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 모드

목록으로

누가복음 17장 11~19절 "보고, 돌아와, 드리는 감사"

2026-11-01
정대진 목사

2026년 11월 1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정대진 목사

누가복음 17장 11~19절 "보고, 돌아와, 드리는 감사"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진정한 감사의 이유되시는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님들께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


12년 만의 감사

지난 10월 11일, 의정부에 있는 경기북부 119특수대응단에 한 젊은 여성이 찾아왔습니다. 스물여덟 살 김예빈 씨입니다. 곁에는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이 함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채종영 소방위를 만나러 왔습니다. 12년 전 김 씨의 목숨을 구한 소방관입니다.


2014년 5월 26일, 경기도 고양종합터미널 지하에서 불이 났습니다. 이 화재로 아홉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김 씨는 체험학습을 앞두고 약을 사러 지하에 내려갔습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연기가 치솟았습니다. 곧이어 폭발이 일어났고, 김 씨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채 소방위가 연기 속에서 김 씨를 찾아냈습니다. 옷과 머리카락이 에스컬레이터에 끼어 있었었습니다. 서둘러 도끼로 기계를 부수고 머리카락을 자른 뒤 김 씨를 밖으로 옮겼습니다. 이 사고로 김 씨는 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여섯 차례 수술을 받았고, 3년 가까이 재활 치료를 견뎠습니다.


그렇게 살아난 소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습니다. 어느새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김 씨는 이 모든 행복이 그날의 구조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12년 만에 은인을 찾아가 결혼 소식을 직접 전하고 고맙다고 인사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렇게 극적인 사건은 아니더라도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인생의 은인이 한 분쯤 있으실 겁니다. 그 고마움을 잘 표현하며 사십니까? 그러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이 이야기가 뉴스가 될 만큼 드문 일입니다. 나쁜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고마움을 잊어서도 아닙니다. 삶이 바쁘고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끔찍한 비극에서 건짐을 받은 열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중 아홉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 발길을 돌려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을 깊이 묵상하며 성경이 알려 주는 감사의 본질을 함께 깨닫기 원합니다.



경계선 위를 걷는 사람들

본문 11~13절 함께 읽겠습니다.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그 길 끝에 십자가가 기다립니다. 누가는 이미 9장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여덟 장이 지나도록 예수님은 여전히 사마리아와 갈릴리 경계에 머물러 계십니다. 누가는 이 장소를 일부러 밝힙니다. 본문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배경이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는 지도 위의 평범한 선이 아니었습니다. 수백 년 묵은 증오가 끓어오르던 경계선이었습니다. 기원전 722년, 앗수르 제국이 북이스라엘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이방 민족들을 옮겨 살게 했습니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더러운 족속으로 여겼습니다. 서로 말도 섞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경계선 위에서 예수님은 악성 피부병 환자 열 명을 만나셨습니다. 그 시대에 이 병은 사회적 사형선고였습니다. 율법에 따라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했습니다. 사람이 다가오면 스스로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습니다. 마을 밖에서 홀로 지내야 했습니다. 가족도, 이웃도, 예배의 자리도 잃었습니다. 살아 있으나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열 사람 가운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함께 있었습니다. 평소라면 상종도 하지 않을 사이입니다. 병이라는 고통이 그토록 높던 민족의 담을 허물었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이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혈통의 자부심도, 종교의 우월감도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그들이 함께 소리 높여 외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지 못합니다. 율법과 편견이 쌓아 올린 담이 가로 막았습니다. 그저 목소리를 높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의 외침은 수없이 허공에 흩어졌습니다. 아무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달랐습니다.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으로 내딛는 걸음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예수님은 그들을 보셨습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이들에게 눈길을 건네셨습니다. 가장 멀리 밀려난 이들을 향해 몸을 돌리셨습니다. 우리가 지치고 힘겨울 때도 주님은 가장 깊은 아픔을 들여다보십니다. 그 사랑을 마음 깊이 품으시기 바랍니다.


부르짖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은 복음서의 다른 치유 이야기와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은 대부분 그 자리에서 곧바로 병을 고치셨습니다. 이번에는 손을 얹지도, 낫는다고 선언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만 하십니다.


당시 제사장은 사회 복귀를 허락하는 권위를 지녔습니다. 병이 나은 사람은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정결 예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깨끗하다는 판정을 받아야 비로소 집에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열 사람이 길을 떠날 때 몸은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피부는 아직 썩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 걸음을 내딛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가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어떤 위협을 당할지 모릅니다. 제사장 앞에 섰는데 아무 변화가 없으면 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열 사람은 모두 말씀 한마디를 붙잡고 발걸음을 뗐습니다. 가는 길에 깨끗해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변화보다 말씀을 믿는 걸음이 먼저였습니다. 은혜는 그 길 위에서 찾아왔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먼저 보여 주시고 나서 걸으라 하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힘겹지만 말씀을 붙잡고 한 걸음 내디딜 때, 그 길 위에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여러분의 지난 한 해도 그러했을 겁니다. 앞이 보이지 않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한숨만 나온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씀에 순종해 묵묵히 한 걸음씩 걸었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그 길 곳곳에 주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아홉 사람을 위한 변명

예수님의 은혜로 악성 피부병 환자 열 명이 모두 깨끗해졌습니다. 그중에 단 한 사람만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머지 아홉을 배은망덕한 이들로 단정합니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처지를 한번 헤아려 보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몇 년, 어쩌면 십수 년 동안 아내와 자식을 보지 못했습니다. 살아 있으나 유령처럼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썩어 가던 살이 갓난아이 피부처럼 깨끗해졌습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을 겁니다.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했을 겁니다. ‘빨리 제사장에게 가자. 얼른 판정을 받고 집으로 가자.’


두려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눈엣가시였습니다. 제사장 앞에 서면 누가 고쳐 주었느냐는 물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꺼냈다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막 되찾은 일상을 다시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더구나 그들은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제사장에게 가는 중이었습니다. 율법 절차를 충실히 따랐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홉 사람은 오히려 성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본문은 그들을 쉽게 비난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들의 침묵이 옳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유난히 악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누구나 지닌 연약함입니다. 건강을 잃거나, 경제적 위기를 겪거나, 자녀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병이 낫기만 하면, 통장이 채워지기만 하면, 자녀의 앞길이 열리기만 하면 무엇이든 다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면 어떻습니까?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결심도 쉽게 흔들립니다. 하나님 대신 또 다른 현실 문제에 골몰합니다. 그러면서 차츰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를 미뤄 둡니다.



발아래 엎드린 감사

누가는 이제 우리의 시선을 남은 한 사람에게로 옮깁니다. 본문 15~16절 함께 읽겠습니다.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누가는 나머지 아홉과 다르게 행동한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를 일부러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매우 역설적인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가장 가깝다고 자부하던 아홉 사람은 떠났습니다. 본문의 맥락과 정황상 그들은 유대인입니다. ‘유대’라는 이름은 ‘유다’에서 왔고, ‘유다’는 ‘찬송’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조상의 이름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그 이름에 걸맞은 찬송을 주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경계선 가장 바깥에 서 있던 한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도 18절에서 그를 ‘이방인’이라고 부르십니다. 신약성경에서 오직 이곳에만 쓰인 단어입니다. 그가 처한 싸늘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 줍니다. 이 ‘이방인’이라는 말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뜰과 유대인만 들어가는 안뜰 사이, 낮은 돌담에 붙인 경고문입니다.


지금 보시는 사진은 1871년 예루살렘에서 실제로 찾아낸 돌판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어떤 이방인도 성소를 둘러싼 난간과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 붙잡히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며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사마리아 사람은 병이 나아도 그 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한 발짝만 들여놓아도 목숨이 위태로웠습니다. 그런 이방인이 지금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본문은 이 사람의 행동을 세 단어로 보여 줍니다. 보고, 돌아와,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이 세 걸음에 참된 감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그는 보았습니다. 15절은 그가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사실 열 사람 모두 깨끗해진 몸을 보았습니다. 누가는 유독 이 사람만 ‘보았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깨끗해진 피부 너머에 계신 분을 보았습니다.


그의 힘겨운 처지를 헤아려 보면 그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 아홉 사람은 말씀대로 제사장에게 가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입니다. 다른 일행들처럼 유대인의 성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성전이 있던 그리심산으로 가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자신을 고친 능력은 자기 민족의 전통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그의 눈이 예수님께 향했습니다. 난처한 형편이 도리어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게 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보이는 것 너머의 주님을 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극적인 사건만 은혜가 아닙니다. 오늘 아침 눈을 뜬 일, 식탁에 오른 밥 한 그릇, 곁에 있는 가족의 얼굴. 이 모든 것 중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루를 마치며 감사한 일 세 가지를 적어 보시길 권합니다. 식사 기도에 구체적인 감사 한 가지를 담아 보셔도 좋습니다. 작은 은혜를 알아보는 눈이 열릴 때 그 은혜를 주신 분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감사를 잃은 마음은 늘 없는 것부터 셉니다. 남과 비교하며 부족한 것만 봅니다. 반대로 감사하는 마음은 이미 받은 것을 먼저 봅니다. 같은 하루, 같은 형편이라도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삶의 빛깔이 달라집니다. 사마리아인이 깨끗해진 피부 너머 주님을 보았듯, 우리도 일상의 선물 너머 주님을 보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 그는 돌아왔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돌아오다’라는 말을 즐겨 씁니다. 이 말은 발걸음만 되돌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꾼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는 인사 한마디 하러 온 게 아닙니다. 인생의 중심을 예수님께로 옮겼습니다.


발걸음을 돌이키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용기가 필요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는 홀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야 했습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가족에게 가는 길도 잠시 미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먼저 찾았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의 의미를 정확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미루지 않고 돌아가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아홉 사람도 처음부터 돌아오지 않으려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판정부터 받고, 가족부터 만나고, 그다음에 찾아가자.’ 그렇게 미루다 끝내 돌아가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미뤄 둔 감사는 어느새 잊어버린 감사가 됩니다. 혹시 은혜를 받고도 주님과 멀어진 분이 계십니까? 바쁘다는 이유로 예배와 기도의 자리를 비워 두셨습니까?


오늘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마음에 품고만 있던 고마운 분이 계시다면 작게라도 고마움을 전해 보시길 바랍니다. 돌이킴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인도 먼 길을 떠난 게 아니라 몇 걸음 되돌아왔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몇 걸음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다시 펼친 성경 한 장, 다시 무릎 꿇은 기도 한 번이 우리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셋째, 그는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12절에서 그는 멀리 서서 외쳤습니다. 16절에서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립니다. 목소리도 달라졌습니다. 13절에서는 “소리를 높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쳤습니다. 15절에서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같은 목청에서 전에는 절망의 절규가, 이제는 찬양의 외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가 드린 감사는 단순한 예의가 아니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감사하다’라는 단어는 훗날 초기 교회에서 성만찬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떡과 잔을 나누며 그리스도의 생명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감사도 그러했습니다. 받은 만큼 갚는 답례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존재 전체를 드려 주님과 하나가 되는 예배였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2천 년 동안 지켜 온 감사입니다. 가급적 성찬을 자주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참된 감사는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헤아리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 엎드리는 데까지 이릅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추수감사주일 예배가 바로 그 고백의 자리입니다. 저에게는 담임목사로 부임해 맞는 첫 추수감사절이자, 농촌에서 경험하는 첫 추수감사절입니다. 논과 밭에서 성실히 땀 흘리신 성도님들을 지켜봤기에 더욱 뜻깊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들녘에서, 일터에서, 병상에서, 부엌에서 저마다의 길을 묵묵히 걸어오셨습니다. 그 길 위에서 크고 작은 은혜를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분주한 걸음을 멈추고 주님의 몸 된 교회로 돌아오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진심 어린 경배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일어나 가라

돌아온 사마리아인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을까요? 본문 17~19절 함께 읽겠습니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 말씀의 깊은 뜻을 알려면 당시 로마 사회를 조금 이해해야 합니다. 그때는 지금 같은 복지 제도가 없었습니다. 힘없는 사람은 힘 있는 후원자에게 기대어 살았습니다. 그 도움은 결코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은 평생 그 빚을 갚아야 했습니다. 공개적으로 칭송하고,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드리고, 때로는 목숨까지 바쳐 충성했습니다. 은혜는 곧 빚이었습니다.


그런 눈으로 보면 발 아래 엎드린 사마리아인은 평생 종이 되겠다고 맹세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당시 관습대로라면 예수님은 그를 일으켜 세우며 이렇게 엄중하게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 너는 은혜를 아는구나. 이제부터 평생 내 곁에서 충성하여라.’


예수님은 전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주님은 병을 고친 자신의 권능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를 자유롭게 놓아 보내셨습니다.


“일어나”라는 말씀에는 새 생명의 울림이 담겨 있습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때 같은 뿌리의 단어를 썼습니다. 그는 피부병만 나은 사람이 아닙니다. 죽음 같던 삶을 벗고 새 생명으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가라”는 말씀을 따라 그토록 그리던 가족에게, 마을과 일터로 향합니다. 이제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닙니다. 멀리 서서 외치던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아는 자유인으로 돌아갑니다. 같은 일상이지만 전혀 다른 삶입니다.


열 사람 모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은 돌아온 한 사람만 들었습니다. 아홉은 몸이 나았지만 다시 계산하고 따지는 예전의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한 사람은 몸만이 아니라 삶 전체가 새로워졌습니다. 갚을 길 없는 은혜가 그를 빚에서 풀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17절에 담긴 예수님의 질문에 다시 귀 기울여 보시길 바랍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신 게 아닙니다. 주님의 안타까움이 묻어납니다. 이 물음은 지금 우리에게도 들려옵니다. 은혜를 입고도 돌아오지 않은 자녀를 향해 주님은 지금도 물으십니다.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싸늘한 꾸짖음이 아닙니다. 돌아오라는 따뜻한 부르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이든 이익을 따지고 계산하는 세상에 삽니다. ‘내가 한 번 샀으니 다음엔 네가 사라.’라며 주고받는 계산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셈법이 신앙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온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병을 고쳐 주셨으니 열심히 봉사해야지. 사업을 지켜 주셨으니 헌금으로 갚아야지. 그러지 않으면 벌을 받을지도 몰라.’ 마치 매달 무거운 대출 이자를 내는 사람처럼 숨 가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봉사와 헌금이 귀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 동기가 빚을 갚는 부담이라면, 사마리아인이 누린 자유를 놓치고 맙니다. 참된 감사는 거래가 아닙니다. 내 삶의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에서 거저 왔음을 깨달을 때 터져 나오는 기쁨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한 해 받은 복을 계산기로 두드려 보는 날이 아닙니다. 그 액수만큼 수수료를 떼어 드리는 날도 아닙니다. 자유롭게 된 이들이 함께 누리는 기쁨의 잔치입니다. 혹시 지난 한 해 감사할 일보다 눈물이 더 많았던 분이 계십니까? 기다리던 응답이 오지 않아 지친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 분들께 억지로 감사하라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마리아인도 가장 바깥, 가장 외로운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를 보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선 자리도 주님의 눈길 밖에 있지 않습니다. 감사는 형편이 넉넉해서가 아니라, 그 형편 속에서도 나를 보고 계신 주님을 만날 때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잔치에 참여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사마리아인이 새롭게 디딘 걸음을 우리 삶에서 다시 걸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받은 은혜를 계산하지 않고 흘려보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곁의 사마리아 사람은 누구일까요? 위태로운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이웃입니다. 홀로 지내시는 어르신일 수 있습니다. 낯선 땅에 와서 일하는 이웃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병으로 문을 닫아건 이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멀리 선 열 사람을 먼저 보셨듯이, 우리도 그들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기꺼이 손을 내미는 일, 그것이 추수감사주일에 드릴 가장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본문의 열 사람 가운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고통 속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교회도 서로 다른 이들이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다양한 배경과 차이를 지닌 성도님들께서 한 식탁에 앉습니다. 그 식탁을 넓히는 일이 곧 은혜를 나누는 일입니다. 정배교회가 담을 쌓는 곳이 아니라 담을 허무는 곳, 경계선 위의 사람들이 마음 놓고 쉬어 갈 수 있는 곳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원앙 그림

설교를 시작하며 12년 만에 은인을 찾아간 김예빈 씨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날 채종영 소방위는 김 씨에게 그림 한 점을 건넸습니다. 퇴근 후 며칠 동안 직접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화면에 보시는 원앙 그림입니다. 원앙은 부부의 화목을 상징합니다. 결혼을 앞둔 김 씨를 위한 축하 선물이었습니다. 생명을 구한 사람이 오히려 선물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위험에 빠진 사람이 눈앞에 있으면 누구라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김 씨가 잘 지낸다는 소식을 전해 주어 오히려 고맙고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조금도 대가를 바라거나 생색을 내지 않았습니다. 새 가정을 이루는 김 씨를 축복하며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구원과 회복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빚을 받아 내시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새롭게 열어 갈 삶을 함께 기뻐하시려고 기다리십니다. 부디 이번 추수감사주일, 받은 은혜를 품고 주님께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그 은혜를 이웃과 계산 없이 나누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참된 감사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멀리 선 자를 찾아오시는 주 하나님.

몸과 마음이 무너진 열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깨끗하게 하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날마다 그 은혜를 입고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아홉 사람처럼 서둘러 제 길로 돌아갈 때가 많았습니다. 때로는 은혜를 무거운 빚처럼 여기며 율법주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본문 속 사마리아인처럼 발길을 돌려 주님의 발아래 엎드리게 하옵소서. 계산하는 감사가 아니라 자유롭게 된 기쁨으로 찬양하게 하옵소서. 정배교회가 세상이 멀리하는 이들 곁으로 먼저 다가가는 공동체, 셈하지 않고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목록으로 돌아가기
이전 글
하박국 2장 1~4절 "부풀지 않고 버텨내기" 2026-10-25
다음 글
다음 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