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6장 1~14절 “엘 로이, 살피시는 하나님”
2026년 6월 14일, 성령강림절 후 셋째 주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6장 1~14절 “엘 로이, 살피시는 하나님”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도망치는 임신부
한 여인이 도망칩니다. 하지만 마음대로 내달릴 수는 없습니다. 몸이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홀몸이 아닙니다. 몸 안에 생명이 자라 배가 불러옵니다. 한 곳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힘듭니다. 그럼에도 이를 앙다물고 황급히 광야를 가로지릅니다. ‘임신부 도망자’, 이렇게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한 인간이 경험하는 극한 고통입니다. 바로 하갈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어쩌다 이런 상황에 몰리게 되었을까요? 시작은 사래의 오랜 난임입니다. 그녀는 고민 끝에 당시 관습을 따릅니다. 이집트 출신 여종 하갈을 남편과 동침하게 합니다. 그 결과 하갈이 주인의 아이를 임신 했습니다. 그 후 갈등이 폭발합니다. 하갈은 점점 불러오는 배에 손을 얹으며 여주인을 멸시했습니다. 그러자 사래는 아브람을 향해 분노를 쏟아냅니다. 이때 아브람의 반응을 확인해야 합니다. 본문 6절 함께 읽겠습니다.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면 잔인한 여주인과 버릇없는 여종 사이의 다툼입니다. 하지만 문제 핵심은 아브람의 방임과 직무 유기입니다. 그는 두 여인 사이에서 잘못된 태도를 유지하였습니다. 아내와 마찬가지로 하갈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가리켜 “당신의 여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자기 아이를 밴 여성을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사래가 어떤 폭력을 저지를지 뻔히 알면서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가 하갈을 학대하였습니다. 여기서 “학대”로 옮긴 히브리어는 <아나>입니다.
이 동사는 출애굽기에서 이집트인들이 히브리 노예에게 행한 “학대”를 묘사할 때 등장합니다(출 1:11~12). 신명기에서 이집트에서 보낸 고통스러운 과거를 회상할 때도 나옵니다(신 26:6~7). 창세기 저자의 치밀한 단어 선택입니다. 하갈이 겪은, 도무지 감당 못 할 고통을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마치 채찍질을 당하며 중노동에 시달리는 비천한 노예와 같은 신세입니다.
경계로 찾아오시다
하갈은 결국 도망칩니다. 7절을 보면 이 때 그녀가 지나는 장소를 언급합니다. 바로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입니다. 가볍게 넘길 내용이 아닙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지리 정보를 차근히 확인해야 합니다. 광야를 지나는 여행자들은 당연하게도 ‘샘물’, 즉 오아시스를 따라 이동했습니다. 하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 마침내 ‘술 길’, 즉 ‘술’이라는 이름을 지닌 지역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집트 고대 문서에 따르면 그곳은 특별한 지역입니다. 시내 반도와 이집트를 가로지르는 군부대 담장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술 길’에서 ‘술’은 ‘장벽’을 의미합니다. 거대한 국경 마을인 그곳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면 이집트 영토입니다. 아마도 하갈은 자기 고향인 그 땅으로 넘어 가려고 했을 겁니다. 친숙하고 풍요로운 제국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북쪽으로 다시 돌아가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살고 있는 가나안 땅입니다. 하갈은 지금 그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그녀는 거기서 뜻밖의 만남을 경험합니다. 바로 ‘여호와의 사자’ 즉, ‘천사’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동사 ‘만나다’를 개역개정 성경은 우리말 어순에 따라 가장 뒤에 배치 했습니다. 하지만 구약 원문에는 7절을 시작하며 접속사와 함께 곧바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만났다.”라는 뜻입니다. 6절 마지막 문장과 연결하면 이렇습니다.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그리고 만났다.’ 야훼의 천사가” 겁에 질린 채 무거운 몸으로 허겁지겁 도망치는 하갈을 향한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여기서 ‘만나다’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의 뿌리는 <마짜>입니다. ‘찾다’라는 뜻입니다. 보통 사람이 무언가를 찾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처럼 ‘하나님이 누군가를 찾을 때’ 나오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게다가 찾는 대상이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사람을 샅샅이 찾는다’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참조, 시 89:20).
매우 의미심장한 사실을 확인합니다. 주님은 극심한 고난을 당하는 하갈의 상황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뒤뚱거리는 채로 바삐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모른 척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양을 찾아 근심 가득한 얼굴로 헤매던 목자처럼, 헐레벌떡 달려가 하갈을 부둥켜 안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하갈을 발견하는 장소인 ‘샘물’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지켜보는 눈’이라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상당히 오묘하고 역설적입니다. 그녀는 사람의 눈을 피해 도망쳐 숨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하나님이 지켜보십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깨닫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어디에도 주님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급히 찾아오십니다. 영혼 깊은 아픔을 모조리 들여다 보십니다. 그 사랑을 믿고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또 다시 고통으로
이후 펼쳐진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8절 함께 읽겠습니다.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외치셨습니다. “하갈아!”. 얼핏 평범한 호칭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여성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네는 유일한 장면입니다. 다른 고대 서아시아 문헌에서도 거의 찾아보기 힘든, 매우 드문 기록입니다. 그녀의 주인 사라도 경험하지 못한 영광입니다. 드보라, 한나, 에스더와 같은 쟁쟁한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6절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에게 하갈은 단지 자손을 낳기 위해서만 필요한, 이름 없는 이용 대상에 불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녀를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런 다음 주님은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갈이 대답합니다. “나의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지금 하갈이 경험하는 끔찍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짧은 문장 안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하갈이 원해서 아브라함의 아기를 가진 게 아닙니다. 힘없는 여종의 뜻과 무관하게, 나이 든 주인 어르신과 마님이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임신 사실을 알고 우쭐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잠시 정신을 놓았습니다. 그 전에는 하늘처럼 떠받들었던 사래가 어느 순간 우스워 보였습니다. 젊은 자신과 다른, 여주인의 늙고 주름진 몸이 만만해 보였습니다. 겁 없이 깔보았습니다.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겁에 질린 채, 아기를 밴 몸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 상황 자체가 고대 사회에서는 도무지 살아날 길이 없는, 죽음과 절망입니다.
천사는 하갈과 대화를 나누며 이 사실을 그녀에게 다시 확인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셔야 할까요? 하갈은 물론이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예상합니다. 그녀를 힘들게 했던 상황에서 한순간에 벗어나 안락한 길을 열어줄 것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자(使者)는 전혀 뜻밖의 말씀을 전합니다. 9절 함께 읽겠습니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9절 후반부를 원문에서 곧바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그녀의 손 아래에서 스스로 고통을 견뎌내라”(김세권 옮김)
이 말씀이 하갈에게 어떻게 들렸을까요? 너무나 괴로웠을 겁니다. 어쩌면 또 다른 ‘학대’로 느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탈출을 돕지 않으셨습니다. 극적인 해방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고통스러운 현실로, 그녀를 괴롭힌 악한 사람에게로 다시 돌려 보내십니다. 하갈이 겪었던 폭력에 눈을 감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나 실망스러운, 무심한 말로 들립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떨 것 같으십니까? 하나님께서 가혹한 시련에 무너진 나를 찾아오시며 따뜻하게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 주님 품에 안겨 온갖 아픔을 토로합니다. 병든 몸이 얼른 낫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어려운 경제 사정이 속히 안정을 찾게 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자녀들이 겪는 방황이 빨리 끝나도록 매달립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위기에서 구출해 주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험악한 현실을 계속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시련을 넘어서는 계획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은 왜 이렇게 냉정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불의와 폭력을 인정하고 무작정 미련하게 참으라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눈앞의 시련을 넘어서는, 크고 놀라운 뜻을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10~11절 함께 읽겠습니다.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분명 고통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갈은 나중에 다시 한번 더 쫓겨났습니다. 게다가 그때는 아들 이스마엘도 함께 버려집니다(창 21:14). 자식이 숨을 거두는 모습 차마 쳐다볼 수 없어 멀리 떨어져 엉엉 웁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한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고난을 딛고 일어서는 찬란한 은혜와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녀의 고통을’ 들으십니다. 처절하게 내뱉은 탄식에 응답하십니다. 이겨낼 힘과 용기를 담아 약속하십니다. 그녀 뱃속에 있는 이스마엘이 수를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낳아 번성할 겁니다. 아픔을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주한 끝에 거둔 눈부신 결실입니다.
옛날 사람들에게 자녀가 주는 상징성은 지금 우리와 많이 다릅니다. 아기는 단지 사랑스런 가족, 혹은 대를 잇는 자손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가장 소중한 희망입니다. 신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 생생한 증거입니다(참조, 시 127:3~5). 사람들 눈에 하갈은 목숨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학대를 당한, 별 볼 일 없는 이방인 여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이야기 중심에서 벗어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녀의 고통을 들으셨습니다. 이름을 부르시며 가까이 다가오셔서 말을 건네셨습니다. 그녀가 아브라함 못지 않게 의미 있고 소중한 존재임을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성경 속 그 어떤 본문 못지않게 주님의 사랑이 매우 눈부시고 빛나는 장면입니다.
흔히 구약 성경을 유대인만을 위한 복음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해, 1세기 교회 바울의 대적자들이 그러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정통에서 벗어난 불편한 존재로 여기고 무시합니다. 하지만 본문 말씀을 통해 분명히 확인합니다. 우리 주님의 품은 너무나 크고 넓습니다. 협소하고 어리석은 기준으로 함부로 사람들을 나누고 판단하고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넉넉히 끌어 안으십니다. 창세기는 종교의 형식과 전통을 훌쩍 뛰어넘는, 너무나 놀라운 복음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런 까닭에 하갈은 이렇게 위대한 고백을 남깁니다.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엘 로이, 살피시는 하나님
하갈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바로 “살피시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여러 이름이 등장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을 향해 직접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합니다. 땅이나 제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부릅니다. 가령 지난 주에 함께 읽은 창세기 22장 14절에서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숫양을 바친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릅니다(창 22:14). 모세는 아말렉과 벌인 전투에서 승리한 후 쌓은 제단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부릅니다(출 17:15). 기드온 역시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을 타작하다가 만난 하나님께 쌓은 제단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부릅니다(삿 6:24).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름’의 무게감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가장 내밀한 인격과 본성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감히 신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십계명 3계명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명령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하갈은 주님을 향해 자기 고백을 담아 직접 이름을 지어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유일한 장면입니다. 율법주의의 삭막한 틀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너무나 친밀한 교제입니다. 어쩌면 이방인이기에 가능한 자유로움과 유연함 입니다. 지나친 엄숙을 극복하는 생생한 신앙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런데 13절 앞부분에 “살피시는 하나님”으로 옮긴 히브리어 <엘 로이>의 뜻은 이중적입니다. 우선 “보이실 수 있는 하나님”, 즉 ‘내가 본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보시는 하나님”, 즉 ‘나를 보신 하나님’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 분명히 맞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상당히 모호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갈이 자기가 붙인 하나님의 이름을 설명하는 13절 뒷부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의 히브리어 문장도 무척 복잡합니다. 원문에서 곧바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내가 또한/ 심지어 여기서 나를 감찰하는 분의 등을/ 뒤를 보았습니까?”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모호한 문장입니다. 그녀가 하나님을 뵈었고, 그분도 그녀를 보았다는 의미를 둘 다 함께 포함합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힘겨운 고난에 지친 하갈은 ‘나를 살펴보시는 분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과 따스하고 친밀한 눈 맞춤을 이루었습니다. 주님의 시선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갈은 이 사실을 감격에 겨워 거듭 강조합니다.
하갈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기를 향한 놀라운 은혜가 임한 장소인 그 샘물의 이름을 새롭게 부릅니다. 바로 “브엘라해로이”입니다. “‘나를 본’ 살아 계신 자에게 속하는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분명히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내가 본’ 살아 있는 자에 속한 우물”이라고 지칭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보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물의 이름을 지으며 절절히 고백합니다.
하갈은 특별한 사건을 경험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거창한 체험을 내세우며 우쭐거리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광야로 도망친 초라한 임신부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높여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께서 약속 하신대로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15~16절). 하갈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하던 비참한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향해 다가오신 하나님의 눈길이 놀라운 회복과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마침 지난 주에 함께 묵상한 ‘야훼 이레’, “보시는 하나님”과 매우 비슷한 진리를 거듭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본문 뿐만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생생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갈과 같은 처지에 놓일 때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살펴 보십니다. 그 시선에 눈길을 맞추시길 바랍니다. 그 순간이 바로 참으로 다시 일어나 참된 은총의 샘물을 마실 때이기 때문입니다.
돌봄 받은 여종의 순종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신약 성경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나 이렇게 외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눅 1:30). 창세기 21장에서 어린 이스마엘과 함께 도망친 하갈을 향해 하신 말씀과 똑같습니다. 그런 다음 천사는 오래전 하갈에게 그러했듯이, 마리아에게도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 알려줍니다. 이어서 그 이름을 알려줍니다. 성경에서 오직 이 두 장면에서만 등장하는 모습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장 48절 화면 보시면서 함께 읽겠습니다.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리아는 자기를 가리켜 주님의 “여종”이라 소개합니다. 그런 자신의 비천함을 하나님께서 ‘돌보셨다’고 찬양합니다. 창세기에서 반복적으로 “여종”으로 언급된 하갈이 “엘 로이”, ‘살피시는 하나님’을 고백한 것과 똑같습니다. 그 옛날 천대 받던 이방 여인이 무거운 몸으로 광야로 쫓겨나 만난 주님의 이름이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 너무나 아름답게 반복되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앞서 마리아는 눈부신 고백을 합니다. 누가복음 1장 38절 함께 읽겠습니다.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자기의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히 경험한 사람의 반응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게서 이루어지도록 순종합니다. 마리아에게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몸으로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위험천만한 사명입니다. 감당하기 벅찬 힘겨운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움을 이겨내며 자신에게 주어진 부르심을 따랐습니다. 그런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살펴보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올라 숨을 거두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을 들으시고 살피시는 주님의 눈길이 하갈과 마리아를 거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마음 깊이 품으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동시에 주의해야 합니다. 단지 지금 겪는 아픔을 이겨낼 값싼 위로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힘겨운 현실을 잊을 마취제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담긴 사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위를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여러 모양의 학대 당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 광야 위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을 끌어 안아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돌보시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통해 신실하신 주님의 말씀이 양평과 대한민국을 넘어 온 세계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엘 로이”,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엘 로이, 살피시는 하나님.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해 달아난 하갈에게 찾아오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마음에 새깁니다. 자신을 ‘여종’이라 고백하는 마리아의 비천함을 돌보신 위대한 은혜를 바라봅니다. 저희의 모든 아픔을 들으시고 힘겨운 눈물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언약을 사모합니다. 주님과 함께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갈 고달픈 현실을 살아갈 용기를 주시옵소서. 화려한 신기루에서 벗어나 은혜가 피어오르는 광야를 향해 걸음을 내딛게 하여 주시옵소서. 학대당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눈길을 전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