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장 1~14절 “하나님의 이름들1 – 야훼 이레”
2026년 6월 7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22장 1~14절 “하나님의 이름들1 – 야훼 이레”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우리를 지켜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날마다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 잠깐 설교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12월 대림절부터 삼위일체주일까지, 대략 6개월 간은 교회력을 따라 절기에 맞춰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기간에는 강해 혹은 주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부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들”을 주제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제 책에 쓴 내용을 보강하고,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이름들도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참고로 하나님의 이름들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은 이번 주 수요 성경공부 시간에 특강 형식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꼭 참석하시거나 유튜브 동영상 확인 부탁드립니다.
잔인하게 치밀하게
때로 어떤 만남은 성경을 보는 눈을 전혀 다르게 만듭니다. 저에게는 아들이 그랬습니다. 여러 차례 말씀 드린대로 저는 결혼하고 8년 만에 아빠가 되었습니다. 살짝 아브라함 될 뻔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고 영롱한 눈망울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성경 속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모습입니다. 아버지 입장에서 새삼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혹여 자식이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도 감당하기 벅찹니다. 하물며 아들의 심장에 칼을 겨누는 아비의 심정은 도무지 상상하지 못할 고통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토록 끔찍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본문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먼저 본문을 여는 표현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그 일 후에” 입니다.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그 일’이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기까지 지나온 모든 긴 여정을 가리킵니다. 이름을 이어줄 아들이 없다는 끔찍한 고통과 괴로운 기대 그리고 이스마엘이 먼저 태어나고 겪은 심각한 갈등을 거쳐 기적처럼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 모든 사건이 펼쳐진 다음에 주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런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제물로 다 태워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2절 앞부분을 구약 원문에서 단어 순서를 따라 곧바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당장 데려가라! 네 아들을, 유일한 그를, 곧 네가 사랑하는, 이삭을”
너무나 치밀하면서 잔인한 요구입니다. 하나님은 덤덤히 ‘아들’을 혹은 ‘이삭’만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삭에 대한 정보를 굳이 구체적으로 나열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유일한 아들일 뿐만 아니라 무척 사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짚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불태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장면이 어떻게 다가오십니까? 충격 그 자체입니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이미 잘 아는 이 사건의 결말과 의미를 잠시 치워보겠습니다. 이 구절만 떼어놓고 보면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울컥하는 목소리를 삼키며,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는가?”를 자연스럽게 묻게 합니다. 주님의 선하신 성품과 사랑에 의문을 품게 합니다.
싸늘한 기시감
그런데 과연 아브라함도 지금 우리처럼 충격을 받았을까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아브라함 역시 무척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처럼’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 시절 신에게 장남을 바치는, 이른바 ‘인신 제사’는 가나안에서 익숙한 관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관련 유물과 기록이 지금까지도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토록 끔찍한 일이 어떻게 가능 했을까요? 고대 세계에서 제사는 일종의 거래입니다. 신에게 정성을 바친 만큼 거대한 보상을 기대했습니다. 자식은 극상의 제물입니다. 개인과 나라의 중대사를 앞두고 바칠 만한 거래 대상입니다. 물론 보편타당한 인권에 어긋납니다. 어떤 설명도 현대인의 충격을 완전히 해소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속 옛 사람들에게는 그 비극 또한 삶의 일부였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을 도무지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묵직한 이물감 하나가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았습니다. 바로 혼돈입니다. 아브라함은 당시에 이미 거대한 규모를 갖춘 풍요로운 도시, 갈대아 우르 출신이었습니다. 찬란한 문명의 중심에는 화려한 종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야훼 하나님을 만나 과감히 고향을 떠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창세기 18장 19절에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여느 거짓 우상들과는 전혀 다른, “옳고 바른”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듣고 어쩌면 이렇게 중얼거렸을지도 모릅니다. ‘아, 야훼께서도 다른 신들과 같구나.’ 도무지 벗어날 길 없는, 깊고 깊은 절망과 실망이 그를 짓눌렀습니다. 주님의 성품이 모호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거센 파도가 내면을 덮쳤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복잡한 마음으로 무거운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비로소 눈을 들다.
본문 4절은 그가 모리아 산으로 향하는 여정을 인상적으로 기록합니다. 이렇게 다시 옮길 수 있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삼 일째 되는 날에 아브라함이 비로소 그의 눈을 들었다. 그리고 멀리 있는 그곳을 바라보았다.(김세권 옮김)
여기서 ‘눈을 들었다’를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과거에 한 번 했던 행동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길을 떠나 사흘째 되는 날에 ‘비로소’ 눈을 들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문자 그대로 내내 땅만 쳐다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문법 사용은 그의 내면을 가득 채운 갈등과 고통을 세심하게 표현합니다. 도저히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시선을 회피했습니다. 힘없이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며 모리아 산으로 향했습니다. 거부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 나름의 저항이었습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잠시도 견디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무려 사흘입니다. 성경에서 삼 일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고통이 무르익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깊은 절망 속에서 무언가가 바뀌는 나날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서 삼 일을 지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 역시 아픔 속에 사흘을 걸었습니다. 그의 영혼 깊이 수많은 질문과 고뇌가 하염없이 소용돌이쳤습니다.
어떤 대화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습니다. 이젠 물러설 수 없습니다. 음침하게 자기를 내려다 보는 산을 올라가야 합니다. 동행한 종들에게는 나귀와 함께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아들과 단둘이 산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을 6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여기에 제사용품 세 가지가 등장합니다. 번제 나무와 불과 칼입니다. 레위기 제사법에 따르면 번제는 단순히 제물을 태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제사장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당사자가 칼로 제물을 조각내야 합니다(레 1:5-9).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이 모리아 산을 오르는 모습은 인생의 온갖 비극을 하나로 뭉친 장면입니다. 아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불사를 나무를 어깨에 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숨을 끊고 시신을 토막 낼 칼을 손에 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제물로 바친 자식을 남김없이 태울 불씨를 챙겼습니다.
이때 이삭은 과연 몇 살이었을까요? 유대교 전통은 37세로 추정합니다. 물론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시신을 완전히 태우려 상당히 많은 장작이 필요합니다. 이삭은 그 모두를 짊어질 만큼 장성했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기력이 쇠한 노인입니다. 이삭은 연로한 아버지를 무시하며 얼마든지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순종합니다. 그 결과 이삭은 이 사건의 또 다른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본문은 두 사람이 나눈 슬픈 대화를 들려줍니다. 7절 제가 읽겠습니다.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삭이 부릅니다. “내 아버지여.”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서로를 향한 호칭에서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지닌 자부심과 신뢰가 스며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힘겹게 이삭의 아버지가 되기까지 펼쳐졌던 가슴 저린 이야기가 녹아 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둘 사이에 가득 쌓인 추억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통해 창세기는 부자지간의 애틋한 정서를 더욱더 또렷하게 부각합니다.
그런 다음 이삭은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생긴 의문을 꺼냅니다.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 차마 종들 앞에서 묻지 못한 질문입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은 묵묵히 내딛던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제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차가운 진실을 모두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신음하듯 대답합니다. 8절 함께 읽겠습니다.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문장은 사실 해석하기가 모호합니다. 방금 읽은 개역개정성경은 “내 아들아”를 아버지가 아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이해했습니다. 여기에는 혹시나 주님이 제물을 준비하실 수 있다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번역입니다. 하지만 원문을 보면 단순하지 않습니다. 해당하는 부분을 어순대로 곧바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몸소 봐 놓으실 거야. 다 태우는 제사를 위한 어린 양을. 내 아들을”
이렇게 보면 “내 아들”이 제물로 바칠 “어린 양” 뒤에 붙어 있습니다. 이러한 단어 위치로 보면 내 아들, 즉 이삭을 어린 양과 같은 대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번제를 위한 어린 양으로 내 아들을 준비하실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이 맞을까요? ‘내 아들’은 이삭을 부르는 호칭일까요? 아니면 이삭이 제물로 바쳐질 거라는 암시일까요? 약간의 논쟁은 있지만 두 가지 번역이 모두 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마도 일부러 모호하게 대답했을 겁니다. 여기에 그의 힘겨운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보시고 보이시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마침내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제단을 쌓습니다. 이삭이 지고 온 장작을 그 위에 벌여놓습니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이 아들을 결박합니다. 여기서 ‘결박’으로 옮긴 히브리어는 <아케다>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22장에 기록된 ‘이삭의 번제 사건’ 전체를 가리키는 별칭이 되었습니다.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주름진 떨리는 손으로 아들을 힘껏 묶으며 자기 마음 또한 꽁꽁 싸맵니다. 아들은 글썽이는 아버지의 눈망울을 애써 외면하며 도무지 이해할 길 없는 비극에 묵묵히 동참합니다. 상상만 해도 숨이 멎을 것 같습니다. 이 순간 두 사람은 인생의 거친 물살에 휩쓸려 이유 없이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을 대표합니다.
비극은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움켜쥡니다. 아들이 고통 없이 숨을 거두도록 미리 생각해 두었던 급소를 노려봅니다. 이윽고 절규하며 칼을 내리꽂습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천사가 황급히 그를 부르며 행동을 멈추게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외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은’ 그의 행동을 칭찬합니다. 이어서 아브라함은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을 발견했습니다. 아들 대신 그 숫양을 번제로 드립니다. 그때 이 모든 사건을 정리하는 주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브라함은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 즉 ‘야훼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정확히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 펼쳐진, 그 땅에 임하신 주님을 향한 생생한 신앙 고백입니다. 여기서 ‘이레’는 히브리어 <이르에>의 우리말 음역입니다. ‘이레’라는 말의 뜻을 대부분 잘 아실 겁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면 거의 자동으로 ‘준비하다.’ 혹은 ‘예비하다’라는 답이 나옵니다. 본문 흐름에서 자연스러운 해석입니다. 이삭을 대신해 제물로 바칠 숫양을 미리 마련하신 주님의 은혜를 잘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실 조금 아쉬운 번역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어 동사 <이르에>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보다’입니다. 14절에서 ‘야훼 이레(이르에)’는 ‘주님이 보신다’로, ‘준비’(예라에)는 ‘(주님이) 보이신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준비와 공급은 그 결과입니다. 그 전에 눈길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을 향한 주님의 시선을 마음에 품고 그 잔인한 시간을 돌이켜 봐야 합니다. 그래야 ‘야훼 이레’에 담긴 은혜를 더욱 온전히 마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명령에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보셨습니다. 당신을 향한 실망감에 사무쳐 깊은 밤 장막 밖을 스산하게 서성이는 그를 보셨습니다. 불안한 눈동자로 의아하게 쳐다보는 사라를 애써 외면하며, 이삭과 함께 길을 나서는 그를 보셨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서늘한 침묵을 이겨내며 걸음을 옮기는 그를 보셨습니다. 이삭과 마지막일지 모르는 애틋한 대화를 떨리는 목소리로 나누는 그를 보셨습니다. 제단을 쌓고 나무 장작을 펼쳐 놓고 자기 자식을 묶는 그를 보셨습니다. 마침내 울부짖으며 이삭을 칼로 찌르려는 그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당신을 보이셨습니다.
뒤바뀐 시선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주기 위해 먼저 무언가를 드러내 보입니다. 쓸모 있는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결과를 우선 들이밀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법칙입니다. 부모님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 설레는 표정으로 상장을 들고 갑니다. 직장 상사에게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실적을 쌓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어느샌가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뭔가를 주님께 보여드려야, 그런 우리를 살펴보실 거라 착각합니다. 목이 터져라 열심히 기도하고, 지나치게 많은 헌금을 하고, 몸이 부서져라 봉사합니다. 완고한 율법주의로 자기를 몰아 붙입니다. 그런 내 열정을 하나님이 알아보시고 특별한 복을 선물하실 거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모리아산은 사람들이 헛되게 만든 공식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아직 제물을 바치기 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걸 보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을 증명하기 전에 숫양은 이미 수풀에 놓여 있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그가 집을 나서기 전에 놀라운 은혜를 미리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눈길은 우리가 완벽하게 준비 될 때 다가오는 게 아닙니다. 여전히 근심에 힘겨워 하며 휘청거릴 때, 인생의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한 채 힘없이 터덜터덜 걷는 그 길 위에 이미 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야훼 이레’라는,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놀라운 이름에 담긴 찬란한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초인적인 믿음을 인정받아 하나님께서 보상하신 게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목적은 아브라함의 영웅적 의지를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단순히 그가 얼마나 철저히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복종했는지를 기록한 게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하나님에게 보시고, 보이시고, 필요한 도움을 보내신다는 복음이 핵심입니다.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시는 주님은 우상들과 비슷해 보였습니다. 그들과 같은 명령으로 아브라함을 혼란에 밀어 넣었습니다. 하지만 고뇌의 한복판에서, 그 깊은 절망을 통해 눈부신 진리가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분명 우상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무고한 생명이 억울하게 피 흘리는 비극을 절대로 가만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단호한 명령을 남기셨습니다. 레위기 20장 1~3절을 새한글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해 주어라. ‘이스라엘 사람이든 이스라엘에 머무르는 나그네든, 자식을 몰렉에게 바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 땅의 백성이 그를 돌로 쳐 죽여야 한다. 3 바로 내가 내 얼굴이 그 사람한테로 향하게 하고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잘라 내 버릴 것이다. 그가 자식을 몰렉에게 바쳐 나의 거룩한곳(성소)을 더럽히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욕보였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분명히 명령하십니다. 자식을 우상에게 바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당신이 그런 잔혹한 거짓 신이 아니라는 확고한 선언입니다. 모리산에서 황급히 아브라함을 막으시고 들려주신, 주님의 참된 본마음입니다.
골고다에서 완성한 모리아 산
그럼에도 우리의 질문은 멈추지 않습니다. 본문을 완전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느냐고 여전히 따져 묻게 됩니다. 그러한 의문은 타당합니다. 그런 까닭에 ‘야훼 이레’ 하나님의 구원은 모리아 산에서, 한 개인만을 향하지 않았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신비롭게도 훗날, 그 산 위에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곳에 주님이 영광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흘러 모리아 산을 마주 바라보는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듯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나무에 결박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는 달리 아들의 완전한 죽음을 목격하셨습니다. 창세기 22장은 골고다에서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모리아 산을 뒤덮은 슬픔과 절망은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그 모든 절망과 혼돈을 넘어서는 생명의 은총을 온 세상에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려움에 부닥친 자녀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단지 ‘준비’하신다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을 예비하셨다는 결론으로 섣불리 달려가서도 안 됩니다. 그 대신 주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걸으셨던 모든 순간을 차근히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야훼 이레’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뿐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심을 진심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십니다. 하나님은 자녀의 난치병 진단을 듣고 싸늘한 병원 계단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어머니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부당한 해고 통보를 받고 창백한 회사 건물 밖을 힘없이 나오는 아버지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오랜 시간 품어온 꿈을 결국 포기하고 시큰한 가로등 불빛 아래를 배회하는 우리의 아들, 딸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요양원 창문 밖으로 외롭게 핀 들꽃을 쓸쓸히 쳐다보는 부모님을 보십니다. 보시고, 보이시고, 보내십니다.
그렇게 나를 바라보시고 당신을 보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마주하길 바랍니다. 그 눈길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믿음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참으로 살리시는 주님의 돌보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저마다 걷는 사흘 길에 함께 하시는 은혜를 느낍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녀를 위해 준비하신 진정한 은혜를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처럼 번민이 마음에 사무칠 때, 하나님의 이름 ‘야훼 이레’를 부르며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혼란을 딛고 일어나 믿음의 여정을 꿋꿋이 이어 나가야 합니다. 그 길 끝에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참 생명이 풍성하게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마음 깊이 품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따뜻한 시선을 통해 시련을 딛고 일어나 담대히 발걸음을 내디디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야훼 이레’, 보시는 주 하나님.
아브라함의 번민을 발견합니다. 그를 덮친 깊은 슬픔과 아픔을 들여다봅니다. 너무나 무겁고 힘겹게 모리아 산으로 향했을 그의 걸음을 지켜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결박하고 칼을 겨누며 무너졌을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하지만 주님이 그 모든 순간을 보고 계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끝내 당신을 보이시고 은혜를 예비해 주신 사랑을 기억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닮아가길 소망합니다. 참된 순종을 통해 온전한 믿음의 본을 보인 아브라함의 삶을 마음에 새기길 원합니다. 아브라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구원을 올바로 깨닫고 전하는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세상의 모든 결박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 생명을 이루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