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 모드

목록으로

신명기 6장 1~9절 “야훼 엘로헤누, 주 우리 하나님”

2026-07-19
정대진 목사

2026년 7월 19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신명기 6장 1~9절 “야훼 엘로헤누, 주 우리 하나님”


주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님들과 풍성히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어둠 속으로 홀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우주 비행사의 모습을 종종 보셨을 겁니다. 자신을 줄로 연결해 우주선 밖으로 나와 필요한 일들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1984년 2월 7일 놀라운 사건이 발어졌습니다. 브루스 맥캔들리스 2세가 질소 가스를 내뿜는 장치에 올라타고 챌린저호 밖으로 나왔습니다. 화면에 나오는 바로 이 장면입니다. 매우 유명한 사진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우주 자유 유영’입니다. 아무것에도 묶이지 않고 1시간 22분 동안 홀로 움직였습니다. 챌린저호에서 무려 98m까지 멀리 나아갔습니다. 




다음 사진을 보면 더 실감 나실 겁니다. 까마득하게 점처럼 보입니다. 느낌이 어떠십니까? 상상만 해도 정말 무섭지 않으십니까? 내가 올라탄 가스 분사 장치의 작은 부품 하나라도 고장 나면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거대하고 어둡고 추운 우주를 떠돌아 다녀야 합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공포와 고독입니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들리실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나 자신이 고장 난 인공 위성처럼 느끼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돌연히 찾아옵니다. 끝없는 암흑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만 같습니다. 질병으로 신음 할 때, 고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너무나 멀게만 보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딸의 앞길이 도무지 열리지 않을 때, 주님의 눈길은 우리와 전혀 무관해 보입니다. 그 외에도 마치 우주 한복판에 홀로 툭 내던진 것만 같은 고통스런 상황이 찾아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득히 먼 상상 속의 존재로 보입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생의 선명한 단면입니다.



그 옛날 지나던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그들은 40년 광야 여정의 종착점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마침내 그토록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힘차게 흐르는 강물 소리가 반갑게 들립니다. 저 멀리 지중해에서 불어와 뺨을 간질이는 바람이 그들을 맞이하며 손짓합니다. 이스라엘은 흥분하며 세차게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육중한 삶의 현실이 그들 가슴을 짓누릅니다. 거대한 물음표가 그들 머리 위에 그림자를 어둡게 드리웁니다. ‘과연 가나안에서 마음 편히 두 발을 딛고 살 수 있을까?’ 분명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곳입니다. 그렇지만 천국은 아닙니다. 엄연히 사람 사는 땅입니다. 수많은 갈등과 문제가 눈 앞에 잔뜩 놓여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은 광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유목문화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이제 가나안에 건너가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농경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낯선 나라로 이민을 떠나 새로운 직업을 가지고 힘겹게 일하며 적응하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대부분 무척 고단한 삶을 살아갑니다. 끊임없는 소외를 겪으며 이방인으로서 차별을 겪기도 합니다. 하물며 이스라엘은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큰 고난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대 사회에서 생활과 종교는 결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옛 사람들은 특정 공간과 특정 직업을 관장하는 각각의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이집트와 광야에서는 그럭저럭 힘을 발휘하셨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새로 뿌리내릴 땅에도 과연 그 능력이 변함없을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농사에 필요한 비를 내려 준다고 약속하는, 어쩌면 가나안의 화려한 신들보다 주님께서 더 약할 지도 모릅니다.


보다 직접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가나안에 먼저 살고 있던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가만히 반겨줄 리가 없습니다. 곧 피 튀기는 전투를 앞두고 있습니다. 낯선 신들이 다스리는 그 땅에서 싸워 이겨 살아남을 자신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힘겹게 지나온 광야 여정이 이대로 허무한 결말로 막을 내릴지 모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거대한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채 요단강을 건너 낯선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마치 무엇에도 연결되지 못한 채 막막한 우주 공간으로 홀로 나서는 것과 비슷한 처지입니다. 확실히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에서 완전히 벗어나 깊은 어둠으로 뛰어드는 심정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막막한 절망 속을 하염없이 떠돌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먼저 건네신 이름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 모세는 이렇게 외칩니다. 1절 함께 읽겠습니다.


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신명기 6장은 이 책 전체의 핵심입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두려워 떠는 이스라엘을 향한 가장 중요한 위로와 격려가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열면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해 단순히 모세 입장에서 주님을 가리켜 “너희 하나님”으로 부른 게 아닙니다.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난 날, 직접 당신의 백성에게 알려준 이름입니다. 


출애굽기 20장 2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다음 구절인 3절부터 십계명이 시작합니다. 따라서 2절은 십계명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십계명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하나님의 자기소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어서 그 위대한 구원을 이룬 당신의 이름을 이렇게 알리십니다. 바로 ‘주 너의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 평범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풍성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원하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백성이 두려움에 벌벌 떨며 바짝 엎드려 무작정 따르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런 공포를 안겨주는 존재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너희 하나님’이 되시고자 이스라엘을 고난에서 건지신 구원자이십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과 친밀한 사귐을 이루시려 그들의 눈물에 응답하신 인도자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은 물론이고,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입니다.


그 후 4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스라엘은 마침내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그 놀라운 복음을 모세에게 다시 들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태어났습니다. 열 재앙과 홍해 이적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을 따라 광야를 지났습니다. 따라서 가나안의 그 어떤 우상이 아닌, 오직 야훼만이 변함없이 ‘너희 하나님’이라고,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해 외쳤습니다. 지난날 이미 그들을 구원하신 주님이, 앞으로도 계속 지켜 돌보실 시리라는 깊은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도 가나안의 여러 신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화려한 성공과 부와 명예로 유혹합니다. 헛된 탐욕을 따라 살아가라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모두 허상입니다. 반드시 무너질 우상입니다. 따라서 오직 주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 뜻을 따르고자 힘써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는 은혜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까요? 모세는 그 핵심을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4절 함께 읽겠습니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신명기 6장 4, 5절은 구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흔히 <쉐마>라는 명칭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4절 앞부분을 원문 어순대로 직역하면 “들으라 이스라엘!”입니다. 여기서 “들으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가 ‘쉐마’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해 “들으라!”라고 외치며, 그들이 귀 기울이게 합니다. 그런 다음 주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히브리어로 “야훼 엘로헤누”입니다. 곧바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야훼 우리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야훼’는 하나님의 생생한 인격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모세는 그 야훼께서 곧 ‘우리 하나님’이라고 외칩니다. 당신 자신을 “너희 하나님”으로 소개하신 주님을 향한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놀라운 구원을 받은 백성은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어쩌면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익숙한 고백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뻔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그러나 참 진리일수록 항상 낯설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온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십니다. 그런 주님을 가리켜 연약한 인간이 어찌 감히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 사실을 조금만 곱씹어 보면 너무나 놀랍고도 충격적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면 신성모독일 수 있습니다. 무모하고 위험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서 복음이 시작합니다. 본래 인간에게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놀라운 사랑으로 당신의 백성을 구하고 돌보시며 몸소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가 마주하는 그 어떤 모양의 가나안에서도 여전히 ‘우리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새로운 능력과 구원으로 함께 하십니다. 또 다른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항상 동행하십니다.


전부 쏟아붓는 사랑

그렇다면 오직 유일하신, “우리 주 하나님”을 향해 그분의 백성은 과연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5절 함께 읽겠습니다.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말씀은 바로 “하나님 사랑”입니다. 사실 너무나 익숙한 진리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말씀을 쉽게 오해하곤 합니다. 사랑을 또 다른 낡은 율법으로 변질시키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사랑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라”로 번역한 히브리어 동사는 <아하브>입니다. 신명기에서 무려 스물 세 번이나 나오는 단어입니다. 단순한 감정이나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고대 세계의 조약에 뿌리를 둔 사랑을 가리킵니다. 가령, 고대 서아시아의 강대국은 봉신 국가들과 조약을 체결할 때, 대왕을 ‘사랑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때의 ‘사랑’은 달콤한 감정이 아니라, 오직 한 주군에게만 바치는 전적인 충성과 헌신을 뜻했습니다.


예를 들면, 고대 앗시리아의 에살핫돈 왕위계승조약(기원전 672년)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너희는 앗수르바니팔을 너희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라.” 앗수르바니팔은 엣살핫손의 아들인 앗시리아의 왕입니다. 여기서 ‘사랑하라’는 명령은 다른 어떤 세력에도 눈을 돌리지 말고, 오직 황제에게만 목숨을 걸고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러지 않을 경우 잔혹한 응징을 할 것을 경고합니다. 신명기는 이러한 외교 언어를 대담하게 가져와 바꿔 사용합니다. 앗시리아 대왕의 자리에 야훼 하나님을 세웁니다. 정치적 충성의 언어가 신앙 고백의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매우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옛날 평범한 백성은 자기가 속한 신하 국가의 왕을 통해서만 대왕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명기는 그 틀을 완전히 깨뜨립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은 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야훼 앞에 섭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사랑의 명령이 온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유일하신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로 초대 받았습니다.


여기서 사랑의 방법으로 제시하는 마음과 뜻과 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마음(레바브)은 인간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이 모두 자리 잡은 내면의 중심입니다. 뜻(네페쉬)은 생명 그 자체, 숨 쉬는 존재 전체를 가리킵니다. 힘(메오드)은 가진 모든 자원과 역량입니다. 내 존재의 어느 한 구석도 남겨두지 않고 전부를 쏟아붓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세 가지로 대표되는 전 존재와 온 인격이 바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의 실체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전적인 사랑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연약하고 자격 없는 죄인에게 주님께서 ‘너희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가며 내뱉는 신음에 귀 기울이시고 그들을 구해 내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던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되돌려 보내셨습니다. 이 외에도 역사 속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 하시어 치열하게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 절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저주받은 모습으로 홀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너무나 끔찍하게 외롭고 고통스러운 희생으로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쏟아부어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이토록 ‘너희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생생히 전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에 담긴 눈부신 사랑을 마음에 품고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사랑은 모호한 감상에 취한 관념이 아닙니다. 의무적인 종교 행위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자랑하려는 율법주의는 더더욱 아닙니다. 주님을 향해 진심으로 ‘우리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사랑입니다. 


쉐마가 흐르는 삶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인용하시며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2장 29~31절 함께 읽겠습니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웃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두 계명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사랑이 진실하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흘러넘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눈 앞에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아하브>는 반드시 살아있는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증명됩니다.


오늘 읽은 신명기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제시합니다. 7~9절 함께 읽겠습니다.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명령하십니다. 신명기 6장 4, 5절에 기록된 쉐마 구절을 몸에 지니고 집 곳곳에 붙여 그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상당히 오묘합니다. 바로 앞에 있는 5절에서 하나님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자연스럽게 종교 행위를 요구할거라 추측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대신 가장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사랑법을 알려주십니다. 바로 자녀 신앙 교육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누군가의 참된 신앙은, 그의 하나님 사랑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보내는 지극히 평범한 순간에 실체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굳이 세세한 예를 들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밖에서는 존경 받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가정에서는 폭군으로 변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믿음 좋은 중직자로 인정받지만 직장에서는 폭언을 서슴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모두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죄악입니다.


성경은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하나님 사랑에 참으로 감격한다면 일상을 함께 하는, 나보다 어리고 약한 이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대상인 자녀들에게 더욱 진실한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잔소리 하고 다그치며 교회 생활을 강요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쉐마가 되어 가정 안에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그 온기로 말미암아 모든 삶 가운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이 가득히 울려 퍼지길 바랍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쉐마는 ‘나’의 고백에서 출발하지만, 결코 나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해 뻗어갑니다. 가정을 넘어 신앙 공동체 전체로 넓혀집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민족과 혈통을 초월합니다. 그렇다면 협소한 틀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온 세상을 품고 하나되어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 우리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온 우주에 충만한 우리 하나님

1969년 7월 20일,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를 모두 아실 겁니다. 거기에는 닐 암스트롱 뿐만 아니라 두 명이 함께 했습니다. 그중에 달 착륙선인 이글호의 조종사 버즈 올드린(Buzz Aldrin)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사히 달에 도착하고 우주선 안에서 작은 가방 하나를 꺼냈습니다. 자신이 장로로 섬기던 웹스터 장로교회 목사님이 손수 챙겨준 소형 성찬 키트였습니다. 그 안에는 작은 전병과 포도주, 그리고 한 장의 성경 말씀이 들어 있었습니다.


올드린은 훗날 자신의 책과 기고문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포도주를 작은 잔에 따랐습니다. 달의 중력은 지구의 6분의 1밖에 되지 않았기에, 포도주는 천천히, 우아하게 잔 벽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는 우주선 안에서 홀로 성찬을 나누며 요한복음 15장 5절을 읽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인류 최초의 달 탐사선에서 벌어진 놀라운 장면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달에 도착했습니다. 아무도 이루지 못한 일입니다. 지구에서 38만 킬로미터 떨어진 광활한 어둠 한복판이었습니다. 하지만 버즈 올드린은 그곳에서 마치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서로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생생히 경험했습니다.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어느 한 사람만의 특별한 체험이 아닙니다. 포도나무 가지처럼 예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을 향한 눈부신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 우리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곳이 광야든 우주든 상관 없습니다. 인생의 그 어떤 암흑과 고독도 주님의 신실한 손길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을 통해 진심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그 대신 주님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온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은 우리 하나님 이십니다. 억압당하는 노예의 신음에 귀 기울이시고 구하신 주님은 우리 하나님 이십니다. 척박한 광야 여정에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동행하신 주님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셔서 참 사람으로 살아가신 주님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시어 참 생명을 주신 주님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고백 가운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야훼, 주 우리 하나님

설렘과 공포가 교차하는 눈빛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저희도 저마다의 모압 광야를 지납니다. 삶의 끝없는 모순을 절감하며 지치고 허덕일 때가 있습니다. 마치 먼 우주 한 복판에 홀로 버려진 것처럼 철저한 무력감과 외로움에 사무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격 없는 죄인을 일으키신 놀라운 구원을 바라봅니다. 저희를 향해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고 외치신 위대한 사랑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 사랑에 반응하여 주님을 향해 진실로 ‘우리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유일하신 주님만 사랑하길 원합니다. 날마다 가장 가까이에서 일상을 함께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목록으로 돌아가기
이전 글
창세기 35장 1~15절 "엘 벧엘, 벧엘의 하나님" 2026-07-12
다음 글
출애굽기 15장 22~27절 “야훼 라파, 치료하시는 주님” 2026-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