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3장 10~17절 "눈길과 손길"
*방송 기기 이상으로 영상 녹화가 중단되었습니다.
2026년 10월 11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누가복음 13장 10~17절 "눈길과 손길"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하나님의 따뜻한 눈길과 손길이 성도님들께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
어느 여인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네 시골 마을에서는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과 여건이 몹시 열악했습니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된 지적장애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지극히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가정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의 멸시와 천대 속에 힘들게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 살던 동네에서 이런 모습을 보며 자랐던 기억이 있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이러한 비극에 부닥친 한 여인의 모습을 어느 시인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중간에 경건한 예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시적 표현으로 너그럽게 이해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천덕꾸러기요
동네에서는 악귀들린 년 혹은 미친년으로 통한다
빈농에서 자라나 이웃 마을 빈농의 총각에게
시집간 지 이레만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새색시 품을 파고드는 신랑에게
갑자기 금침 밑에 감춰둔 식칼을 꺼내 위협하고
시모 밥그릇에 몰래 똥을 누어 조반상에 올려놓아
시집살이 보름도 못 채우고 소박맞은 후
친정 오라비 그늘에 들어 애옥살이하면서
정신병원 근처에도 못 가 본 채
살얼음 잡힌 동네 개천에서 가끔씩 벌거벗고 목욕하다
난폭한 오라비 매질에라도 걸리면
푸른 멍 두드러기 돋아난 얼굴 부끄러워
치렁대는 긴 머리단으로 살포시 가리고
여러분이 만약 이런 사람과 마주한다면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이성은 마땅히 그를 도와주고 따뜻하게 보살펴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은 타인의 불행을 앞에 두고도 자신의 이익과 감정을 우선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악귀 들린 미친 여자로 대하며 싸늘한 눈길을 보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베풀어야 할 가족이 누구보다 거친 손길을 휘둘렀습니다.
따라서 그 여인은 온갖 종류의 폭력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음을 시의 행간 속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도 그녀를 불쌍히 여기고 따뜻한 눈길과 손길을 건네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헤아려주지 못할 설움을 홀로 묵묵히 삭히며 살아갈 뿐입니다.
단지 문학 속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처럼 당연히 사랑과 보호를 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 역시 지난날, 어쩌면 지금 그런 시련 가운데 괴로워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 절망에 대한 유일한 답을 하나님에게서 찾기 위해 주일 예배로 이 자리에 모이셨을 겁니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한 여인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도 끔찍한 외면과 소외를 겪으며 힘겨운 나날을 보냈던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어느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곳에 많은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은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에 대해 본문 11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그녀는 자기 몸을 가눌 수 없는 중증 장애를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앓고 있었습니다. 허리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했습니다. 하루의 대부분 땅만 내려다보며 살았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이 그녀에게는 사치스러웠습니다. 마음껏 푸른 하늘을 올려다볼 수 없었습니다. 마주 선 사람의 얼굴을 바라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흙먼지 묻은 발등뿐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너무나 가련하고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주위 사람들과 신앙 공동체의 세심한 돌봄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도움을 주저하게 하는, 더 정확히는 혐오하고 꺼리게 되는, 그녀에 대한 또 다른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귀신 들림’입니다.
이 때, 그녀를 사로잡은 ‘귀신’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많은 이단이 그러하듯이 성경의 맥락과 상황을 무시한 채 귀신의 존재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반대로 현대 과학의 기준으로 영적 존재를 아예 부정하는 것도 그릇된 태도입니다. 대신 ‘귀신’이라는 언급을 통해 본문이 드러내려 하는 바를 신중히 헤아릴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의 경우 귀신은 한 여인에게 질병 이상의 고통을 안겨주는 실체입니다. 당시 과학과 의학 지식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의 흉측한 비극을 함부로 단정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귀신 들림을 죄를 지은 결과로 흔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를 치유가 필요한 병자가 아니라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더러운 존재로 낙인찍었습니다. 비록 본문이 직접적으로 상세하게 묘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악귀 들린 여자’라는 날카로운 비난과 함께, 그녀를 덮친 가혹한 폭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몸이 굽은 만큼 마음도 함께 움츠러들었을 겁니다. 그렇게 내면 깊이 차곡차곡 싸늘한 절망이 차올랐습니다.
회당장의 분노
더욱더 끔찍한 사실이 있습니다. 차가운 시련 속에서 그녀는 신앙 공동체에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본문의 공간 배경은 회당입니다. 회당은 유대인 마을의 중심에서 신앙을 공유하는 공간입니다. 사람들로부터 귀신 들렸다고 손가락질 받은 장애 여성이 바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당연하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회당을 향하기까지 그녀에게는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우선 심하게 병든 몸을 끌고 움직이는 것 자체가 상당히 힘듭니다. 겨우 도착하더라도 그곳에는 누구도 자기를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 온갖 멸시를 당하고 상처를 입을 것을 뻔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아픔을 끌어안고 수많은 어려움에도 묵묵히 회당으로 행했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희망을 찾고 싶어서입니다. 분명히 깨달아 아시기 바랍니다. 오랜 시간 아무런 일이 일어나 지 않더라도, 오히려 더욱 지치고 고통스러워도 예배로 나아간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 눈물겨운 걸음을 주님께서 감격으로 품어주십니다.
회당장은 그 여인이 어렵게 찾아간 회당을 관리하는 행정가이자 종교 지도자입니다. 그는 마땅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귀신 들려 장애로 신음하는 여인의 아픔을 헤아려 줘야 합니다. 구체적이고 따뜻한 섬김으로 그녀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것이 회당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로 행동 합니다. 회당장은 그녀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놀라운 치유의 순간에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몹시 분노하였습니다. 이유를 주목해야 합니다. 14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회당장은 왜 다른 날이 아닌, 하필 안식일에 병을 고쳤는지 거칠게 따져 물었습니다. 사실 그가 화를 내며 소리친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회당장은 회당의 질서와 율법 전통을 지켜야 할 책임자입니다.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을 모아 놓은 문헌을 가리켜 “미쉬나”라고 부릅니다. 거기에 보면, 안식일에 금지되는 노동을 매우 세밀하게 규정했습니다. 치료 행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당장 위급한 경우에만 예외로 허용되었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이 굳이 안식일을 어겨서 질서를 망친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불쾌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한 여인이 귀신들려 아파하며 내뱉는 신음보다 종교 질서가 더 중요했습니다. 안식일 정신 대신 안식일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켰습니다. 말씀의 핵심보다 문자를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규정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그는 율법을 집착하느라 정작 그 율법이 보호하려 했던 사람을 잃어버렸습니다. 제도를 지키느라 생명을 놓쳤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회당으로 눈물지으며 찾아온 그녀의 고통에는 전혀 관심 없었습니다.
이 장면은 평소 회당에서 그 여인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사람 취급 하지 않았습니다. 회당의 경건한 분위기를 망치는 사탄의 딸이었습니다.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었습니다. 하루속히 치우고 싶은 짐 더미에 불과했습니다. 물리쳐야 할 대상은 분명 귀신입니다. 장애 여성인 그녀는 피해자이자 약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도리어 공동체의 선을 해치는 가해자 취급을 당했습니다. 마치 그녀 자체가 귀신인 양 멸시와 폭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리와 무관한 일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문 속 장면을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는 상황에 적용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일 아침, 정갈하게 준비된 예배가 순서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찬양이 울려 퍼지고 모두가 경건하게 앉아 있습니다. 바로 그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엉엉 울며 예배당으로 걸어들어왔습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누더기 같은 옷을 몸에 걸치고 있습니다. 삽시간에 고약한 냄새가 퍼집니다. 누가 봐도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입니다.
그 순간 예배 흐름이 끊기고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당황해할 겁니다. 감당할 만한 수준을 넘어서는 혼란이기 때문입니다. 눈치껏 얼른 사라져 주길 내심 바랍니다. 혐오가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릅니다. 자기도 모르게 체면을 내려놓고 싸늘하게 쳐다봅니다. 있는 힘껏 교회 밖으로 밀어내려 손을 뻗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실제로 일어날 일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평범한 사람입니다. 성인군자처럼 완벽한 도덕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다른 누군가의 아픔을 헤아리고 품어주고 있는지, 아니면 차갑게 무시하고 밀어내고만 있지는 않는 지, 말씀을 통해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교회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파악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가 싸늘한 율법이 아닌 따뜻한 복음 따르고 실천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보시고, 손을 얹으시고.
그러기 위해 주님께서 그 아픈 여인에게 내미시는 눈길과 손길을 주목해야 합니다.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방금 확인했던, 회당장이 분노한 치유 장면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다른 치유 장면처럼 고쳐 달라고 외치거나 붙잡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심각한 질병으로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모두가 외면하던 그녀를 바라보셨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셔서 말을 건네십니다. 그런데 이 때 그녀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외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렇게 따뜻하게 선언하십니다.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평범한 듯 하지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그녀가 사로잡혔다고 함부로 판단했던 귀신을 주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인의 허물과 약함 들추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병으로 고통당하는, 아픔을 먼저 들여다 보셨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추한 모습 아니라 내면의 본질을 들여다보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행동이 아니라 그녀가 가장 절박하게 느끼는 결핍과 설움을 눈에 담으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예수님은 그녀의 뒤틀린 몸에 직접 손을 얹으셨습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말씀만으로도 얼마든지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따뜻한 손길을 일부러 건네셨습니다. 사실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사람을 만진 이는 함께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또한 그녀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과 정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모든 어려움을 잘 아시면서도 기꺼이 따뜻한 손을 내미셨습니다.
예수님의 분명한 의도가 담긴 행동입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 쯤을 경험하셨을 겁니다. 너무나 외롭고 지칠 때, 누군가 잡아준 손길로 시린 영혼에 온기가 돕니다.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절망으로 무너져 내릴 때 내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로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습니다. 주님께서 굳이 그 여인의 몸에 손을 대신 까닭입니다. 이 순간 그 어떤 복잡한 논리와 설명도 사라집니다. 오로지 뭉클한 사랑만이 마음에 남을 뿐입니다.
그렇게 그녀는 너무나 오랜만에 친근한 온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기도 마땅히 사람으로 대접받아야 할 뜨거운 피와 살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너무나 오랫동안 잊었던 감격스런 진실을 다시금 명확하게 깨달았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 가운데, 열여덟 해 만에 처음으로 몸을 바로 세웠습니다.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자기 눈앞에 선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장면을 가만히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아름다운 찬송입니다. 습관적으로 회당에 모여 아무런 감사 없이 예배하는 사람들은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찬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회복된 자녀가 드리는 진정한 경배입니다. 우리 교회가 예배하며 높여야 할 참된 영광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딸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녀의 존재를 새롭게 하는 중요한 선언을 하셨습니다. 16절 말씀 다 함께 읽겠습니다.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회당장이 당신의 치유를 두고 몹시 화를 내고 비난하자, 도리어 예수님은 그녀를 가리켜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호칭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바로 당시 유대교의 일그러진 신앙을 뒤집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아브라함의 혈통인 자신들에게만 주어졌다고 믿었습니다. 특히나 민족의 위기를 겪으면서 아브라함의 자녀다운 행동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강조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율법을 악용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드러나는 안식일 규정입니다.
그렇다면 회당에 모인 사람들의 눈에 귀신 들린 여인은 결코 구원받은 아브라함의 딸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의 오만을 비틀었습니다. 오히려 그녀야말로 진정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호칭이 신약 성경에서 오직 본문에만 등장합니다. 이와 비슷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도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바로 19장 9절에서 세리장 삭개오를 가리킵니다. 동족의 피를 빨아 로마제국에 아부하는 삭개오 역시 그 시절 유대인들의 눈에는 절대로 구원받을 ‘아브라함의 자손’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이 두 사람에게만 그 영광스러운 호칭을 부여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철저히 외면과 소외를 당했지만, 예수님의 사랑에 안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주님께서는 본문에 기록된 한 가련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어리석은 편견을 넘어서는 무한한 은혜와 평화를 보여 주셨습니다. 진정한 안식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완성이 바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우리가 받은, 우리가 나누어야 할 눈길과 손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감히 여러분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아픔을 다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참 많이 괴로우셨을 겁니다.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굴욕과 좌절 가운데 차가운 멸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여러 모양의 폭력에 무참하게 짓밟히기도 합니다. 그 결과,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흉터를 어루만지며 눈물짓는 경험을 한 번쯤은 하셨을 것입니다. 살아오고 살아내느라 무척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디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눈길과 손길을 건네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본문의 핵심은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고 위중한 질병을 고치는 주님의 신기하고 강력한 이적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깊은 고통 한복판에 찾아오시는 우리 주님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담긴, 온 세상을 품으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참된 회복과 치유를 경험하시길 소망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본받아 주변의 소외된 이웃을 향해 따뜻한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한 사람의 인격과 신앙의 진정한 본색은 그가 다른 이들의 불행을 어떻게 대하는 지를 통해 드러납니다. 믿음을 더욱 온전하게 하려면 내 안의 어리석은 편견과 오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한 겉모습이 아닌 그 내면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주님이 따뜻한 품을 향해 겸손히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죄인을 위해 죽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우리의 굽은 영혼을 참으로 바르게 세워 주실 줄 믿습니다. 그렇게 참으로 새로워지는 은혜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도 주님의 눈길과 손길을 건네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사랑과 나눔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넓혀가는, 주님께서 본을 보이신 온전한 통로입니다.
누가 뭐래도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한 시의 전체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가계(家系)
- 조수순
연분홍 화장지로 우스꽝스럽게 접어 만든
큼지막한 장미 두 송이를 머리에 꽂고
다소곳이 예배당 앞자리에 나와 앉아
울먹이는 목소리로 절절히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설교자의 말 끝마다 아멘으로 화답하는 그녀는
누가 뭐래도 당당한 하나님의 딸이다
그런데
집에서는 천덕꾸러기요
동네에서는 악귀들린 년 혹은 미친년으로 통한다
빈농에서 자라나 이웃 마을 빈농의 총각에게
시집간 지 이레만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새색시 품을 파고드는 신랑에게
갑자기 금침 밑에 감춰둔 식칼을 꺼내 위협하고
시모 밥그릇에 몰래 똥을 누어 조반상에 올려놓아
시집살이 보름도 못 채우고 소박맞은 후
친정 오라비 그늘에 들어 애옥살이하면서
정신병원 근처에도 못 가 본 채
살얼음 잡힌 동네 개천에서 가끔씩 벌거벗고 목욕하다
난폭한 오라비 매질에라도 걸리면
푸른 멍 두드러기 돋아난 얼굴 부끄러워
치렁대는 긴 머리단으로 살포시 가리고
인적 드문 산모롱이를 돌아 예배당으로 오곤 하는데
누가 뭐래도 당당한 하나님의 딸이다
오늘 따라 홍조 띤 얼굴에
큼지막한 장미 두 송이를 머리에 꽂고
다른 하나님의 아들 딸들과 똑같이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주기도문을 읊조리는 그녀는
삶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을 하염없이 헤쳐 가는 기나긴 여정입니다. 그렇게 애쓰는 가운데 때로는 아무에게도 위로와 공감과 도움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면 칠수록 오히려 더 잔인한 폭력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 사랑으로 내미시는 눈길과 손길로 말미암아 참된 희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그 누가 뭐래도 우리는 모두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위대한 사랑의 주 하나님
귀신 들려 오랜 시간 중증 장애로 신음하던 여인을 치유하고 회복시키신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외면과 억압을 당했던 그녀에게 따뜻한 사랑을 건네신 주님의 모습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녀를 ‘아브라함의 딸’로 부르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주시는 위대한 은혜를 바라봅니다. 그러한 주님의 사랑을 통해 절망과 고통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또한 다른 누군가를 복음의 능력으로 회복시키고 일으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