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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16~21, 28~34절 “작은 새의 노래”

2026-05-10
정대진 목사

2026년 5월 10일, 부활절 여섯째 주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사도행전 17장 16~21, 28~34절 “작은 새의 노래”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온통 푸르름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청량한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


독수리들의 광장

어떤 공간에 압도 당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20살에 광화문에 처음 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한적한 대전에서 자라서 대학교에 입학하며 서울에 올라갔습니다. 거대한 도시가 주는 위압감이 상당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단순히 높은 건물이 빼곡하게 있고 사람들로 몹시 붐벼서가 아니었습니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상징하는 문명, 그 오랜 역사와 전통이 갓 상경한 스무살 청년으로 하여금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 속 그리스 아테네를 들여다보며 자연스럽게 떠오른 옛 기억입니다.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 폴리스 언덕 위에 지금도 거대한 파르테논 신전이 남아 있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건축물입니다. 그 땅에서 꽃피운 거대한 사상을 상징합니다. 소크라테스가 거리를 걸으며 진리를 물었습니다. 플라톤이 자신의 핵심 이론을 가르쳤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물의 이치를 탐구했습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의 숨결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리스의 찬란한 문명을 화려하게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 중에 바로 그 아테네에 도착합니다. 황금기는 이미 오래전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아테네는 여전히 로마 제국의 문화와 학문의 수도였습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눈부신 과거를 존중하였습니다. 상당한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고유의 제도와 전통을 유지하는 특별한 자율권을 주었습니다. 그곳을 지나는 나그네들은 자연스럽게 그 오랜 도시가 지닌 막강한 지식의 권위 앞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 중심에 “아레오바고”가 있었습니다.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의 법정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 판결을 받았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아테네의 종교와 도덕을 포함해 새로운 사상을 심사하고 통제하는 최고 권위의 사법 기관이었습니다.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그리스는 물론이고 로마 제국 전체에서 최고 엘리트였습니다. 상당히 깊은 학식과 권위를 두루 갖추었습니다. 


따라서 아레오바고를 “독수리들의 광장”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새에 비유한다면, 새 중에서 가장 크고 강한 새들이 모인 곳입니다. 자신은 물론이고 둘러싼 모든 이들이 찬사를 보내는 최고의 지성인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자기들 지식이 온 세계의 으뜸이라는 강력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존재 자체로 쩌렁쩌렁 울리는 함성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 독수리들은 크게 두 가지 무리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역사책이나 도덕 교과서에서 쉽게 접한 데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입니다. 이 둘의 차이를 간단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먼저 에피쿠로스 학파는 세상은 물질이 우연히 결합해 이루어졌다고 주장 했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존재나 세계를 부정했습니다. 죽은 뒤 갈 세계는 없다고 믿었습니다. 만약 신이 있더라도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고통이나 불안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추구했습니다. 따라서 에피쿠로스 철학을 ‘우연과 평온’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스토아 학파는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진리로 가득 찬 유기체로 보았습니다. 조금 어렵게 말하면 범심론자입니다. 온 우주에 신이 이성적으로 스며들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운명론을 주장합니다. 모든 것은 어떤 법칙에 따라 운명처럼 지어져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그 운명에 순응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을 ‘숙명과 이성’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의 대표적인 두 철학 학파는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전혀 달랐습니다. 생각에 극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서로 경쟁하며 자기들의 지성을 발전시키고 뽐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성경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인격을 지니고 사랑으로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며 돌보는 신의 존재를 거부했습니다. 그 대신 독수리 날개처럼 우람한, 자신들이 지닌 지성의 날개를 뽐내며 자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마주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화려한 무지

이러한 아테네 거리를 걷고 있는 바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사도행전 17장 16절 함께 읽겠습니다.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여기서 ‘격분’하다는 말은 단순한 짜증이나 불쾌함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신적인 질투나 거룩한 분노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보실 때 느끼시는 감정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존심이 짓밟혔다고 분을 내는 게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 무참히 짓밟히는 상황을 목격하는 영혼 깊은 아픔을 드러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그리스의 여러 유물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물론 문화재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너무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모두는 당대 그리스의 오만과 불신앙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울의 눈에는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이 도둑질 당하고 있는 걸로 보였습니다. 치명적인 영적 범죄 현장이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의 무지함입니다. 굉장한 모순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성을 자랑했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보다 많이 알고 똑똑하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진리를 몰랐습니다. 바로 죽음과 부활입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 지에 대한 진실을 철저하게 왜곡하고 외면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에게 부활은 불가능했습니다. 몸이란 그저 물질이 우연히 결합 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죽음과 함께 사라질 뿐입니다. 스토아 학파에게 부활은 혐오스러웠습니다. 그들에게 몸은 ‘무덤’이었습니다.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죽음을 통해 해방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몸이 다시 사는 건 어이없는 헛소리입니다. 영광스럽게 탈출한 영혼이 썩어빠진 감옥으로 되돌아 가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테네의 민낯입니다. 파르테논은 웅장했고, 철학은 정교했으며, 논리는 빛났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관통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는 철저히 무지했습니다. 그 이면에는 거대한 두려움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바울이 발견한 제단이 증거입니다.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그 제단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아테네는 수없이 많은 신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신을 빠뜨리고 제사를 드린 건 아닌지 두려웠습니다. 혹시나 그 신의 저주를 받을 까봐 무서웠습니다. 재앙을 피하기 위해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자기들 딴에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대처로 여겼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이 내세우는 지성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누구보다 잘 안다고 으스대며 자랑하지만 사실 심각한 무지를 자기도 모르게 자백하고 있었습니다.


씨앗을 쪼아 먹는 작은 새

그들 앞에 바울이 나타났습니다. 인류 최고의 지식을 자랑하던 도시 아테네에 어느 낯선 전도자가 등장했습니다.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바울은 우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유대인 뿐 아니라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장터에 갔습니다. 이 때, ‘장터’는 단순한 시장이 아닙니다.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는 광장입니다. 사도는 거기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 앞에서 거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독수리들이 커다란 날개를 요란하게 펼치며 날아 왔습니다. 18절 함께 읽겠습니다.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앞서 소개했던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다가왔습니다. 그 중 몇 사람이 토론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을 이렇게 부릅니다. 바로 “말쟁이”입니다. 사실 점잖은 번역입니다. 원문은 매우 모욕적인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풀면 “씨앗을 쪼아 먹는 자”입니다. 시장 바닥에 떨어진 낱알들을 쪼아 먹는 참새를 보셨을 겁니다. 도시에서는 길 거리에서 비둘기를 흔하게 발견하고 혐오 대상이 됩니다. “씨앗을 쪼아 먹는 자”라는 말은 그렇게 작고 볼품없는 새와 같은 사람이라고 무시하며 부르는 호칭입니다.


유명한 스승에게서 체계적으로 정통 교육을 받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오만한 태도가 고스란히 베어 있는 표현입니다. 자신들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사상의 줄기를 계승했다고 여겼습니다. 반대로 바울은 더러운 시장 바닥에 떨어진 지식의 조각을 줍는 우스운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철학 부스러기를 자신만의 대단한 가르침인 것처럼 팔러 다니는 사기꾼 취급했습니다.


그들로서는 당연합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시대 철학자들은 최상위 1%의 귀족입니다.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일들은 노예들이 대신했습니다. 하루 종일 고상하게 철학 토론에만 심취했습니다. 그들의 살결은 고왔고 옷은 화려했습니다. 반면 바울은 여기저기 다니고 핍박을 겪었습니다. 땀 흘려 일하며 살길을 마련했습니다. 피부는 거칠 없고 옷차림은 구질구질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바울이 전하는 진리가 그들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헛소리였습니다. 앞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모두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토록 자랑하던 거대한 학문 체계에 부활이 끼어들 틈이 전혀 없었습니다. 정신 나간 괴상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부활에 대해 무지했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장면이 방금 읽은 18절에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어떤 사람이 나타나 바울을 가리켜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신들’ 즉, 하나가 아니라 여러 신들 소개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한글 성경을 읽는 우리는 이 장면을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신약 원전을 보면 그들이 황당한 오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테네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바울이 두 명의 이방 신을 소개하는 걸로 이해 했습니다. 즉, ‘예수’와 ‘부활’이라는 각각의 신입니다. 우리말과 달리 헬라어에는 남성과 여성 구분이 있습니다. 예수는 남성명사, 부활을 뜻하는 아나스타시스는 여성 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아테네 사람들은 바울이 아무리 진지하게 예수님께서 이루신 부활을 외쳐도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라는 남성 신과 짝을 이루는 아나스타시스라는 여신, 이 두 신을 소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만큼 그들의 세계 안에서 부활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었습니다. 기껏 양보해 봤자 새롭게 등장한 여신의 이름으로 봐줄 정도입니다. 그런 그리스 철학자들을 향해 바울은 외칩니다. 제우스가 아니라 로마 제국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죄인이 참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가 ‘씨앗을 쪼아먹는 작은 새’로 불리며 멸시 당한 이유입니다. 바울이 아무리 진심으로 호소해 봤자 그저 짹짹 거리는 성가신 새 소리로 들릴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레오바고 법정에 끌려가기 전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철저히 오해받고, 조롱받았습니다. 누가 봐도 이 대결의 결과는 뻔합니다. 이제 기라성 같은 그리스 지성인들에게서 그의 무지가 금세 드러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말 몇 마디 꺼내기 전에 거대한 헬라 지성에 기가 눌리고 움추러 들기 쉬운 상황입니다.



믿을 만한 증거, 부활

그러나 바울은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담담하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22절 함께 읽겠습니다.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바울은 아레오바고 법정 한가운데 꼿꼿하게 섰습니다. 자신을 심문하러 모인 아테네 최고의 지성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상당히 절묘합니다. 바울은 감정을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차분하게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종교심’을 언급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미신’이라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바울은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그들에게 익숙한 개념과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면서도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자랑하는 화려한 종교적 열심은 사실 참된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한 미신입니다.


그러면서 앞서 말씀 드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글씨를 새긴 제단을 언급합니다. 그들이 미처 몰랐던, 참 하나님을 소개했습니다. 온 세계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며 함께하시는 주님을 노래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 시인 아라토스가 쓴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바로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입니다.


이 시는 본래 제우스를 찬양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친숙한 싯구를 가져왔습니다. 제우스의 자리에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을 앉혔습니다. 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문화, 예술 앞에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며 사명을 포기하지 않고 삶으로 진정한 찬양을 드렸습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압박하는 환경을 적극 받아들였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선포하는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마침내 바울은 결정적인 선언을 합니다. 31절 함께 읽겠습니다.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여기서 ‘믿을 만한 증거’로 옮긴 단어는 당시 그리스-로마 법정에서 “결정적인 증거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막연한 종교적 믿음을 요청한 게 아닙니다. 그는 법정에서 결정적 증거물을 제출하듯, 예수님의 부활을 선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담대하게 증언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익숙하고 뻔한 복음 전도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아레오바고 법정에 모인, 몸의 부활을 부정하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관련해서 아레오바고의 창립 신화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거기에 보면 “사람이 한 번 죽어 흙이 그 피를 마시면, 결코 다시 일어나는 일, 부활은 없다.”라는 선언이 나옵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확고한 세계관 위에 세워진, 아테네의 중심입니다. 바울은 그곳 한가운데 서서,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부활을 당당하게 증언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의 언어로 말하고, 그들의 시를 인용하고, 그들의 철학적 언어로 다가갔습니다. 무척 유연하고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섣불리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주의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핵심인 부활을 거침없이 선언 했습니다. 그는 비록 그리스의 눈으로 작은 새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작은 새의 노래 안에는 온 세상을 뒤흔드는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담겨 있었습니다.



위대한 초라함

그렇다면 바울의 아레오바고 전도는 어떤 결과로 이어졌을까요? 32절 함께 읽겠습니다.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바울은 맹수에 둘러싸인 참새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독수리처럼 용맹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뭔가 그럴듯한 보상을 있을 것 같습니다. 고생하며 아테네에 와서 온갖 멸시와 구박을 받았습니다. 온갖 위협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장 사람들 앞에서 그를 높여주리라 기대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현실은 싸늘하고 냉혹합니다. 바울은 계속 조롱 당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그의 말을 다시 듣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품위 있는 사람들의 완곡한 거절일 뿐입니다. 아테네 광장에 나타난, 작은 새 한 마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저 잠깐 웃고 넘길 허무맹랑한 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34절 함께 읽겠습니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몇 사람이 바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가 전한 부활의 복음을 믿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바울의 아테네 선교를 ‘실패’로 함부로 단정 합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다른 복음 전파 장면과 달리 복음을 영접한 사람의 숫자가 확연하게 적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 한 번에 삼천 명이 예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는 고작 몇 사람에 불과합니다. 숫자로만 따지면 분명 초라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건 지극히 어리석은 인간의 판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숫자로 단정 짓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로 감히 신패를 말해서는 안됩니다. 성경 본문이 진정 알려주려고 하시는 핵심을 무시하고 자기 욕심을 억지로 말씀에 끼워 맞추려 해서는 안 됩니다.


관련해서 사도행전이 두 사람의 이름을 명확히 기록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디오누시오”와 “다마리”입니다. 디오누시오는 아레오바고의 관리입니다. 바울을 심문하러 모였던 바로 그 법정의 판사 중 한 명입니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과 달리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당대 아테네 최고의 엘리트 중 한 명이 신앙을 영접했습니다. 놀라운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초기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디오누시오는 이후 아테네 교회의 초대 주교가 되었습니다. 도시 전체를 변화시키는 복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누가는 ‘다마리’라는 이름의 여인을 소개합니다. 당시 그리스는 철저히 남성 중심 사회였습니다. 그러한 문화와 전통 속에서 여성이 아레오바고와 같은 공식적인 토론의 장에 있다는 것 자체가 무척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에 이름을 남겼다는 것은, 그녀의 믿음이 후대 교회에 기억될 만큼 귀한 것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온갖 수모와 멸시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증거한 부활이 이룬 소중한 결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때로 독수리들에 둘러싸인 작은 새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크고 강하고 화려한 사람들, 내가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문화에 압도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 시대의 여러 모양의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를 만납니다. 당장 눈 앞의 욕망에 충실합니다. 수없이 많은 돈과 강력한 권력을 자랑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약한 사람을 짓밟는 것을 주저 하지 않습니다. 경쟁에서 이겨 화려한 트로피를 쥐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게 맞는 거라며 으스댑니다. 


그들과 비교해 보면 지금 내 모습은 지극히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 시대의 각종 성공 신화가 속삭이는 말들에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억지로 벽을 밀며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롱 뿐입니다. 점점 더 비참하기만 할 뿐입니다. 단순히 ‘예수 믿으세요.’라고 전도해서 받는 모욕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살아가는 근본적인 태도의 문제입니다. 부활을 품고 사는 삶,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 알려주는 섬김과 양보와 희생이 이 세상의 질서에 비춰 보면 너무나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독수리의 날갯짓을 뒤쫓아가지 못하는 참새처럼 느껴집니다. 뭐 하나 그럴듯하게 이뤄낸 게 없는 내 인생은 실패한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그윽한 위로에 잠잠히 귀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그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 깊이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증거 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소중히 품고 삶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런 내 처지와 형편이 사람들 눈에는 별 볼일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고 소소한 일상을 소중히 받으시어 당신의 뜻을 넓혀가십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의 뜻을 노래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작은 목소리가 거칠고 힘센 맹수들의 울음소리에 파묻힐 때도 있습니다. 그저 비참한 눈물만 흐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두를 하나님께서 귀 기울이시고 영원한 진리 가운데 드높이십니다. 이러한 부활의 복음을 붙잡고 생명의 온기를 전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부활의 주 하나님,

화려한 아테네를 거닐던 남루한 복음 전도자 바울처럼, 때때로 자신을 초라한 작은 새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화려한 세상의 논리 앞에 복음이 우스꽝스럽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부활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저희 입술을 통해 나오는 작은 고백에 귀 기울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위대한 찬송으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고 문헌

김경진. 『사도행전』.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36.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F. F. 브루스, (Bruce, F. F.). 『사도행전 강해』.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0. 

존 스토트, (Stott, John). 『사도행전 강해: 땅끝까지 이르러』. 정옥배 역.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2. 

윌리엄 H. 윌리먼, (Willimon, William H.). 『사도행전』.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0.

Timothy S. Yoder, "The Apostle Before the Areopagus: Stoic and Epicurean Interpretations of Acts 17:22–31". Bibliotheca Sacra 18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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