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4장 12~19절 “마음을 하늘에 둔다면”
2026년 5월 17일, 부활절 일곱째 주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목사 정대진
베드로전서 4장 12~19절 “마음을 하늘에 둔다면”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삶은 고통이다
스캇 펙 박사가 쓴 “아직도 가야할 길”은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책을 여는 문장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삶은 고통이다.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다시 말해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게 되면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비로소 삶의 문제에 대해 그 해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중략)
삶의 문제들은 우리를 괴롭고 비참하며 외롭거나 슬프게 하기도 하며 때로는 죄책감, 분노, 두려움, 초조, 절망 속으로 던져 넣기도 한다. 또한 삶의 문제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육체적으로 불편하고 아픈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불편하고 아프게 한다. 우리가 삶의 문제들을 문제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듯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끊임없이 계속되므로 삶이란 항상 어렵고, 기쁨만큼이나 많은 고통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전체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삶의 승패는 그 문제를 얼마나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문제는 우리에게 용기와 지혜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없던 용기와 지혜를 만들게도 한다. 영적으로 정신적인 성장은 오직 문제에 직면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반기며, 더 나아가서는 문제가 주는 고통까지 기꺼이 받아들인다.”
어떠십니까? 삶은 고통이라는 정의와 고통의 의미에 대한 설명에 공감하십니까? 혹시 요즘 힘들지 않으십니까? 대놓고 티를 못 내지만 속으로 끄덕이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행복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내 삶에 전혀 문제가 없길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런 일 없이 항상 평온하길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삶은 누구나 어렵습니다. 끝없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간절히 바라는 기대가 산산이 무너지곤 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좌절이 들이닥칩니다. 모든 사람은 시련이라는 이름의 무겁고 싸늘한 사슬을 발 한 쪽에 차고 살아갑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고통을 외면하거나 부인하지 말고 기꺼이 아파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회복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불 같은 시련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중요한 진리이기도 합니다.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새한글 성경으로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유혹하려고 여러분 가운데서 생겨나는 불 같은 시련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나 한 것처럼요.
사도 베드로는 말합니다. “불 같은 시련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시련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원래 없어야 하는 데 특별하게 생겨난 상황이 아닙니다. 마치 공기처럼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불 같은 시련’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때는 아직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끔찍하고 극단적인 폭력이 벌어진 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같이 맞부딪혀야 했던 고난은, 훨씬 더 끈적하고 일상적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경제는 ‘콜레기아’라고 부르는 ‘조합’을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대장장이든 가죽을 세공하든, 물고기를 잡거나 장사를 하든, 어떤 직업도 예외 없습니다. 먹고 살려면 반드시 조합에 속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조합의 모든 모임은 해당 직업의 수호신과 황제에게 드리는 제사와 함께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제사 드린 고기를 함께 나누어 먹는 잔치를 통해 친밀함을 느끼고 화합을 다졌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렇게 로마 사회에 공기처럼 스며든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그 결과 애국심이 없고 도시에 재앙을 부르는 무신론자로 몰려 조합에서 쫓겨납니다. 일감이 끊기거나 물건을 구할 수 없습니다. 사업에 필요한 돈을 빌리지도 못합니다. 시장과 광장과 골목에서 철저히 소외되는 현실에 던져집니다.
12절에서 “연단하려고 ‘오는’”에 해당하는 말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과거에 겪었거나 앞으로 일어날 일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피부에 사무치는 뜨겁게 타오르는 고통을 가리킵니다. 어쩌면 사자에게 물려 죽는 것보다 더 오래, 더 깊이 사람을 갉아먹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들의 발목을 잔인하게 조이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시련을 의미합니다.
사슬 같은 이름 ‘그리스도인’
이러한 ‘불 같은 시련’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단서가 있습니다. 16절 함께 읽겠습니다.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베드로의 편지를 받아 든 1세기 교인을 꽉 묶어두는 잔인한 사슬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친숙한 신앙 고백입니다. 자부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 로마 세계에서 이 단어의 의미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은 교회가 스스로 지어낸 영광스러운 이름이 아닙니다. 로마 행정 관료들이 불온한 집단을 견제하기 위해 외부에서 붙인 꼬리표였습니다.
라틴어에서 단어 끝에 “이아누스”라고 붙이면 해당하는 누군가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가령 카이사르의 파벌을 가리켜 “카이사리아누스”라고 불렀습니다. 헤롯왕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은 “헤로디아누스”라고 불렀습니다. 마찬가지로 헬라어 “크리스티아노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왕으로 섬기고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법정에서 그 이름만으로로 사형감이었습니다. 다른 어떤 범죄 증거가 없어도, “네가 크리스티아노스냐?”는 판사의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하는 순간, 즉시 처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치명적인 낙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불린다는 것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위험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변명의 기회 없이 가혹한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 됩니다. 억울하고 눈물겨운 일을 수 없이 겪었습니다. 당시 성도들이 숨 쉬듯이 보냈던 일상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떨까요? 지금 우리와 무관하다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많이 다릅니다. 그 때처럼 심각한 차별이나 조롱을 겪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제 생활에 커다란 불이익을 받지 않습니다. 특히나 신앙을 이유로 목숨을 잃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는 본질은 비슷합니다. 과거에 겪었던, 혹은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아픔을 들여다보시길 바랍니다. 고통의 이면을 차분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셨습니까? 약하고 부족한 처지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강하고 화려한 세상의 법칙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토대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처절한 희생과 패배입니다. 이 자체가 세상의 상식과 논리와 완전히 다릅니다. 그 결과 심각하고 위험한 오해를 겪게 됩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손에 든 그 시대 교인들과 근본적으로 같은 상황입니다.
큰소리 치고 어떻게든 남들을 짓밟고 오르려는 것이 아니라 참고 물러서는 모습을 세상은 우습게 봅니다. 아등바등 재산을 긁어 모으고 권력을 움켜 쥐려 하지 않고 양보하고 나누는 모습을 이용하려 합니다.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상처를 입힙니다. 그렇게 생긴 흉터를 누구나 영혼 깊이 지니고 있을 겁니다. 불쑥불쑥 떠올라 몸을 바르르 떨게 하는 아픈 기억이 발을 꽁꽁 묶고는 합니다.
고난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기쁨
그러므로 베드로가 고난 받는 교회를 향해 건네는 위로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는 단호하게 외칩니다. 고난 가운데 오히려 즐거워해야 합니다. 얼핏 들으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한 태도 같습니다. 매정한 훈계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설명하는 이유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온갖 고난은 단순한 불운이 아닙니다. 약하고 못나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일상입니다.
아무런 죄 없는 사람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는 인류의 오랜 숙제입니다. 특히나 구약성경의 욥기 그리고 시편에 등장하는 여러 찬양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통곡 소리로 가득합니다. 너무나 암담하고 끔찍한 질문입니다.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의문입니다. 오늘날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커다란 참사를 겪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싸늘한 물음표입니다.
그 해답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발견합니다. 가장 의로우신 분이 가장 부당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 처참한 고통으로 온 세상을 살리셨습니다. 이 위대한 복음을 믿음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당하는 억울한 시련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참여하는 은혜로운 통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구원 역사에 함께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관련해서 베드로전서 2장 20절 후반부를 새한글성경으로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하는 가운데 고난을 당하면서 참고 견딘다면,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은혜로운 일입니다.”
분명히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고난이 은혜입니다. 화려한 성공이나 감정적인 종교 체험은 은혜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진정한 은혜는 십자가에 드러난 주님의 마음을 본받고자 애쓰며 참고 견디는 고통입니다. 물론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거북하고 힘듭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복음을 통해 이 놀라운 진리를 마음 깊이 품고 간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12절에서 베드로가 ‘불 시험’을 가리켜 “너희를 연단”하기 위함이라고 알려준 이유입니다. 그 어떤 뜨거운 불길도 우리를 불태우지 못합니다. 마치 금속을 제련하는 용광로와 같습니다. 불순물을 제거하고 정금으로 새롭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겨운 일을 당할 때 오히려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영광의 영이 임하시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거듭 마음 깊이 새겨야 할 진리입니다. 모욕을 당할 때 오히려 복이 있습니다. 인간의 자연스런 본능과 정반대입니다.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서 있길 원합니다. 누구나 부러지길 싫어합니다. 화려한 왕관을 쓰고 싶어 합니다. 많은 사람의 우러름을 받길 소망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갈 때, 주님의 뜻을 따라 참고 져줄 때 도리어 굴욕적인 순간이 찾아옵니다.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내 자신이 몹시 미워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영으로, 즉 성령님으로 함께 하십니다. 이때 성령님을 가리켜 굳이 ‘영광의 영’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관련해서 이사야 11장 2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예언자는 여기서 훗날 메시아에게 임할 하나님의 영을 소개합니다. 바로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입니다. 이 모두를 명쾌하게 요약한 말이 바로 “영광의 영”입니다. 거듭 말씀 드립니다. 굴욕감에 몸을 떨며 힘들어 할 때, 주님께서 보내신 영광의 영이 함께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모욕당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시어 죽음에서 다시 일으키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품어주시고 새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랑합니다. 앞서 드린 말씀대로 ‘그리스도인’은 당시 제국에 의해 무시당하는 호칭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영광입니다. 1세기 교회는 이 찬란한 진리를 진심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세상이 수치스럽게 여기는 초라한 이름을 기꺼이 자랑했습니다.
신실하신 창조주께
이뿐만이 아닙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들은 결정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히 알고 고백해야 합니다. 본문 19절을 화면 보시면서 새한글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겪는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하면서, 신실하신 창조주께 자기들의 영혼을 맡겨 드리십시오.
베드로는 성도의 고난을 통해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이 ‘신실하신 창조주’라고 선언합니다.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신약 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여기에서만 하나님을 가리켜 “창조주”라고 불렀습니다. 사도는 왜 수많은 영광스런 칭호 중에서 굳이 이 단어를 선택 했을까요? 여기에는 너무나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천지창조를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텅 비어 있는 공간 속에 우주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했습니다. 흑암은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그 모든 혼란과 암흑을 뚫고 주님께서 말씀으로 창조를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고통 당하는 성도를 위로하며 ‘신실하신 창조주’를 힘주어 언급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부서지고 망가진 자녀의 삶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 인생이 산산조각 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실패에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걷잡을 수 없는 후회에 사로잡힙니다. 그렇지만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어둠과 상처를 창조의 재료로 삼으십니다. 단순히 고장 난 무언가를 고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눈부시게 완전한 새로운 변화를 이루십니다. 신실한 손길로 전혀 다른 존재로 빚어 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께
관련해서 베드로가 교회를 향해 무엇이라 불렀는지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베드로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부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 호칭은 단순히 베드로 개인의 애정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라는 선언입니다. 참고로 베드로전서 1장 2절은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향해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4장 12절의 “사랑하는 자들아”와 같은 의미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패배자로 부르고 투명 인간 취급합니다. 혹은 사형수로 낙인 찍습니다. 숨 막히는 고통 속에 성도들조차 자신을 무가치하고 무능한 사람처럼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안에 있는 선택 받은 백성입니다. 사도는 그 찬란한 정체성을 눈물겹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굳게 붙잡아야 할 복음이기도 합니다. 시련은 내가 누구인지 오해하게 하게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잊어버리게 합니다. 고통 자체보다 그런 무지와 혼돈이 더 위험합니다. 따라서 여러 모양의 불같은 고난을 지날 때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싸늘한 공기에 숨이 막혀오고, 모욕과 핍박을 겪을 때 거듭 곱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신실한 창조주입니다. 남몰래 내뱉는 신음에 귀 기울이십니다. 애써 괜찮은 척 이를 앙다물고 짓는 미소 뒤에 감춰진 눈물을 보십니다. 나조차 받아들일 수 없는 가장 못난 모습을 품어 안으십니다. 영광의 영으로 함께 하십니다. 철저히 짓밟히고 무너지고 남은 상처와 아픔을 끌어모아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을 신실하신 창조주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믿고 의지할 온 우주의 유일한 존재입니다. 오직 주님만을 인생의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삶의 기준으로 여겨야 합니다. 고통으로 몰아넣는 현실 너머에 살아 숨 쉬는 참된 진리를 말씀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주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어떤 질척이는 땅 위에 서 있다 할지라도 눈길은 담담히 하늘을 향해야 합니다.
마음을 하늘에 둔다면
서기 197년에서 203년 사이,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박해가 북아프리카의 도시 카르타고를 불길처럼 휩쓸고 있었습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 감옥에는 악취와 굶주림으로 가득했습니다. 그곳에 갇힌 그리스도인의 발목에는 녹슨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 맹수의 밥이 되거나 목이 베일지 몰랐습니다.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그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기 위해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는 “순교자들에게”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이 있습니다.
“마음을 하늘에 둔다면, 다리는 사슬을 느끼지 못한다.”
(Nihil crus sentit in nervo, cum animus in caelo est.)
사랑하는 정배교회 성도 여러분. 삶은 고통입니다. 아무도 시련에서 피해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을 따르며 자기를 부정할 때, 그 연약한 틈새를 사탄은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억울한 일을 겪습니다. 부당한 상황에 놓입니다. 부질없는 자책을 하고 자신을 미워할 때도 있습니다. 모멸감에 사무쳐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둔탁하게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새삼 확인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고통의 쇠사슬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거친 금속의 질감이 삶의 발목을 비틀고 상처 입힐 뿐입니다. 따라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불같은 시련을 겪을 때 마음을 하늘에 두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히려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신실하신 창조주께서 그 모든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영광으로 빚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반기고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선을 행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발에는 사슬이 채워져 있습니다. 무겁고 싸늘한 촉감이 괴로움으로 몰아가고는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전혀 새로운 감각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인생을 헤쳐갈 진정한 힘과 용기를 부어주십니다. 묶여 있으나 진정 자유로우며 괴로우나 참으로 기뻐하게 하십니다. 마음을 하늘에 두고,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를 진심으로 깨닫고 누리고 전하시길 축원합니다.
본문 12~13절을 새한글성경으로 읽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유혹하려고 여러분 가운데서 생겨나는 불 같은 시련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나 한 것처럼요. 13 오히려 여러분이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셈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기뻐 뛸 수 있도록 하십시오.
기도
신실하신 창조주 하나님
삶은 고통입니다. 누구나 저마다의 사슬을 발에 차고 살아갑니다. 여러 모양의 시련으로 아파하고 힘겨워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애쓰며 겪는 고난은 단순한 불운이 아니라,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불같은 시험이 저희를 정금과 같이 새롭게 하시는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어떤 상황에도 마음을 하늘에 두며, 저희 가운데 함께하신 영광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고통의 사슬을 정확히 바라보면서도 십자가로 말미암은 새로운 감각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참고문헌
스캇 펙. 『아직도 가야할 길』(서울: 열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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