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 "믿음의 소문"
2026년 10월 18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 "믿음의 소문"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님들께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
감춰둔 셔츠
사진 속 이런 셔츠를 한 번쯤을 보셨을 겁니다. 영어로는 클러지 칼라(clergy collar) 셔츠라고 부릅니다. 참고로 가톨릭 신부님들만의 복장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는 1865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목사님이 목회자의 평상복으로 고안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이 셔츠는 우리나라에서 개량한 셔츠입니다.
저는 스무살에 장신대 신학과에 입학해 줄곧 목사가 되기를 동경했습니다. 언젠가 저 셔츠를 입을 날을 고대했습니다. 마침내 목사 안수를 받고 첫 번째 부목사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저의 오랜 바람대로 저 셔츠를 평소에 자주 입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몇 번 시도는 했었습니다. 주일 사역을 마치고 목회자 셔츠를 입은 채로 아내와 시내에서 데이트를 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상한 시선을 받고는 했습니다. 저의 착각일 수 있겠지만 ‘왜 신부님이 여자 손을 잡고 다니지?’하는 의아한 눈길을 받고는 했습니다.
꼭 그런 오해가 아니더라도 제가 목사인 걸 눈에 띄게 드러내는게 상당히 부담스러웠습니다. 제가 우리교회에 오기 직전에 섬겼던 교회에서는 이 목회자 셔츠가 주일 지정 복장이었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반드시 입어야 했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사역할 때는 전혀 불편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교인 사이에서 제가 목사라는 걸 알리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문제는 퇴근한 후였습니다.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다른 셔츠로 갈아입고 집에 가거나 약속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이런 제 심경을 어느정도 이해하실 겁니다. 특히나 요즘처럼 교회가 극심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시대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잘 드러내십니까? 저는 차에 십자가를 붙이는 분들의 용기를 높이 삽니다. 운전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인상 찌푸리는 상황을 겪습니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제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걸 몰랐으면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주변에 스스럼없이 밝히십니까? 우리 성도님 대부분은 마을에서 정배교인이라는 걸 잘 알 겁니다. 이러한 소속과 신분이 때로는 불편하고 거추장스럽지 않으십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모습이 때때로 초라하고 조금은 부끄럽게 여겨지지는 않았습니까?
거대 도시 속 작은 모임
오늘 본문에는 바로 이와 흡사한 문제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학자들 대부분은 데살로니가전서를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책으로 여깁니다. 대략 주후 50년경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채 20년도 지나지 않은 때입니다. 교회가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여러 한계에 부딪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교인 숫자도 무척 적었고 조직과 체계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교회라기보다 ‘모임’이라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릴 만큼 여러모로 미약하고 초라해 보였습니다. 반면 이 교회가 자리한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 지역 최대의 도시였습니다. 속주의 수도로서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은 ‘자유도시’였습니다. 정치적으로 매우 막강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로마와 동방을 잇는 ‘에그나티아’라는 넓은 도로가 도시 한복판을 지났습니다. 좋은 항구도 있었습니다.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주후 150년경에는 인구가 약 2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온 마케도니아의 어머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당연히 그곳에는 많은 사람과 돈이 오갔습니다. 문화 교류도 활발했습니다. 그리스와 이집트를 비롯한 유럽과 중동의 다양한 종교가 흘러들어 왔습니다. 그 종교들 대부분은 크고 화려한 신전을 가졌습니다. 로마 제국의 주요 의식에 참여하며 상당한 영향력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들과 너무나 대조되는 작고 볼품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변방 시골에서 태어나 로마 제국의 반역범으로 극형에 처해진 한 남자가 실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시대 교양 있는 시민들이 듣기에 허무맹랑한 헛소리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신이 속한 도시와 견주어 볼 때 뭐 하나 대단할 것 없는 초라한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거기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정신 나간 어리석은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더구나 사도행전 17장 1절에 따르면 데살로니가에는 유대교 회당이 있었습니다. 꽤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곳 교인들은 화려한 도시의 시민들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이단’으로 여기고 멸시하는 유대인들에게도 이중으로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떠나온 사람의 염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늘 걱정과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가 바로 이 교회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따르면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데리고 빌립보를 떠났습니다.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마침내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세 안식일 동안 회당에서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그 끝에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같은 도시에 살던 유대인들이 교회가 생긴 것을 알고 분노했습니다. 야손의 집으로 몰려가 바울을 잡으려 했습니다. 마침 바울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대신 야손을 끌고 가 보석금을 물렸습니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교회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도시를 떠나야 했습니다. 베뢰아를 지나 아테네로 내려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마음에는 늘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미안함과 애틋함이 있었습니다. 급한 사정으로 갓 태어난 아기를 다른 사람 품에 두고 떠나온 부모의 심정이었습니다. 눈부시게 화려한 도시 문화와 비교할 때 그곳 교회가 얼마나 작고 연약한지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금세 휩쓸려 사라질 것처럼 보였습니다. 여러 번 그들에게 가려 했지만 매번 길이 막혔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8절에서 바울은 ‘사탄이 우리를 막았다’고까지 말합니다. 결국 그는 더 참지 못하고 디모데를 대신 보냈습니다. 그리고 홀로 남아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디모데가 가져온 소식
그러던 어느 날, 디모데가 돌아와 놀라운 소식을 들려주었습니다. 바울의 염려대로 교회가 도시의 거대한 힘과 무게에 짓눌려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생생히 살아남아 아름다운 복음의 공동체로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데살로니가전서 3장 6절이 보여줍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바울은 디모데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라고 말할 때 쓰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바울의 편지 전체에서 복음이 아닌 다른 일에 쓰인 곳은 오직 여기뿐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들려온 소식이 바울에게는 마치 복음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바울은 곧바로 펜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쓰인 편지가 오늘 우리가 펼친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사로 가득합니다.
본문 6~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먼저 6절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근심과 달리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도 ‘많은 환난 가운데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을 비롯한 복음 전도자들과 주님을 본받았습니다. 7절과 8절을 보면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를 넘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다른 믿는 이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그들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습니다.
8절에서 ‘들리다’로 번역된 말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이곳에만 쓰인 단어입니다. 우리말 ‘메아리’처럼, 천둥이나 나팔처럼 크고 우렁찬 소리가 온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데살로니가로부터 들려온, 그 곳에 있던 교회에 관한 믿음의 소문이 그러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일부러 소문을 낸 게 아닙니다. 열심히 이벤트를 하고 전도지를 돌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장에서 정직하게 물건을 팔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분노로 갚지 않으며, 약하고 병든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데살로니가에는 앞서 말씀 드린대로 ‘에그나티아’라는 이름의 커다란 도로가 지나갔습니다. 그 길 위로 날마다 상인과 군인과 여행자가 지나갔습니다. 제국이 자신들의 번영을 위해 닦은 길입니다.
그길이 복음 전파의 통로로 변화되었습니다. 성도의 아름다운 일상이 그 길을 타고 그리스 전역으로 흘러갔습니다. 삶 자체가 복음의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라고 고백합니다. 당대 최고의 설교자가 스스로 입을 닫았습니다. 그들의 삶이 이미 어떤 설교보다 크게 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문의 내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시대의 일반 상식으로 보면 뭐 하나 내세울 것 없었습니다. 도시의 화려한 문화와 종교에 눌려 금세 사그라들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먼지처럼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풍성히 살아남아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그 소식을 듣고 그토록 기뻐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9~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세 가지 동사가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버리다.’, ‘섬기다.’, ‘기다리다.’ 입니다.
첫째, 그들은 우상을 버렸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입니다. 하지만 1세기 로마 사회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회와 경제 전체가 우상 숭배와 촘촘히 얽혀 있었습니다. 상인과 기술자는 각자 직업에 맞는 조합에 속해야만 먹고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합의 모임과 잔치는 수호신을 모신 신전에서 열렸습니다. 게다가 황제를 신으로 받드는 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시민의 기본 의무였습니다. 따라서 우상을 버린다는 것은 거래처와 친구와 평판을 잃는 일이었습니다. 생계와 안전을 걸어야 하는 결단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 길을 택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돌아선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신앙과 교회가 초라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오직 주님만이 진실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고백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둘러싼 로마 제국의 신들이 겉모습은 화려할지언정 거짓되고 헛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위대하고 강해 보이지만 실상 연약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 세계의 참된 통치자이심을 진심으로 믿고 섬겼습니다.
셋째, 그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10절의 ‘기다리다’ 역시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소파에 누워 시간을 보내는 느슨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갔던 아들이 살아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의 기다림입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을 입구까지 나가 서성입니다. 저 멀리 보이는 작은 그림자에 마음이 설렙니다.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마음 가짐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님이 오셔도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 자기 일터를 정직하게 가꾸고 무너진 이웃을 돌보았습니다.
그 결과 아름다운 소식과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바로 3절에 기록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입니다. 그 유명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만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의 편지 중 가장 오래된 본문에 이미 언급됩니다. 그것도 구체적인 실천과 힘겨운 노동과 굳건한 참음과 함께 등장합니다. 진실로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며 사랑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두고 감사한 까닭은 그들이 열심히 전도해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큰 교회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인 가운데 힘 있고 돈 많은 사람이 있어서 세상에 영향력을 과시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사람들 눈에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그 작고 연약한 신앙 공동체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소중하고 당당하게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확인한 복음
바울은 바로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 자신의 지난 세월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율법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의 앞에는 많은 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민족 지도자로서의 성공적인 삶이 탄탄하게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남들이 선망하는 화려한 도시의 삶입니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다메섹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며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껏 살아온 도시의 생활과는 정반대되는 빈들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온갖 상실과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바울이라고 해서 후회와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어린 시절 함께 공부하고 어울려 놀던 친구들이 성공을 이루고 상류층의 특권을 누리는 모습을 부럽게 쳐다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그들과 완전히 다른 자신을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는 시선을 느끼면서 늘 기쁨과 감사를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 역시 도시의 화려함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초라한 교회 같은 자신의 하루하루를 돌이켜보며 때때로 비참함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데살로니가로부터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생명력을 푸르게 지켜 나가는 교회의 모습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전하는 복음과 그것을 살아내는 삶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고, 도리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한 것임을 다시금 감격하며 깨달았습니다. 그 복음은 여러 환난 가운데서도 교회와 성도를 굳건히 세우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참된 희망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 우리의 고백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의 첫머리에 이렇게 씁니다. 본문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여러 차례 말씀 드린대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눈에 보이기로는 거대한 도시 한구석의 작은 모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주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이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는 까닭은 그 모양새가 크고 웅장해서가 아닙니다.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을 자랑해서도 아닙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거기에 함께하시고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한복판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시작하며 드린 질문을 다시 한번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기독교 신앙과 교회는 과연 어떤 의미입니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기꺼이 고백할 수 있는 삶의 우선순위이십니까?
우리 역시 또 다른 데살로니가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나를 증명해야 하는 성공의 압박, 언제 흔들릴지 모르는 생계의 불안, 불의와 타협해야만 살아남을 것 같은 압력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십자가와 부활 신앙은 너무나 초라하고 어리석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앞에 떳떳하지 못할 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 본문에 담긴 바울의 감사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 복음만이 온 세계를 참으로 살리는 진리임을 더욱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러했듯 헛된 것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일상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삶이 또 다른 복음의 기쁜 소식이 되어 삶 속에 향기롭게 퍼져갈 줄 믿습니다.
떠난 자리에 남은 믿음
너무나 감사하게도 우리교회는 이미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잘 실천해오고 있습니다. 관련해서 마음 뭉클한 경험을 지난 한달 넘게 온 성도님들이 함께 공유했습니다. 지난 9월 5일 토요일이었습니다. 양평지구 장로회 순회 예배가 우리 교회에서 열렸습니다. 그 때 다른 교회 장로님들 틈에서 강아지 한 마리도 함께 찾아왔습니다. 아마도 양평으로 여행 온 가족에게 버림당한 유기견 같았습니다.
다음날인 주일에도 그 개가 우리교회 마당을 맴돌았습니다. 교회학교 아이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날 오후에 벌어진 풍경을 저는 앞으로 목회하며 평생 못잊을겁니다. 교인들이 마당을 빙 둘러싸고 서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온 성도가 함께 키우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바로 다음날 동물병원에 데려가고 털도 잘랐습니다. 마당 한쪽에 집을 마련하고 ‘마루’라는 이름도 지어줬습니다. 단톡방을 만들어 당번을 정해 산책을 시키고 사료를 챙겨주며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줬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지켜보며 정배교회 담임목사로서 너무나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공동체의 참 생명력은 가장 약한 존재를 대하는 태도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버림받은 개에게도 따뜻한 돌봄을 베푸는 분들입니다. 그 결과 마루는 하루하루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제가 출근하면 저를 가장 먼저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저는 마루의 밝은 울음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치 데살로니가교회와 같은, 정배교회의 순전한 신앙을 생생히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금요일 너무나 갑작스럽게 마루를 떠나보냈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제 마음에 충격과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하물며 헌신적으로 마루를 위해 섬기신 권사님들은 더하실 겁니다. 특별히 이리브가 권사님께서 너무나 수고 많으셨습니다. 부디 절대 자책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권사님을 통해 아낌없는 사랑을 마루에게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마루는 우리 곁에 없지만 권사님의 섬김은 분명 헛되지 않았습니다. 정배교회가 더욱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생생한 증거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리브가 권사님과 마루를 돌봐준 분들만이 아닙니다. 제가 우리교회에 부임한 후 하루하루 아름다운 믿음의 실천을 확인합니다. 교회 구석구석을 애정으로 돌보는 손길에 혼자 울컥할 때도 많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에 신뢰를 얻으며 믿음의 본이 되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오늘날의 데살로니가에 마음을 뺏기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 대신 십자가의 위대함을 깨닫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우리 정배교회를 통해 아름다운 복음의 소문이 널리 울려퍼지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참된 생명과 진리이신 주 하나님.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 속 작은 교회의 겉모습처럼, 때때로 복음을 초라하고 부끄럽게 여기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님, 십자가가 진실로 아름답고 위대한 까닭은 결코 그 모양새가 크고 웅장하기 때문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온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복음의 공동체에 함께하시고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심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며,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일상을 통해 아름다운 믿음의 소문을 퍼뜨리게 하옵소서. 정배교회가 주님 보시기에 더욱 합당한 건강한 공동체로 날마다 든든히 서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