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장 37~44절 “강물처럼 흐르리라”
2026년 5월 24일, 성령강림주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요한복음 7장 37~44절 “강물처럼 흐르리라”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우리 주님의 참된 은혜와 평강이, 예배로 나아온 성도님들께 풍성히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명절 큰 날에
37절은 본문의 시간 배경을 알려줍니다. 바로 “명절 끝날 곧 큰 날”입니다. 여기서 명절은 요한복음 7장 2절로 알 수 있듯이 “초막절”입니다. 이스라엘 3대 명절 중 하나입니다. 가을철 추수를 마치고 열리는, 가장 성대하고 기쁨 넘치는 축제입니다. 그들의 조상이 척박한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떠돌던 시절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기간동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바위를 쳐서 나오게 한 생수로 백성의 마른 목을 축인 구원 사건을 재현했습니다. 매일 이른 아침 ‘물 긷기 의식’을 진행했습니다.
동틀 무렵, 대제사장 무리가 성전산에서 내려갑니다. 그들의 손에는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황금 항아리가 들려있습니다. 실로암 못에서 맑은 물을 가득 길어 올려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갑니다. 그들이 성전 남쪽 문에 도착하는 순간 은 나팔 소리가 세 번 울려 퍼집니다. 그 순간, 성전 찬양대가 시편으로 찬송합니다. 백성은 종려나무와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화답하였습니다. 열광적인 함성 가운데 제단에 도착한 제사장들은 황금 항아리에 담긴 물을 포도주와 함께 제단에 쏟아 부었습니다.
이 모습을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종교 행사가 아닙니다. 단지 비가 잘 내려 풍년이 오길 바라는 간구도 아닙니다. 이러한 ‘물 긷기 의식’에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에 예고하신 눈부신 은혜가 앞으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대가 폭발하는 순간입니다.
에스겔 47장에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점점 발목과 무릎과 허리 위로 차오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중에는 사람이 건널 수 없을 만큼 깊은 강이 되었습니다. 강가에는 나무가 빼곡히 서 있고 물 속에는 온갖 고기로 가득했습니다. 생명이 차고 넘치는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실 때 그 일이 일어 날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마르지 않는 생수가 터져 나와 죽은 바다를 살리고 온 세상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꿈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7일간 반복되던 의식이 모두 끝났습니다. 분위기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습니다. 가장 성대한 마지막 날, 즉 ‘명절 끝날 곧 큰 날’이 되었습니다. 수만 명의 인파가 제단을 향해 몰려들어 온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습니다. 군중이 감정으로 완전히 압도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천대 받던 동네 갈릴리 출신 목수 예수님이 갑자기 일어섰습니다. 성전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이렇게 외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광복적 기념행사 중 애국가가 울려 퍼지며 태극기가 올라가는 가장 엄숙한 순간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그때 누군가 갑자기 나타나 마이크를 뺏고 “내가 광복 자체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돌발행동입니다.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이 받았을 충격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감상적인 위로가 아닙니다. 낭만적이고 달콤한 초대도 아닙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간절히 품었던 기대와 인식을 산산이 무너뜨리는 선언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과 의식을 통해 마침내 궁극적인 목마름을 해결하고 구원을 받을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참으로 살리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이라고 예수님은 당당히 외치셨습니다.
누구로부터?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수의 근원을 주목해야 합니다. 38절 함께 읽겠습니다.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을 언급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배는 과연 누구의 배일까요? 신약 성경 원문을 보면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화면으로 보시듯이, 옛날 헬라어 사본에는 지금과 같은 띄어쓰기나 쉼표나 마침표가 없었습니다. 알파벳만 그것도 대문자로만 빽빽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따라서 문장을 어떻게 구분하고 끝을 나누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관련해서 37~38절을 화면 보시면서, 새한글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37 마지막 날 곧 명절의 큰 날에 예수님이 서서 외치셨다.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나한테 와서 마시기 바랍니다. 38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대로, 생수가 그의 배에서 강물처럼 흘러나올 겁니다.”
여기서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나한테 와서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문장을 끝맺어 보겠습니다. 그런 다음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대로, 생수가 그의 배에서 강물처럼 흘러나올 겁니다.”라는 새로운 문장이 이어졌다고 이해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성경이 번역한, 익숙한 해석입니다. 이런 경우 예수님을 믿으면, 그 믿는 사람의 내면 생수가 솟아나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통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 문장의 마침표를 뒤로 미뤄서 “나한테 와서 마시기 바랍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다음에. 찍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주님께 와서 마셨다는 뜻으로 하나의 문장을 이룹니다. 이렇게 되면, 생수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예수님의 배에서 강물처럼 흘러나온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맞을까요? 생수는 누구의 배로부터 흘러나올까요? 신자일까요? 예수님일까요? 결론부터 알려드리면 둘 다 맞습니다. 어느 한쪽만 옳거나 틀리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분명히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 전체는 과연 예수님은 누구신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당신 자신을 어떻게 알려주고 계신지를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절 물 긷는 의식을 구경하러 모이며 예언자 에스겔의 예고를 마음에 품었습니다. 마지막 날,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을 고대 했습니다. 하지만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곧 참된 성전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백성을 향해 “너희가 기다리는, 그 구약이 예언한 생수가 흘러나오는 참 성전은 바로 내 몸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거듭 명심해야 할 생명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도 초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당신께로 나아와 마시라고 하십니다. 지금 과연 무엇에 목마르십니까? 어떤 갈증으로 몸과 마음이 괴로우십니까? 그 어떤 돈과 명예로도 적실 수 없는 고통으로 목이 타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은 충분히 적시고 흘러 넘치게 하는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그렇게 참 성전이신 예수님께 나아가 생수를 마신 사람들 역시 또 다른 작은 성전이 됩니다. 주님께 받은 생명의 강이 믿는 자의 배를 통과해 세상이라는 광야로 거침없이 흘러갑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너무나 중요한 소명입니다. 말씀으로 진지하게 자기를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주변을 은혜로 촉촉하게 적시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삭막한 황무지로 만들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지친 이들의 목을 축이며 다시 일어날 힘을 주고 계십니까? 아니면 혹시 더욱 숨 막히게 짐을 지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강물을 진정 마신 사람이라면 그 물줄기가 힘차게 멀리 퍼져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마땅히 사랑과 배려를 실천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이룬 해산
우리는 여기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곳인 ‘배’를 눈여겨 봐야 합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이 단어는 단지 마음이나 인간 존재의 중심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훨씬 더 직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일리아>는 신약에서 총 22번 나옵니다. 그중에서 절반이 넘는 무려 12번 여성의 “자궁”을 뜻하는 구절에 등장합니다.
특히나 요한복음에서 본문을 제외하고 딱 한 군데에만 나옵니다. 바로 3장 4절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유명한 대화를 나누십니다. 바리새인이자 유대인 지도자인 니고데모는 어느 날 밤 조심스럽게 주님께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고백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에게 사람은 거듭나야, 즉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말을 들은 니고데모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한복음 3장 4절을 새한글성경으로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4 예수님께 니고데모가 말한다. “사람이 나이가 들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또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참으로 다시 태어나는 걸 설명할 때 자연스럽게 언급되는 신체 부위가 바로 어머니 뱃속, 즉 ‘자궁’입니다. 여러모로 신비롭고 오묘한 대화입니다. 사람이 실제로 물리적인 모태에 들어가야 새롭게 사는 건 아닙니다. 사람의 몸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납니다. 그러면서 절묘하게 자궁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요한의 세밀하고 의도적인 단어 선택입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로마 군인이 확인 사살 했습니다. 주님의 옆구리를 날카로운 창으로 깊이 찔렀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피와 물이 흥건히 쏟아져 나왔습니다. 옛 사람들에게 물과 피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현상은 곧 ‘출산’을 상징했습니다. 오늘 읽은 분문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는 말씀은 다름 아닌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은 나무 위에 비참하게 메달려 보혈을 흘리시며 온 우주에 참 생명을 안겨 보이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언자 에스겔이 들려준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차츰 거대한 강물을 이루는 모습을 감격에 겨워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참 성전이십니다. 주님께서 흘리신 물과 피로 에스겔의 환상이 진정 이루어 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이루신 해산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생명의 물결이 가득 흘러 넘쳤습니다.
이를 통해 확인합니다. 참으로 누군가를 살리고 세상을 새롭게 하는 길은 초막절 물 긷는 예식처럼 화려한 종교 형식에 있지 않습니다. 황홀한 환상이나 체험도 아닙니다. 물과 피를 쏟는 아픔을 통해 진실로 생명이 열립니다. 혹시 옆구리가 창에 찔리지 않으셨습니까? 그 깊은 상처로 너무나 아프고 힘들지 않으십니까? 하염없이 신음이 솟아나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분명히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복음을 품고 예수님을 닮고자 애쓰며 겪는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져주고 물러서며 받는 상처는 절대로 무가치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눈부시게 찬란한 영광으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마치 임신부가 모진 산고 끝에 너무나 소중한 아이를 품어 아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몹시 괴롭지만 그 모든 아픔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생명의 결실을 풍성히 안겨 주십니다.
참된 영광으로 나타나신 성령님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매우 중요한 분의 존재를 언급합니다. 39절 화면 보시면서 새한글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39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사람들이 머지않아 받게 될 성령님을 두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직은 성령님이 와 계시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이 아직까지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흘러나온 생수의 강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지 그 실체를 확인합니다. 바로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직은 성령님이 와 계시지 않았”다는 설명은 무슨 뜻일까요? 성령님은 분명 창세기 1장부터 나타나셨습니다. 구약의 여러 왕과 예언자에게 분명히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 성령님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령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계시는 지 아닌 지를 따지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존재방식과 사역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구약 때처럼 특별한 몇몇 사람에게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 하십니다. 완전한 구원을 깨닫고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 때, 성령님과 함께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영광’입니다. 너무나 파격적이고 역설적입니다. 생수의 강이 주님께로부터 흘러나오기 위한 조건은 다름 아닌 ‘영광’입니다. ‘영광스럽다.’라고 말한다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십니까? 어떤 상황을 두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라고 말할까요? 시상식과 같은, 화려한 모습을 자연스럽게 눈앞에 그립니다. 입시나 취업, 혹은 질병이 모두 낫거나 커다란 성취와 성공을 거두는 가리킵니다.
이렇게 성령님과 영광이 나란히 설 때 사람들은 크게 오해합니다. 이른바 ‘성령 충만’을 얘기할 때 흔히 굉장한 이적이나 신비한 체험 혹은 열광적인 분위기를 떠올립니다. 많은 집회나 모임에서 성령님을 힘주어 언급하지만 정작 성경이 알려주는 성령님의 참 모습에는 무관심합니다. 그저 자기 문제를 없애주는 해결사나 욕망을 이루어주는 초능력으로 심각하게 왜곡하는 경우를 안타깝게 발견합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받으실 영광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당하신 철저한 죽음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고난과 모욕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가장 비참하고 끔찍한 죽음이자 저주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참된 구원을 온 우주에 찬란하게 선포하는 영광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참혹한 피를 흘리심으로써 당신이 진정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저마다의 십자가에 오를 때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기세등등하게 고개를 치켜들 때가 아닙니다. 어깨에 힘을 주고 큰 소리를 외칠 때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길을 걷다가 철저히 짓밟히고 억눌린 순간입니다. 꿈꾸며 계획한 모든 일이 어그러지고, 비난과 고통에 둘러싸일 때야말로 오히려 영광의 순간입니다. 그 찢긴 틈 사이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령 충만은 주님과 함께 영광뿐만 아니라 그분의 고난에도 기꺼이 참여하는 믿음입니다. 시련 가운데 자아가 철저히 깨지고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참으로 충만하고 자유롭게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생명의 강물에 자기를 푹 적실 수 있습니다. 내면 깊이 메마른 영혼을 은혜로 적실 수 있습니다.
나뉜 사람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두 귀로 직접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모두가 참 진리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극도의 긴장 가운데 군중 사이에 극심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40~41절 함께 읽겠습니다.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극명하게 나뉘어 졌을까요? 말씀을 받아들이는 근본적인 태도 차이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마름을 가지고 “이 분이야말로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다” 혹은 “그리스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호의적으로 반응하며 흥분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촉촉한 생기를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반대편, 특히 율법을 잘 안다고 자부했던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매우 차갑고 교만한 잣대를 들이댔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장기를 보낸 갈릴리를 문제 삼았습니다. 성경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올 거라고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들의 무지가 우스꽝스럽게 드러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처음 읽었던 교인들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말씀에 정통하다고 자신만만했던 사람들은 바로 눈 앞에 있는 참 진리를 제대로 모른채 외면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치명적인 오만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온전히 드러난 영광 그리고 그 영광 가운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강물처럼 임한 성령님과 정반대입니다. 바로 알량한 지식과 경험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제한하는 태도입니다. 섣불리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치명적인 교만입니다.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또한 그들과 같지 않는 지 살펴야 합니다. 목마름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오직 유일한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드넓은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다른 사람을 끌어 안아 주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에 품고, 사람들이 유치하게 정해놓은 기준을 뛰어넘어 광대하신 주님의 뜻을 잠잠히 실천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죽음의 바다를 향해 흐른 생수
앞서 초막절 물 긷는 의식을 설명하며 말씀 드렸습니다. 그 배경에는 에스겔 47장의 환상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나오는 생수의 강이 있습니다. 에스겔 47장에 따르면, 성전의 문지방에서 시작된 생명수는 거대한 강물이 되어 광야를 가로질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디에 이르렀을까요? 염분이 너무 강해 어떤 생명도 살아남을 수 없는 죽음의 바다, 즉 ‘사해’에 마침내 도착했습니다.
참 성전에서 흘러나온 그 생수가 사해로 쏟아져 들어갔을 때, 그 지독한 짠물이 생명을 품은 단물로 변했습니다. 온갖 고기들이 헤엄치며 어부들이 그물을 치는 기적의 바다로 완벽하게 바뀌었습니다. 철저한 죽음의 공간이 생명의 강물을 만나 완벽하게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말씀이 실제로 언젠가 예루살렘 성전을 통해 이뤄질 거라 마음 졸이며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흘려보내신 성령님을 통해서만 참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소금기로 가득한 죽음의 땅을 향해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한 곳에 고여 찰랑거리는 작은 웅덩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이라는 척박한 광야를 향해 거침없이 흐르는 진짜 강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모든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진정한 은혜의 땅을 일구실 줄 믿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지금도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고백합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참 의미를 깨달아 압니다. 지금 내 목을 조르는 시련이 고통 그 자체로 끝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참 영광에 안길 때, 성령님의 물결이 흐르는 통로가 된다는 진리를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절망과 갈등으로 갈라진 이 땅을 복음으로 적시고 새롭게 하는 사명을 진정한 성령 충만 가운데 기쁨으로 감당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생명의 주 하나님
명절 큰 날에 몰린 사람들의 영혼 깊은 목마름을 헤아리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르신 십자가에 참된 영광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물과 피를 온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강물로 흘려보내신 사랑을 마음에 품습니다. 가장 어렵고 힘겨운 순간이야말로 참된 성령충만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만이 죽음의 바다처럼 메마른 모든 영역을 새롭게 살리는 근원임을 항상 명심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