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2장 1~4절 "부풀지 않고 버텨내기"
2026년 10월 25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하박국 2장 1~4절 "부풀지 않고 버텨내기"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님들께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교회개혁기념주일입니다. 뭔가 어색하게 들리실 겁니다. 흔히 ‘종교개혁’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16세기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바로잡고자 한 것은 막연한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였습니다. 최근 학자들은 종교개혁 대신 ‘교회개혁’이라는 용어를 제안합니다. 저 역시 동의하며 주보와 예배에 사용하였습니다. 성도님들 또한 바른 단어를 통한 바른 이해를 향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좋은 시절의 왕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중에 “배드 빌리어네어”가 있습니다. 인도에 있는 어마어마한 부자들의 추악한 이면을 폭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그중에서 저에게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비제이 말리아’(Vijay Mallya)입니다. 그가 스스로 붙인 별명이 있습니다. ‘좋은 시절의 왕’(The King of Good Times)입니다.
말리아는 UB그룹이라 부르는 인도의 거대 맥주기업의 회장이었습니다. 1983년,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2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업을 물려받았습니다. 본격적으로 경영을 시작하며 놀라운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취임 당시 당시 한 해 250만 상자 팔리던 맥주가 20년도 지나지 않아 2001년에는 2,600만 상자로 늘었습니다. ‘킹피셔’라는 상표는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멈췄다면 그는 성공한 기업가로 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더 크고 화려하게 자기를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2005년 항공사를 세웠습니다. 회사 이름은 맥주와 같은 킹피셔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행기를 가리켜 “하늘을 나는 5성급 호텔”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동차 경주팀을 사들였습니다. 프로 스포츠 구단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온갖 사치를 일삼았고 국회의원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국은 속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킹피셔 항공은 2005년 출범부터 2012년 운항 중단 때까지 단 한 번도 이익을 내지 못했습니다. 화려한 고급 서비스를 내세웠지만 정작 그 비용을 내실 있게 감당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적자는 은행 빚으로 메웠습니다. 국영 은행들에서 빌린 돈이 우리 돈으로 1조 원을 훌쩍 넘었습니다. 결국 2012년, 항공사는 무너졌고 비행기는 땅에 묶였습니다. 그는 사법 판결을 피해 영국으로 도망쳤습니다. 그가 으스대며 자랑하던 “좋은 시절”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이후에 벌어졌습니다. 그의 회사에서 일했던 직원들은 몇 달, 길게는 2년 가까이 월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화려하게 부풀었던 제국이 남긴 것은 시끄럽게 터지는 소음과 빈껍데기뿐이었습니다. 풍선은 클수록 멋지게 보입니다. 하지만 속을 채운 것이 공기뿐이라면, 아주 작은 바늘 하나에도 한순간 터지고 맙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아픔 속에서 신음했습니다.
망루에 오른 예언자
오늘 본문에도 잔뜩 부풀어 오른 제국이 등장합니다. 바로 바벨론입니다. 주전 605년 무렵, 고대 서아시아는 그야말로 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습니다. 100년 넘게 주변 나라들을 잔혹하게 짓밟던 아시리아가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은 드디어 찾아올 평화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 빈자리를 새로운 제국 바벨론이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훨씬 더 잔혹하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유다를 무너뜨리고 백성을 짐승처럼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유다 내부의 문제도 심각했습니다. 율법은 힘을 잃었고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짓눌렀습니다.
이때 하박국이 등장합니다. 그에게는 독특한 특성이 있습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백성에게 전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선포입니다. 하박국은 정반대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서 하나님을 향해 묻고 따집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탄원입니다. 그는 백성이 주님께 죄를 지어 벌을 받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악독한 바벨론을 도구로 쓰시냐고 호소했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삼키는데도 왜 가만히 계시는지를 흐느껴 물었습니다. 이 물음은 지금 우리가 억울하고 답답한 일을 당할 때, 혹은 거대한 재난으로 아까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가슴 시린 의문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따라서 하박국이 무거운 질문을 품고 달려가는 곳을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 1절 함께 읽겠습니다.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파수하는 곳’은 군사들이 적의 움직임을 살피며 경계를 서는 성벽 위 초소를 가리킵니다. 하박국은 골방에 틀어박혀 세상을 등지지 않았습니다. 억울함에 주저앉아 불평만 늘어놓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차게 바람이 몰아치는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내 좁은 시야로는 이 혼란스러운 세상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험한 꼭대기에 서서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박국은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거라고 가만히 숨을 죽이고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답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이 모습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얼핏 보면 불손한 불신앙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하박국의 깊은 신뢰를 발견합니다. 그는 주님께 무관심하거나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주저 없이 나아가 질문하고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그런 하박국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본문 4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교만하며’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우펠라’입니다. ‘부풀어 오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언덕처럼 솟아오른 땅이나 몸에서 불룩하게 튀어나오는 종기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은 병들어 곪아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냉철하게 꿰뚫어 보시는 바벨론의 실체입니다. 휘황찬란한 제국의 모양새와 달리 안은 정직하지 못한, 거짓으로 가득 찬 부풀림입니다.
이어지는 5절은 그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그립니다.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아무리 삼켜도 배부를 줄 모릅니다. 끝없이 부풀어 오르려 합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 쌓고, 피로 성을 세우고, 불의로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억눌리고 다쳤습니다. 하지만 그 끝은 분명합니다. 반드시 터지고 맙니다. 영원할 것 같던 바벨론은 하박국의 예언 이후 채 70년이 되지 않아 페르시아에 무너졌습니다.
현대 경제 용어로 말하면 ‘거품’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비제이 말리아의 제국이 그랬습니다. 빚으로 몸집을 불리고, 화려한 겉모습으로 진짜 모습을 가렸습니다. 우리와 무관한 재벌이나 역사 속 제국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연약한 본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재산이나 학벌, 집의 크기, 자녀의 성공 등으로 자기를 남들보다 크게 보이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신앙마저 부풀립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기도하는지를 자랑합니다. 성경 지식을 과시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봉사한다고 으스댑니다. 혹은 내가 얼마나 대단한 기독교 집안인지를 내세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교회의 크기와 영향력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경우도 흔히 발견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작은 바벨론이 되어 갑니다.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은 손
그렇다면 악독한 부풀림에 맞서는 하나님의 길은 무엇입니까? 4절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믿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에무나>입니다. 흔히 ‘믿음’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십니까? 믿음이 좋다는 건 과연 무엇일까요? 큰 소리 높여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뜨거운 확신이나 고개를 끄덕거리는 지적 동의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믿음을 가리키는 이 말은 훨씬 더 넓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뿌리는 ‘굳게 서다, 흔들리지 않다, 떠받치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종합하면 ‘신실하게 버티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관련해서 히브리어 <에무나>가 성경에서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바로 출애굽기 17장 12절입니다. 화면 보시면서 함께 읽겠습니다.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웁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깁니다. 그런데 나이 많은 모세의 팔이 점점 무거워졌습니다. 그러자 아론과 훌이 각각 모세의 양손을 붙잡아 올렸습니다. 이 장면을 성경은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라고 묘사합니다. 여기서 ‘내려오지 아니한’으로 옮긴 말이 바로 ‘에무나’입니다. 직역하면 “그 손이 해 질 때까지 에무나였다”입니다. 굳게 버텼다는 뜻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알려줍니다. 자기 힘을 과시하며 하늘을 찌르는 손짓이 아닙니다. 조금의 흔들림 없이 근육질 팔을 의연하게 치켜드는 것도 아닙니다. 너무나 지치고 힘들지만, 저릿저릿 흔들리지만, 해가 질 때까지 맡은 자리를 묵묵히 버티는 신실함입니다.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모세를 도운 것처럼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해 주는 공동체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박국 2장 4절은 우리 앞에 두 개의 그림을 나란히 세웁니다. 하나는 부풀어 오른 풍선입니다. 크고 화려하지만 속이 비어 있어 결국 터지고 맙니다. 다른 하나는 땅에 깊이 박힌 버팀목입니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비바람 속에서도 끝까지 무너지지 않습니다. 바벨론은 부풀어 오르다 끝내 망합니다. 그러나 의인은, 곧 하나님의 백성은 버텨내며 기어이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의인은 무엇으로 버틸까요? 자기 경험과 노력과 지식이 아닙니다. 성도의 에무나는 하나님의 에무나에 기대어 있습니다. 우리가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하지만 우리가 버텨야 할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쉽게 팔을 내리고 쓰러질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신실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연약한 자녀들을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3절 함께 읽겠습니다.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정한 때가 있습니다. 거짓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한 문장이 끼어 있습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여기서 ‘더디다’는 머뭇거리며 꾸물대는 모습을 그리는 말입니다. 하나님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약속이 너무 늦게 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장 내일 바벨론 군대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유다 백성에게 기다리라는 말은 가혹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모든 것이 빠른 나라입니다. 딸깍 클릭 한 번으로 원하는 물건을 다음 날 받을 수 있습니다. 행정 절차도 금세 끝납니다. 해외 여행객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꼭 들르는 곳 중 하나는 안경점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안경을 맞추는 데 보통 1~2주가 걸립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늦어도 한 시간 안에 끝납니다.
이런 나라에 살다 보니 기도 응답이 느릴 때 더 쉽게 마음이 지칩니다. 우리 교인 중에는 본인이나 가족의 병이 빨리 낫길 바라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 외에도 자녀의 학업이나 취업 혹은 혼인 문제로 힘겨워하는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여러 경제적 어려움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기도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마치 하나님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집니다. 꿈쩍도 하지 않는 거대한 벽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무겁고 답답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향해 왜 그리 조급하냐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함께 아파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이 기다림은 넋 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게 아닙니다. 해가 지도록 손을 내리지 않았던 모세처럼, 오늘 하루를 버텨내는 수고입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으로 향하는 것, 자녀들을 끌어안고 격려하고 기도하는 것, 피곤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일터로 향하는 것, 이 모든 일상이 바로 우리의 에무나입니다. 부풀리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는, 묵묵히 버티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이런 믿음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바울과 루터
하나님께서 하박국을 통해 전하신 말씀이 수백 년이 흘러 또다른 사람을 통해 새롭게 살아났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로마서 1장 16~17절 함께 읽겠습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이 편지를 보낸 로마는 당시 세계 최강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황제는 신처럼 숭배받았고, 로마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로마는 또다시 등장한 바벨론이었습니다. 그 한복판에서 바울은 갈릴리 시골 출신의 한 남자가 달려 죽은 십자가가 진실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시어 완성하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전했습니다. 바벨론과 로마의 눈으로 보면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입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부풀어 오른 제국은 결국 무너지지만, 하나님 나라 복음은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또한 로마 교회 안에도 작은 부풀림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율법과 혈통을 자랑했습니다. 이방인 성도들은 자유를 내세우며 유대인 성도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서로 자기가 더 낫다고 자신을 부풀렸습니다. 바울은 그들 모두에게 하박국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는, 의인은 자기 자랑으로 살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잡고 기대어 버티는 에무나로 삽니다.
그때로부터 1,400여 년이 흘렀습니다. 한 젊은 수도사가 이 말씀 앞에 섰습니다. 마르틴 루터입니다. 당시 교회는 면벌부를 팔며 돈과 공로로 구원을 살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무리하게 거대한 성당을 짓고 화려한 권력을 쌓았습니다. 교회가 스스로 바벨론이 되어 버렸습니다.
루터는 로마서를 통해 하박국 2장 4절을 다시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을 외쳤습니다. 인간의 공로로 부풀어 오른 교회의 거품을 걷어 내고, 그리스도의 은혜 위에 다시 서자는 외침이었습니다. 역사를 새롭게 한 교회개혁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길을 따르는 믿음의 후예들입니다.
함께 버텨내는 공동체를 꿈꾸며
그렇다면 2026년 교회개혁기념주일을 맞이하는 정배교회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요? 부풀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담임 청빙을 위한 목회 계획서에 ‘인위적인 양적 성장을 지양한다.’라고 적은 이유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연스럽게 성도가 느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억지로 사람들을 끌어모아 규모를 자랑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느라 어느샌가 속은 비고 본질은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선한 능력은 사라지고 공허한 탐욕만 남습니다.
그 대신 묵묵히 저마다의 일상을 버틸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해야 합니다.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복음의 본질을 깨닫고 누리고 전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한국 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눈부신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는 의료보험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집에 병이 찾아오면 집안 전체가 무너졌습니다. 돈이 없어 병원 문턱도 넘지 못하고 아픈 가족을 그대로 떠나보내는 일이 흔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산 지역 23개 교회 성도 723명이 모여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조합입니다.
그들이 내건 표어는 아주 소박했습니다.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입니다. 서로의 팔을 붙잡고 버틸 힘을 주는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보험이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절이었습니다. 조합의 살림은 늘 빠듯했습니다. 수입과 지출이 겨우 맞아떨어진 것은 시작한 지 11년이 지난 1979년이 되어서였습니다. 많은 손해와 어려움에도 십 년 넘게 더딘 시간을 견뎌 낸 결과입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습니다. 1989년 7월, 정부가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행했습니다. 그때 청십자 조합원은 약 23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21년 동안 이 조합을 통해 진료를 받은 사람은 연인원 788만여 명이었습니다. 몸집을 더 키워 거대한 이익 단체로 남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청십자는 조합원 전부를 국가 의료보험에 넘기고 기꺼이 해산했습니다. 아픈 이웃을 위해 함께 버텨내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사를 아름답게 밝힌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장기려 박사님입니다. 박사님은 우리나라 최초로 간 절제 수술을 성공시킨 최고의 외과의사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재물과 명예를 탐하며 자기를 부풀리지 않았습니다. 평생 병원 옥상의 작은 사택에서 지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이끌며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1950년 겨울 평양을 떠나 피란하던 길에 아내와 다섯 자녀와 헤어졌습니다. 둘째 아들 하나만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뒤로 박사님은 북에 있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재혼하지 않고 평생 홀로 지냈습니다. 1985년 남북 고향방문단이 꾸려질 때 그에게 북한을 방문해 가족을 만날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박사님은 ‘수많은 이산가족이 기다리고 있는데 나만 특혜를 받을 수 없다’며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결국 그는 45년 동안 가족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1995년 성탄절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유언대로 이 한 줄이 새겨져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 제 눈에는 마치 그 앞에 괄호로 이렇게 적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을 부풀리지 않고 묵묵히 버티며)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
장기려 박사님의 일생은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자신을 전혀 부풀리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외롭고 힘든 삶을 버텨냈습니다. 그 결과 온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 의료보험 제도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셨습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사는 신실한 그리스도인과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부풀라고 말합니다. 더 크게, 더 화려하게, 더 많이 가지라고 부추깁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성공을 추구하고 눈먼 성장에 목을 매는 안타까운 경우를 발견합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또 다른 바벨론을 마주하곤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부풀지 말고 버티라.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부디 우리 삶이 부풀어 오르는 풍선이 아니라 땅 깊이 뿌리내린 버팀목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배교회가 서로를 굳게 붙잡아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정배리와 양평을 거쳐 대한민국과 온 세계를 향해 온전히 퍼져 나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오늘 말씀의 핵심과 이어지는 시 한 편을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나는 다만 나 자신을
- 박노해
갈수록 불안한 변화와
속도 빠른 유행의 세계
한가운데서
미칠 듯한 자기 홍보와
끝이 없는 비교 경쟁의
한가운데서
나는 다만 치열하게 나 자신을
정돈하고
정숙하고
정연하게
오직 나 자신을 살아내며
내가 꼭 해내야 할 일을
하루하루 해나갈 뿐
빛이 온다
꽃이 온다
네가 마주 걸어온다
기도
신실하신 주 하나님.
스스로 부풀어 하늘에 닿으려 하는 바벨론 같은 세상 속을 살아갑니다. 때로는 저희 마음마저 헛된 자랑으로 부풀어 오르곤 합니다. 그러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 줄 믿습니다. 더딘 시간 속에서도 손을 내리지 않게 하시고, 지쳐 있는 누군가의 손을 서로 붙들어 주게 하옵소서. 십자가에서 끝까지 신실하셨던 주님을 따라, 부풀지 않고 버텨내게 하옵소서. 정배교회가 말씀 앞에 바로 선 진정한 개혁교회로 날마다 거듭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