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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 33~43절 "열매 맺는 백성의 주인"

2026-10-04
정대진 목사

*방송 기기 이상으로 영상 녹화가 중단되었습니다.


2026년 10월 4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정대진 목사

마태복음 21장 33~43절 "열매 맺는 백성의 주인"


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우리의 인생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성도님들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무모한 착각

한 가지 상황을 가정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갑자기 해외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예쁘게 가꾼 집을 비워야할 상황입니다. 친한 친구에게 아무 조건 없이 들어와 살라고 제안했습니다. 친구가 고민 끝에 가족과 함께 이사를 왔습니다. 금세 전원주택 생활에 적응했습니다. 정배리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오롯이 만끽합니다. 아이들은 정배초등학교에서 행복한 유년기를 보냅니다.


시간이 흐르며 더욱더 이곳 생활에 익숙해 집니다. 예초기를 돌리고 집 구석구석을 손보기 시작합니다. 세월이 쌓이며 집안 곳곳에 추억도 차곡차곡 채워갔습니다.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습니다. 온 가족이 마을 사람들과 가까워졌습니다. 자녀들은 어느새 자라 양평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주인인 여러분이 외국 생활을 마치고 다시 양평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귀국 소식을 알립니다. 언제까지 집을 비워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친구는 당황하다가 급기야 짜증을 부렸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씩씩거리며 따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 집을 관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소연 합니다. 서종면에 전셋집이 없다고 화를 냅니다. 농어촌 특별 전형을 준비하는 우리 애들 대학 입시는 어떡하냐고 원망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러더니 집 주인이 정배리로 돌아와도 현관 비밀 번호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끝까지 열어주지 않고 집을 차지해 버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떨 것 같으십니까?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없습니다. 물론 그 친구를 아예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닙니다. 정말 자기 집처럼 소중히 가꾸었고 온 가족이 마을에 깊이 뿌리내리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매우 심각하고 어리석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 집의 진짜 주인을 잊어버렸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서 그 집이 익숙하다고 해서 자기 소유가 아닙니다. 주인은 엄연히 따로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등장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기가 거저 받은 은혜를 무시했습니다. 그 대신 무모한 탐욕을 부렸습니다. 그 결과 엄중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본문을 함께 묵상하며 좀 더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거저 받은 포도원

본문 33절 함께 읽겠습니다.


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예수님께서 어떤 비유를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공간 배경으로 ‘포도원’을 등장시키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포도원은 단순한 농장이 아닙니다. 곧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구약 성경의 한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예언자 이사야가 부른 ‘포도원의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진 산에 포도원을 만드셨습니다. 땅을 파고 돌을 골라내셨습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셨습니다. 망대를 세우고 술 틀을 파셨습니다. 이사야는 그 포도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사야 5장 7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포도원은 곧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빚으신 당신의 백성입니다. 예수님의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마태 공동체의 다수를 차지하는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말씀입니다. 주님이 포도원 이야기가 곧, 자기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자연스럽게 깨달았습니다. 귀를 기울여 말씀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먼저, 예수님의 비유에서 주인이 포도원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눈 여겨 봐야 합니다. 다시 33절을 보시면, 주인은 산울타리를 둘렀습니다. 들짐승과 도둑으로부터 지키는 보호막입니다. 그 안에 즙 짜는 틀을 만들었습니다. 수확한 포도를 곧바로 가공할 수 있는 설비입니다. 또한 망대를 지었습니다. 멀리서 다가오는 위험을 미리 살피는 파수대입니다. 고대 농업 사회에서 이 세 가지는 포도원이 제구실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반 시설이었습니다. 이렇게 주인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어 놓고 농부들에게 맡겼습니다.


농부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자기 돈은 단 한 푼도 들이지 않았습니다. 땅을 사지도, 나무를 심지도, 울타리를 치지도 않았습니다. 잘 차려진 일터를 거저 얻었습니다. 그저 성실하게 가꾸고 때가 되면 정해진 몫을 주인에게 드리면 됩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너무나 좋은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를 함축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노예로 살던 이집트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셨습니다. 생명의 진리를 담은 율법을 주시고 성전에 임재 하셨습니다. 구원과 돌봄과 말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살아가며 여러 결핍 가운데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시면 거저 누리는게 훨씬 더 많습니다. 지금 숨을 내쉬며 확인하는 생명, 가족, 건강, 일터, 교회까지 어느 것 하나 내 힘만으로 완전히 만들어 낸 것이 없습니다. 모두 주님께 받은 것입니다. 포도원은 처음부터 우리 것이 아니었습니다.



끝까지 보내시는 주인

하지만 농부들은 무모한 탐욕을 부립니다. 34~36절 함께 읽겠습니다.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열매 거둘 때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냅니다. 지극히 정당한 요구입니다. 그런데 농부들의 반응이 충격적입니다.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칩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의 종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오랜 세월 끊임없이 보내신 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의 운명은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이사야는 전설에 따르면 몸이 톱으로 켜지는 잔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매국노로 몰려 진흙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성전 뜰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열매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이스라엘은 번번이 폭력으로 거부했습니다.


여기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주인이 종들을 계속 보냅니다. 게다가 처음보다 더 많이 보냅니다. 일반 상식으로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파견한 직원들이 맞아 죽었다면 당장 범인들을 고발하고 계약을 해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더 많은 사람을 또 보내는 것은 오늘날 기업 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완벽한 실패이자 무능함입니다. 아무도 이런 주인을 현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비상식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합리적인 지주의 계산법을 보여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셈법을 완전히 뛰어넘는 하나님의 끈질긴 인내를 드러내십니다. 백성이 배신하고 예언자들을 죽였음에도 주님은 심판을 미루십니다. 돌이킬 기회를 거듭 주셨습니다.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상속자를 죽이는 계산

결국 종들을 다 잃은 주인은 마지막 결단을 내립니다. 37절, 새한글성경으로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37 나중에는 농부들한테 자기 아들을 보내며 말했소. ‘내 아들은 존중하겠지.’ 


주인은 마침내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렇게 기대합니다. “내 아들은 존중하겠지”, 여기서 “존중”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존경을 뜻합니다. 아들은 곧 주인 자신을 대신하는 존재입니다. 종들에게는 그토록 잔인했던 농부들이라도 내 아들 앞에서는 달라질 거라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보자마자 흉악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합니다. 38~39절, 화면 보시면서 새한글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38 그러나 그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고서는 자기네끼리 말했소. ‘이자는 상속자다. 자, 그를 죽여 버리자. 그가 물려받을 유산을 우리가 차지하자.’ 39 그러고는 농부들이 그 아들을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내쫓아 죽여 버렸소.


농부들은 서로 음흉하게 눈짓하며 이렇게 속삭입니다. ‘이자는 상속자다. 자, 그를 죽여 버리자. 그가 물려받을 유산을 우리가 차지하자.’ 얼핏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포도원의 상속자를 죽인다고 해서 그 땅이 농부들의 것이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현대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무모한 범죄입니다.


관련해서 당시 관습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주인이 먼 나라에서 오랫동안 오지 않고 상속자마저 없다면, 그 땅은 임자 없는 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땅은 먼저 눌러 앉은 사람이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이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지레짐작했습니다. 유일한 상속자만 없애면 포도원이 완전히 자기들 것이 될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우발적 범죄가 아니라 치밀하게 꾸민 강도짓 입니다.


결국 농부들의 손에 주인의 아들은 숨을 거두고 맙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탐욕의 과정을 확인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주인에게 바쳐야 할 열매가 아까웠습니다. 그 아까움이 종을 때리는 폭력이 되었습니다. 폭력은 살인으로 번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인 아들 목숨까지 무참히 해쳤습니다. 내 것이 아닌 걸 내 것으로 여기며 움켜쥐려는 욕망이 얼마나 파국으로 몰아 넣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이 장면을 묘사하는 문장을 주목해야 합니다. 마태는 농부들이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였다고 기록합니다.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며칠 뒤 예수님은 마치 이 이야기 속의 아들처럼,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로 끌려 나가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죽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곧 그 아들이며, 어떻게 죽으실지를 미리 말씀 하셨습니다.



스스로 내린 선고

그런 다음 예수님은 비유를 마치시고 듣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불쑥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41절을 새한글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41 그들이 예수님께 대답한다. “못된 농부들을 사정없이 없애 버리고, 그 포도밭은 다른 농부들에게 내줄 것이오. 열매 거둘 때에 포도밭 주인에게 그 몫을 건네줄 사람들에게 말이오.”


그들은 지금까지 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남의 이야기로 여겼습니다. 자신들과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주저 없이 정답을 외칩니다. 그들을 심판하고 신실한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밭을 대신 맡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 악한 농부는 바로 자신들이었습니다. 스스로 자기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이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소리친, ‘못된 사람들을 사정없이 없애버리라’는 문장을 헬라어로 읽으면 <카쿠스 카코스 아폴레세이>입니다. <카쿠스>는 ‘악한 사람들’, <카코스>는 ‘비참하게’라는 뜻입니다. 풀이하면 ‘악한 자들을 그 악함에 걸맞게 비참하게 멸망시킬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발음이 거의 같은 두 단어가 나란히 놓여 운율을 이룹니다. 


그 시대 사람들 대부분은 글을 알지 못했습니다. 문자보다는 압도적으로 말로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런 구술 문화 속에서 <카쿠스 카코스>라는 이 짧은 운율은 듣는 사람의 귀에 박혀 쉽게 잊히지 않았습니다. 이 구절이 낭독될 때마다 심판의 철저함이 입에서 입으로 강렬하게 전해졌습니다.



버려진 돌, 머릿돌

그렇다면 스스로 심판을 선언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42절을 새한글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42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당신들은 성경에서 이런 것을 읽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소?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 바로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님에게서 비롯되었다, 이 일은. 놀랍다, 우리 보기에는!’


예수님은 불쑥 시편 118편을 인용하셨습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을 언급하십니다. 포도원 농사를 이야기 하다가 느닷없이 건축 현장으로 장면이 바뀝니다. 엉뚱하게 흐름이 끊기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 구절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등장하는 주요 단어의 히브리어 발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돌’은 <에벤>입니다. “에벤에셀”할 때 그 “에벤”입니다. 그리고 아들은 <벤>입니다. 두 단어가 글자 하나 차이이고 소리는 거의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단어를 일부러 겹쳐 놓으셨습니다. 너희가 포도원 밖으로 내다 버린 아들, 곧 ‘벤’이, 하나님께서 새 집을 지으시려고 택하신 머릿돌, 즉  벤’이 된다는 선언입니다.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던져 버린 돌이 건물 전체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입니다. 버림받은 아들 ‘벤’이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이루는 ‘에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흘 만에 그분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농부들의 살인은 암울한 비극으로 끝을 맺지 않았습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을 구원의 든든한 도구로 바꾸셨습니다.


우리가 거듭 명심해야 할 생명의 진리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죽어도 죽는 게 아닙니다. 살아가며 겪는 그 어떤 절망과 좌절도 결코 우리 삶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자녀들을 덮친 어떠한 아픔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서 눈부신 영광으로 찬란하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열매 맺는 백성

따라서 구원 받은 백성으로서 감당해야 할 소중할 사명을 말씀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43절 함께 읽겠습니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예수님께서 최종 결론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것처럼 움켜쥐었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빼앗기고 맙니다. 대신 그 나라는 ‘열매 맺는 백성’이 받습니다. 출신과 지역과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어진 단 하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이 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하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포도원을 맡기신 새로운 농부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소중한 정체성을 마음 깊이 품고 자부심을 지녀야 합니다.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인생의 포도원 주인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맡은 것을 탐욕으로 움켜쥐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드러내고 내 업적을 드높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기꺼이 내려놓고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 향기로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마이클 패러데이

관련해서 훌륭한 모범이 되는 한 인물을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바로 과학자 마이클 페러데이입니다. 패러데이는 1791년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병약한 대장장이였습니다. 집안은 가난했고 학교 교육은 읽기와 쓰기와 기본적인 산수가 전부였습니다. 열세 살에 책방 심부름꾼으로 들어갔고 이듬해 제본공 견습생이 되었습니다. 거기서 만드는 책을 열심히 읽으며 홀로 과학을 익혔습니다. 그러다가 열정을 인정받아 스물두 살에 왕립연구소의 말단 실험 조수로 채용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1831년에 역사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바로 “전자기 유도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과학을 잘 모릅니다. 패러데이가 발견한 이 현상이 정확히 어떤 원리인지 정확히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활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전기와 전파, 음향과 방송 모두가 이 과학 현상에 근거합니다.


패러데이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막대한 이익과 명예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업과 정부에서 제공하는 막대한 금액의 자문료를 포기했습니다. 위대한 발견으로 이름이 알려진 후에도, 보수가 적은 왕립연구소의 업무에만 집중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왕립학회 회장직과 왕립 연구소 소장 자리도 거절했습니다. 


도저히 믿기 힘든 너무나 고결한 인격입니다. 무엇이 그를 탐욕의 마력에서 구했을까요? 바로 신앙입니다. 패러데이는 손해와 어려움에도 소수 교파에 소속한 작은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는 이 교회의 장로로 세워져 말씀을 전하고 교인들을 심방하며 돌보았습니다. 복음을 통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고 집착하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묵묵히 실천했습니다.


패러데이에게 과학은 성공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을 가꾸는 일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와 재능을 아낌없이 나누었습니다. 매년 성탄절마다 자기처럼 가난하고 어렵게 자란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공개 강연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영국 왕립 연구소의 위대한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가득 맺다가 삶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포도원을 맡은 청지기로서 겸손을 끝까지 잃지 않았습니다.


패러데이의 첫 전기 작가인 벤스 존스는 그의 삶과 신앙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신문 배달 소년이었던 사람이 세계 모든 과학계가 줄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예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받았다는 것, 여러 해 동안 정부 각 부처가 끊임없이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는 것, 자기 나라와 다른 나라의 왕족들이 그를 찾았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그는 교만해지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늘 새로운 겸손이 솟아나는 살아 있는 뿌리였다. 그 겸손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명성과 함께 자라났고, 그의 영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함께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는 생애 마지막까지 가장 겸손한, 그러면서도 가장 열정적이고 가장 진실하며 가장 친절한 실험철학자였다.”



주인께 돌려드리는 현관문

설교를 시작하며 드린 이야기를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거저 베푼 집을 친구가 자기 것으로 여기며 고집부리며 문을 열어주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집 주인 입장에서 내 손해만 떠올리며 쉽게 화를 냅니다. 하지만 정직히 돌아봐야 합니다. 바로 나 자신이 그 친구와 같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외없이 어리석고 연약한 죄인이어서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밀어내고자 몸부림칩니다.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포도원의 어리석은 농부와 같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께서 버림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온 세상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그 돌 위에 세워진 새 백성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결단해야 합니다. 인생의 현관 문을 참 주인에게 열어드려야 합니다. 내 이름표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이름을 선명하게 새겨야 합니다. 그런 자녀들의 포도원에 주님께서 비추시는 햇볕과 때마다 내리는 비를 통해 향기로운 열매로 가득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으로서 인생의 진정한 주인을 올바로 깨닫고 고백하며 따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포도원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

저희에게 맡기신 모든 것이 본래 주님의 것임을 고백합니다. 거저 받은 은혜를 내 것이라 우기며 주님의 자리에 앉으려 했던 교만을 회개합니다. 종들을 비롯해 아들까지 보내시며 끝까지 기다리신 그 인내 앞에 엎드립니다. 

버려진 돌을 머릿돌로 삼으신 주님, 그 위에 세워진 열매 맺는 백성으로 저희를 불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삶의 주권을 주님께 돌려드리게 하옵소서. 제 때에 열매를 바치는 신실한 청지기로 살게 하옵소서. 정배교회가 이 땅에서 향긋한 열매 맺는 백성의 공동체로 든든히 서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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