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장 8~16절 "믿음을 따라 살다가"
2026년 5월 31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히브리서 11장 8~16절 "믿음을 따라 살다가"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존재 자체가 사랑이신 하나님의 참 은혜와 평화가 성도님들 가운데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
황망한 죽음
그는 믿음을 따라 멀리 떠나왔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1889년 10월 2일, 한 호주 청년이 부산항에 내렸습니다. 긴장과 설렘이 섞인 표정 위로 낯선 가을바람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의 이름은 죠셉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입니다. 데이비스는 어려운 환경을 딛고 젊은 나이에 교육가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제 가정을 꾸리고 여유를 누리며 살아도 누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가슴 깊이 간직했던 소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복음 전파의 일꾼으로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였습니다. 어느 날 데이비스는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글을 읽고 결심을 굳혔습니다.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단의 제1호 조선 선교사로 파송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구한말 참으로 척박했던 이 땅에 발걸음을 내딛고 부산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그 후 그는 금세 다른 선교사들과 친해졌습니다. 선교사 공의회의 서기가 될 정도로 실력도 인정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데이비스는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더욱더 험난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서울에는 선교사가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새로운 선교지를 찾기 위해 도보로 기나긴 답사 여행을 떠났습니다. 부산을 목적지로 하고 무작정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3주간의 무리한 여정 가운데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습니다. 그 결과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폐렴까지 겹쳤습니다. 겨우 부산에 도착하긴 했지만 금세 사경을 헤맸습니다. 결국 다음 날인 1890년 4월 5일, 그가 조선 땅을 밟은 지 겨우 육 개월 만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불과 서른세 살 이었습니다.
너무나 황망한 죽음입니다. 앞날이 촉망받는 유능한 청년이 과감히 헌신하며 선교지로 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당연히 그에게 커다란 성과를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냉혹합니다. 희생에 따른 결실을 얻기는커녕, 채 꽃 피우기도 전에 허무한 결과를 맞닥뜨리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힘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만의 경우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 다는 것은 곧 ‘떠남’을 의미합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건 죄의 질서와 이별을 뜻합니다. 따뜻한 풍요를 주었던 익숙한 삶의 방식으로부터 멀어지는 결단입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기회와 소유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희생에 대한 보상이 극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대부분 정반대입니다. 더 큰 상실을 겪고 방황하곤 합니다. 후회가 밀려올 때도 많습니다. 떠나온 그곳을 계속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존재 자체를 의심할 때도 있습니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신앙 여정의 이면입니다.
과감한 믿음의 여정
이와 같은 모순을 성경에서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 역시 고향을 벗어나 멀리 떠나왔습니다. 하지만 별 이룬 것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의아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차근히 살펴보면 그가 너무나 스산한 인생을 살아왔음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75세였을 때 '야훼'라는, 너무나 낯선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 만남은 지금까지 알아왔던, 모든 신이 거짓이었음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방황하며 오랫동안 갈구했던 참 진리를 마침내 발견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무나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내용은 명확합니다. 바로 큰 민족을 이루어 그의 이름을 널리 떨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지금껏 그저 아들 하나만이라도 낳아서 자기 이름을 이어주길 간절히 바랐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다른 높은 차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치 한 모금의 생수를 구한 사람에게 드넓은 호수를, 한 움큼의 흙을 원한 사람에게 드높은 산을 허락하신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과감히 믿음의 여정을 떠났습니다. 본문 8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우리가 두고두고 본받을 만한 너무나 위대한 신앙입니다. 믿음을 묘사하는, 성경에서 가장 눈부신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냉정하게 물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은 것을 정말 얻었을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수천 년의 종교 전통을 잠시 멀리 치워두고 철저히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습니다.
쓸쓸한 장례식
그는 주님의 찬란한 언약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대신 숱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권력자들의 기세에 눌려 아내를 누이라고 무려 두 차례나 속이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자식처럼 키운 조카 롯에게 배신당해 많은 재산을 잃었습니다. 타들어 가는 속을 부여잡고 아무리 기다려도 사라의 태는 도무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나이 백 살에 아들 하나를 힘들게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삭을 불태워 바치라는 잔인한 요구를 하나님께 들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사건의 훈훈한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아들의 목숨을 무사히 건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날, 그 모리아 산 위에서 아브라함의 영혼이 얼마나 끔찍하게 뒤틀렸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한 생애를 보냈습니다. 기나긴 나그네 길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내 사라가 먼저 누워 있는 막벨라 굴에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 모습을 창세기 25장 9절은 이렇게 쓸쓸하게 묘사합니다. 새한글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9 그의 장례를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막벨라 동굴에서 치렀다. 동굴은 마므레 맞은편에 있는, 소할의 아들인 히타이트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었다.
고요히 잠든 아브라함의 곁을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지켜주었습니다. 물론 장례식에 이 두 사람만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사라가 죽은 뒤어 얻은 아내 그두라를 통해 낳은 자녀들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고동락한 종들도 분명 여러 명이 함께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온전히 이을 아들은 이삭 혼자입니다. 게다가 이삭 역시 아버지처럼, 결혼하고 꽤 오랜 뒤에 느지막이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생전에 직접 두 눈으로 본 명실상부한 후손은 이삭과 야곱과 에서, 이렇게 겨우 세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눈에는 평범한 장례식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식의 숫자를 망자의 명예와 동일시했던 옛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넘길 장면이 아닙니다. 다른 족장들은 당시 대가족 문화를 따라 적어도 수십 명, 많으면 백 명이 훌쩍 넘는 자손들에 둘러싸여 성대하게 장사를 치렀을 것입니다.
이와 비교하면 아브라함의 장례 풍경은 지극히 초라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허다한 별이나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는 너무나 차이가 큽니다. 큰 민족을 이루어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공허한 허풍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아브라함 부부가 이 땅에서 걸어왔던 고단한 인생길을 새번역성경은 본문 13절 전반부에서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 했(습니다.)”
나그네 정체성
너무나 아프고 쓰린 문장입니다. 비장하고 서글픈 삶의 질곡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감히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을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따를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본문 13절 전체를 새번역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3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해 주신 것들을 실제로 받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그것들을 보고 반가워했습니다. 땅에서 자기들은 낯선 손님이요, 잠시 거쳐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시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인생의 목표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단지 많은 아들을 줄줄이 낳고, 넓은 땅을 차지해 으스대고 떵떵거리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건네신 언약의 깊이를 헤아렸습니다. 거기에 온 삶을 걸고 진심을 담아 아멘을 외쳤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바로 "잠시 거쳐가는 사람", 즉 ‘나그네’입니다.
‘나그네’, 이 단어가 품고 있는 무게를 우리는 좀처럼 실감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소가 있고, 몸을 눕히고 자는 집이 있고 출석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주민등록증이나 사원증을 비롯한 여러 신분증이 우리를 이 세상에 단단히 붙들어 맵니다. 쳇바퀴 돌 듯 매일 뻔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루하루 익숙한 일상 안에 갇혀 지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나그네였습니다. 가나안 땅 어디를 가도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 땅의 원주민들에게 그는 언제나 외부인이었습니다. 창세기 23장에 보면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은 헷 족속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나그네로, 떠돌이로 살고 있습니다.”(창 23:4) 이 고백은 단순한 법적 신분을 표현한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존재 방식 전체를 드러내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이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을 신앙의 열매로 종종 착각합니다. 안정적인 직장, 탄탄한 인간관계, 넉넉한 재정, 굳건한 건강을 주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여깁니다. 애써 노력하며 붙잡으로 합니다. 물론 그 자체로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생애는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근본적인 태도가 무엇입니까? 하늘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로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 풍요롭게 정착해 많은 것을 거두는 삶입니까?
이 두 가지는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같은 직업에 종사하고, 같은 동네에 살며, 같은 교회에 출석합니다. 하지만 그 삶을 이끄는 궁극적인 방향이 전혀 다릅니다. 하나는 이 땅에 닻을 내리고, 다른 하나는 저 하늘을 향해 돛을 펼칩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는 우르의 풍요로운 문명도, 가나안의 비옥한 땅도, 그 어느 것도 자신의 진정한 집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친히 건축하시는 그 성만이, 자신이 마침내 돌아가야 할 곳임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두고 14절은 ‘본향 찾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은 굳게 믿었습니다. 자기 삶의 결정적 운명과 진정한 평가가 지금, 이곳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당장 나에게 얼마나 많은 돈과 명예가 있는지를 따지고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고된 나그네 생활을 주저 없이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의 고향 우르는 수천 년 전에 이미 고도의 거대한 문명을 이룬 풍요로운 도시입니다. 그가 욕망을 따라 살았다면 그곳에 다시 돌아가 안락한 삶을 누리려 했을겁니다.
희망의 이유, 본향
대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하늘 고향, 즉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습니다. 본문 16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의 시선은 더 먼 곳을 향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입니다. 하나님이 기꺼이 이루실 언약의 절정입니다. 그 하늘 본향은 공간으로나 시간으로나 저 멀리에 있습니다. 지금 이 곳에서 볼 때는 까마득하고 흐리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고백하였습니다. 비록 남들 보기에는 대단하지 않은 인생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삶의 순간순간, 그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주님과 동행을 경험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벧엘에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불렀을 때, 조카 롯에게 바보처럼 다 양보하고 황량한 땅에 남겨진 그에게 하나님께서 다가오셨을 때, 어느 한 낮에 세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 오셔서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갓 태어난 아들 이삭의 신비로운 눈망울과 마주쳤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을 시작으로 이루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를 점점 더 깨달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비록 사람들 눈에는 그의 죽음이 허망해 보일지 모릅니다. 막벨라 굴 앞에서 거행한 쓸쓸한 장례식 모습이 그런 감정을 더욱 부추깁니다. 어쩌면 그를 두고 주변 사람들이 뒤에서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 위대한 언약을 완전하게 이루시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어스름하게 보았던 하나님 나라를 또렷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막연하게 경험했던 주님의 다스림을 온전히 이루어가셨습니다. 세상의 질서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보이셨습니다. 갈릴리 시골길을 따라 몸소 나그네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 길 끝에,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곧, 아브라함의 본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하는 이유입니다. 동시에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의문을 억지로 억누르는 무모한 의지력이 아닙니다. 무작정 내달리는 맹신도 아닙니다. 참된 믿음이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생의 그 어떤 모래 바람과 폭풍우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하늘 본향을 향해 내딛는 걸음입니다.
아브라함이 그토록 사모했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 곧 새 예루살렘을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21장 2~4절을 새한글성경으로 제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2 또 나는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에게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자기 남편을 위하여 꾸민 신부같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3 또 나는 들었습니다. 임금자리로부터 큰 소리가 말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거처가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처를 두실 것입니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고,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4 또 하나님이 그들의 두 눈에서 눈물을 다 닦아 주실 것입니다. 이제 죽음이 더는 없을 것입니다. 애곡하는 일도 통곡하는 일도 아픔을 겪는 일도 더는 없을 것입니다. 처음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삶은 녹록치 않습니다. 여전히 질병은 몸과 마음을 괴롭힙니다. 가난은 씻을 수 없는 수치심을 안겨줍니다. 가정 안의 끊임없이 문제가 고통으로 내몹니다. 때로는 그런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입니다. 복음이 공허하게 들립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거짓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처참한 사망과 애통과 통곡과 아픔이 가득합니다. 그것에 비해 주님은 너무나 무기력한 것만 같습니다.
그렇지만 쉽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대신,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해야 합니다. 현실을 도피하고 내세를 바라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믿음의 진정한 결실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따라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다 죽어간 모든 사람의 눈물을 직접 닦아주십니다. 새예루살렘에서 영원히 함께 하시는 신실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으십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한 죠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은 그를 파송한 고국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데이비스가 숨을 거두고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890년 5월 7일,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하였습니다.
“해외선교위원회에서는 우리가 조선에 보낸 첫 번째 선교사인 데이비스 목사의 죽음이라는 큰 손실을 기록할 것을 원한다. 그의 열성적 헌신, 학자로서의 탁월한 재능, 주목할 만한 지속적인 신앙생활, 다른 사람에 대한 강렬한 영향력 등은 새로운 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스데반이 일찍 부름을 받고 안식과 보상을 받았던 것처럼 데이비스를 분명하게 축복하셨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감화를 받아 그의 정신을 알리고 그의 열심을 본받아 우리의 옛 형제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영광의 왕관을 받기를 바란다.”
호주 장로교는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땅 곳곳에 교회뿐만 아니라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민족의 고난에 함께하며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따라서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은 분명 허망해 보이지만 결코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눈부신 복음의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우리가 그 중 일부입니다.
이 고백을 떨리는 감동으로 함께 고백하길 소망합니다. 아브라함처럼, 데이비스 선교사처럼 믿음의 여정을 걸으시길 바랍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두 사람처럼 거창한 무언가를 결단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건강한 믿음은 작고 소박한 순종들이 쌓여 이루어집니다. 이웃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는 것, 부당한 이익 앞에서 돌아서는 것, 원망 대신 감사를 선택하는 것, 이 모든 작은 걸음들이, 본향을 향해 믿음으로 내딛는 나그네의 발자국입니다.
동시에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결실이,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찬란하게 피어났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가 눈을 감은 후에야 본격적으로 열린 조선 선교의 문처럼, 믿음의 씨앗 대부분은 그 열매를 직접 우리 눈으로 보지 못한 채 땅에 묻힙니다. 하지만 신실하신 주님은 그 씨앗을 반드시 싹트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분명히 거두십니다.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화를 참으며 삼킨 억울함, 흔들리며 지켜낸 양심, 가족을 향해 눈물로 뿌린 기도의 씨앗들이 허공 위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자녀들이, 또 그 자녀의 자녀들이 과실을 먹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 없는 순종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삶을 바꾸고, 이 땅 한 구석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고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 위대한 이야기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어진 삶의 현장에 충실하되 눈길은 하늘 본향을 향해야 합니다. 주님의 언약을 깊이 헤아리고 진심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이 땅에서 믿음을 따라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 모습이 사람들 눈에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받지 못한 것처럼 남루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믿음의 여정을 기쁨으로 묵묵히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언약을 맺으시며, 마침내 새 예루살렘을 완성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참으로 신실하십니다.
기도
신실하신 주 하나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길 소망합니다. 우리 역시 아브라함처럼 본향을 사모하며 인생의 발걸음을 옮기는 나그네임을 고백합니다. 비록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거두는 약속의 결실은 작고 초라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저희를 통해 이루실 주님의 다스림은 지극히 크고 위대하심을 믿습니다. 그 믿음 따라 주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고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약 하신 그대로 새 예루살렘을 완성하시고 저희를 부르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