는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가리키다’는 뜻의 히브리어 〈야라〉(יָרָה)는 ‘가르치다’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25절에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를 “한 나무를 가르치시니”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구약의 중심인 모세오경을 가리켜 히브리어로 〈토라〉(תּוֹרָה)라고 부릅니다. 이 토라는 방금 언급한 ‘가르침’이라는 뜻의 〈야라〉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알려주시는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토라를 부르는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25절에 나오는 “법도와 율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어떤 나무를 가리키고 가르치신 것은 단순히 쓴물을 고치시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그 나무 자체에 신기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백성이 불평하는, 눈앞에 있는 원인을 고치시려는 뜻도 아닙니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라는 교훈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얼마든지 바위에서 생수가 솟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게 백성을 복종하게 하는데 훨씬 유리합니다. 그럼에도 왜 굳이 평범한 나뭇가지를 가리켜 무엇을 가르치려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이 척박한 삶 깊숙이 들어와 무너진 일상을 회복시키십니다.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소중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광대하십니다. 하지만 바위를 쪼개고 하늘을 가르는 초자연적 방식으로만 일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광야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던 나뭇가지 하나를 일부러 사용하십니다. 그 가지로 쓴물을 달게 하셨습니다.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기 원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진리의 말씀이 지금 우리의 가장 고단하고 고단한 일상 한복판으로 들어와 변화를 이룹니다. 우리가 날마다 성경을 가까이하고 그 안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참된 치료
관련해서 26절을 눈여겨 봐야 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5절의 “법도와 율례”처럼, 하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단어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바로 ‘의와 계명과 규례’입니다. 이러한 어휘 사용은 본문의 의도와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주님은 목마름에 신음하던 백성에게 당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순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사실 의아합니다. 백성의 고통에 무심한 것 같습니다. 마치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아온 아이에게 책을 쥐어주는 어른 같습니다. 너무나 엉뚱하고 무심해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곧바로 생명의 복음을 들려주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지킨 백성에게 이루실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집트 사람이 앓았던 질병을 내리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당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바로 ‘치료하는 여호와’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야훼 라파’, ‘치료하시는 주님’입니다. 저마다의 라파를 지날 때 굳게 붙잡아야 할 위대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렇듯 주님께서 당신의 인격과 존재를 걸고 자녀들을 향해 ‘치료’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큰 위로를 안겨줍니다. 특히나 심각한 병으로 신음하고 있거나 그런 가족을 곁에 두었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특별히 우리교회는 여러 질환으로 어려움을 겪으신 분이 많으십니다. 치료하시는 주님의 약속과 권능을 의지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회복을 위해 함께 기도합니다. 실제로 기도의 능력을 통해 병 고침이 일어나는 걸 목격하고는 합니다. 결코 부정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온교회가 함께 사모해야 할 아름다운 은사와 이적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명확히 당신 자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말씀하신, 성경 본문의 맥락과 의도를 차근히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병든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고작 쓴 물을 만난 것에 불과합니다. 기껏해야 구역질하고 배탈이 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는 ‘질병’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답을 찾기 위해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건강이란 무엇일까요? 단지 체력이 좋고 몸이 튼튼한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진정한 건강이란 당신과 온전히 맺은 언약 관계입니다. 질병은 정반대입니다. 몸은 이집트를 떠나 있지만 여전히 마음은 그곳에 풍요에 목말라하는 상태입니다. 주님의 다스림과 구원을 부정하고 원망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아무런 통증 없이 가뿐하게 몸을 움직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며 불평과 절망으로 살아간다면, 그는 심각하게 병든 사람입니다. 반대로 아픈 몸을 병원 침대에 기대 누워 신음한다 할지라도 복음을 붙잡고 주님의 뜻을 잠잠히 헤아린다면, 그는 진정 치료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굳게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진정 치료하십니다. 몸과 마음의 가장 깊은 목마름을 채워 주십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인생의 광야 여정을 무사히 지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만이 인생의 그 어떤 마라의 쓴물도 견뎌내게 하는 희망을 안겨줍니다.
마라를 지나 엘림으로
그 결과를 확인하겠습니다. 27절 함께 읽겠습니다.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이스라엘은 마라를 지나 엘림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12와 70은 완전함과 풍성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모두가 쉬고도 넉넉하게 남을 안식이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준비하신 완전히 공급이 있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거듭 명심해야 할 진리입니다. 마라는 결코 이스라엘의 종착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목마른 사흘 길을 거쳐 마라에서 쓴물을 마시게 하신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엘림의 샘물로 먹이십니다. 마라를 거쳐야 비로소 마실 수 있는 생수로 그들을 살리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13~14절을 새번역성경으로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지금 예수님과 대화하는 사마리아 여인은 남자들에게 끊임없이 버림 받았습니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했습니다. 뜨거운 한낮에 물을 길으러 오는 처지가 그녀의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마라의 쓴물을 마시는 인생입니다. 온통 상처와 고통으로 가득합니다. 주님은 그녀를 포함해 영혼 깊은 목마름으로 몸부림치는 모든 사람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은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생생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마라의 쓴 물에 던져졌던 나뭇가지는 훗날 골고다에 세워진 십자가를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악의 쓴물 속으로 몸소 당신 자신을 던지셨습니다. 죽음의 쓴 잔을 대신 마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온 세상을 치유하고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골고다의 암흑과 절규는 참 생명과 희망을 안겨주는 영광의 통로입니다. 마치 마라를 거쳐야 엘림에 도착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쓴 물을 마셔야 주님이 흘려보내 주시는 생명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무너지고 깨지는 순간이야말로 치유하시는 하나님께 안기는 진정한 은혜의 시간입니다.
깨진 바로 그 자리에

지금 화면에 보시는 사진은 일본 전통 공예 기법인 "킨츠기"(金継ぎ)입니다. 시작은 깨진 도자기를 수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발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부서진 자리에 금가루로 장식했습니다. 깨지기 전보다 오히려 더 가치가 올랐습니다. 귀한 손님이 올 때 일부러 킨츠기로, 본래 부서졌으나 더욱 아름답게 회복된 그릇에 음식을 담아 정성을 표시했습니다. 망가지고 쓸모없는 물건이 아니라 장인의 손을 거친 걸작품으로 완전히 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말씀 드렸습니다. 때로 우리는 도자기로 만든 트로피를 깨뜨리곤 합니다. 정확하게는 나 자신이 그렇게 산산조각 나는 끔찍한 아픔을 경험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직접적으로 질병일 수 있습니다. 혹은 경제적인 위기이거나 가족 안에 찾아온 심각한 갈등이기도 합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이 이대로 모든 게 영영 끝난 것만 같습니다.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거듭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단지 힘든 상황을 좀 더 견딜만하게 도우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를 어느 정도 치워준다는 뜻도 아닙니다. 혹은 내 삶에 전혀 괴로움이 없도록 무균실에 넣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날마다 총천연색으로 화사한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이끄십니다. 어떤 모래 바람이 덮칠지 모릅니다. 어떻게 길을 잃고 헤맬지 모릅니다. 상처는 인간의 숙명입니다. 살아가기에 누구나 다치고 베이고 쓴물을 들이킵니다. 하지만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물을 통해 엘림의 샘물을 먹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흠집을 당신의 영광으로 채우십니다. 겉잡을 수 없는 균열을 생명으로 메우십니다. 철저히 부서지고 아파했기에 비로소 다다를 수 있는 은혜로 말미암아 당신의 작품으로 빚어 가십니다.
혹시 지금, 마라를 지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삼일을 걸어도 시원한 물 한 모금 없는 것 같은 막막함 속에 계십니까? 거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의 틈새로 금이 흘러드는 하나님의 킨츠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마라를 지나 엘림이 있습니다. 쓴물을 마셔야 생수의 소중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전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을 붙잡고 담대하게 걸음을 내딛으시길 바랍니다. 광야를 지나는 백성에게 마라를 거쳐 엘림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로 목을 축이고 그늘에 쉬게 하시는 그 주님은 우리의 치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치료하시는 주 하나님
하루하루, 저마다의 광야 길을 지나는 자녀들을 돌보아 주시옵소서. 마라의 쓴물에 괴로워하고 원망하는 저희의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스스로 ‘너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라고 선언하시는 주님 마음을 헤아리기 원합니다. 날마다 생명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지켜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깨진 우리를 금으로 이어 붙이시는 주님의 킨츠기를 경험하게 하시고, 마라를 지나 엘림의 안식에 이르는 참된 치유를 누리고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이 몸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진정한 치유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