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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 1~14절 “바로 그 길”

2026-05-03
정대진 목사

2026년 5월 3일, 부활절 다섯째 주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요한복음 14장 1~14절 “바로 그 길”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길을 잃다

“어린 왕자”로 잘 알려진 프랑스 작가 생텍쥐베리는 비행사이기도 합니다. 그는 비행기를 조종하며 자기가 실제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또 다른 대표작《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 1939)를 발표하였습니다. 1935년 12월 29일, 생텍쥐페리는 정비사 프레보(Prévot)와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베트남 사이공까지 장거리 비행 기록에 도전하고 있었습니다. 지중해를 건너 리비아 상공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습니다. 그 순간을 그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제 밤이다. 나는 밤의 세계로 들어간다. 나는 밤을 항해한다. 이제 내게는 별밖에 없다.”


그 때, 예상치 못한 강풍이 불어왔습니다. 항로에서 멀리 벗어났습니다. 경유지로 계획했던 이집트 카이로를 지나쳤습니다. 당황했던 그는 등대를 찾다가 그만 270킬로미터 속도로 추락했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리비아 사막에 곤두박질 쳤습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비행기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기름과 물은 모두 쏟아져 모래에 스며들었습니다. 


다음날 두 사람은 주위를 걸으며 탐색했습니다. 그곳은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입니다. 지친 몸으로 신기루를 헤치며 여섯 시간 넘게 걸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습니다. 점점 더 절망이 거칠게 몰아 닥쳤습니다. 그 심경을 책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앞으로 더 나아가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우리는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했다. 다시 우리의 비행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희고 붉은 항공 표지가 될 우리의 비행기, 동료들이 아마 이 표지를 찾아낼지도 모를 일이다. 살길을 찾아 헤매는 것에 대해 조금도 기대를 걸고 있지는 않지만, 그 길만이 우리의 유일한 살길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비행기 근처에서 잠을 잤다. 우리는 60km도 더 되는 길을 헤매고 다녔다. 물도 다 떨어졌다. 동쪽으로 가서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고, 우리 머리 위로 지나가는 동료들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이토록 목이 마른데......”


어둡고 황량한 사막에서 길을 잃어보셨습니까? 물론 우리 중에 비행기를 조종하거나 외딴 곳에 추락해 본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생텍쥐베리의 경험담에 쉽게 공감합니다. 그가 겪었던 암담한 상황에 함께 답답함을 느끼고 힘겨워합니다. 우리 인생이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캄캄한 밤의 세계를 지나 길을 잃습니다. 매우 중요한 약속 때문에 서둘러 길을 나서 운전을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도로가 꽉 막힐 때가 있습니다. 긴장한 나머지 엉뚱한 골목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 네비게이션은 무심하게 싸늘한 말투로 이렇게 안내 멘트를 합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길에서 벗어날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성공을 위해 닦인 분명한 길이 있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좋은 학교를 졸업해 번듯한 직장에 취업하고 승진해서 임원까지 올라야 합니다. 혹은 자기 사업을 크게 키워 많은 매출을 올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따금 밤의 세계에 접어들곤 합니다. 도무지 예상하지 못했던 강풍에 휩쓸려 사막 한 가운데 추락합니다. 힘겹게 쌓아 올린 경력이 무너지거나 가정에 갈등이 생기거나 갑작스럽게 질병이 찾아옵니다. 어느새 주위를 둘러보니 경로에서 한 참 멀리 벗어나 있습니다. 온통 모래밖에 없습니다. 점점 목은 말라오고 소름 끼치는 어둠이 덮쳐옵니다.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경험하는 시련입니다. 누구나 길을 잃습니다.



길을 잃은 제자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속,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1절 함께 읽겠습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굉장히 역설적인 위로입니다. 주위에 정말 큰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어떤 말로 위로 하시겠습니까? 사실 아무 말 안 하는게 가장 좋습니다. “걱정하지마 다 잘 될거야”라고 어설픈 희망을 주는 건 어떤 면에서 최악입니다. 비슷한 경험을 해 보셨을 겁니다. 남의 속도 모르는 무책임한 조언처럼 들립니다. 괜히 기분만 더 나쁘고 화가 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근심하지 말라”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의 겉도는 위로와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빈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본문의 맥락과 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바로 앞에 있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후 제자 중 한 사람이 배신하고 돈 얼마에 당신을 팔 거라고 예고하셨습니다(21절). 그런 다음 예수님은 그들과 잠깐 함께 있는 것뿐이라며 당신이 가는 곳에 제자들은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36절). 결정적으로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할 거라고 선언하셨습니다(38절).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단어 하나로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근심”입니다. 단순한 걱정과 염려가 아닙니다. 마치 물이 휘저어지듯 완전히 뒤흔들리고, 동요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다는 표현과 같은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둔 격정적인 감정처럼, 격렬한 내면의 혼돈을 가리킵니다.


지금 제자들의 마음이 그러합니다. 인생을 걸고 무려 3년을 따라다닌 스승께서 자기들 곁을 떠난다고 하십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사막 한 가운데 떨어진 비행기 조종사처럼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너무나 막막하고 두려울 뿐입니다. 



길을 잃은 도마

이러한 제자들의 무지와 불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두 명이 등장합니다. 바로 도마와 빌립입니다. 4~5절을 새한글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4 나, 내가 가는 곳으로 이끄는 그 길을 그대들은 압니다.” 5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씀드린다. “주님,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 길을 알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당신이 갈 곳을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도무지 알아듣기 힘듭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도마가 참지 못하고 나섭니다. 이렇게 따져 물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 길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당신이 갈 곳은 제자들이 앞으로 머물 아버지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이루어질 구원의 영역입니다. 어떤 특정한 물리적 공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도마는 마치 그곳이 지도를 펼쳐놓고 찾을 수 있는 장소로 여겼습니다. 여전히 그는 예수님이 로마를 무너뜨릴 군사 영웅이 되실 거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가실 그곳을 무기 창고 혹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잠시 피해 숨을 피신처로 여겼습니다. 


도마가 얼마나 예수님의 진리로부터 멀어져 있는 지를 보여줍니다. 자기 기준과 틀에 갇힌 좁은 시야를 드러냅니다. 그 결과는 방황 뿐입니다. 어디로 가야하는 지를 모르고 헤맬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려주시는 넓은 그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구석에 찍힌, 내 마음에 드는 점 하나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마를 함부로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도마는 모두를 대신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 길을 알 수 있습니까?” 그 순간 그는 길을 몰라 방황하는 온 인류를 대표하는 존재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길을 잃은 빌립 

도마의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자 이번에는 빌립이 나섭니다. 본문 7~8절 함께 읽겠습니다.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이 묻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빌립은 도마와 다른 방식으로 길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아버지 하나님을 직접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경험한 것처럼 압도적이고 거창한 장면을 보기 원했습니다. 확실한 증거를 예수님이 내밀어 주시면 믿겠다는 태도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9절을 새번역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빌립은 몰랐습니다. 이미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과 같은 인격을 공유하십니다. 두 분은 서로가 서로 안에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고, 아버지의 뜻이 곧 예수님의 뜻입니다. 빌립은 이러한 깊은 진리를 미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기와 함께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피곤하면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전혀 다른 것으로 여겼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참 영광의 본질을 오해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구원을 뭔가 화려한 종교 체험 안에 가두려 합니다. 당장 내 삶의 문제를 극적으로 해결하시는 손길을 기대합니다. 밋밋한 하루하루를 뒤엎을 자극적인 순간을 기다립니다.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고 거창한 성취와 성공을 손에 쥐길 원합니다. 그 모두는 허무한 탐욕입니다. 잠잠히 말씀하시고 길을 보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외면하게 합니다. 함성에 파묻혀 조용한 진리에 귀를 막고, 강렬한 맛으로 혀가 얼얼해 담백한 복음을 못 느낍니다. 그 결과 어지럽게 소용돌이 치며 길에서 벗어납니다. 


도마와 빌립의 연약한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함부로 그들을 정죄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한계에 갇혀 있습니다. 무엇이 길인지 모른 채 지친 몸을 끌고 언덕을 오릅니다.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주위를 멤돌거나 영영 주저 않을지 모른다는, 크나큰 근심에 사로 잡힙니다.



진리의 길

그런 우리 모두를 향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절 함께 읽겠습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주님께서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성경 전체에서 가장 강렬하고 선명하게 드러낸 자기 선언입니다. 단어 세 개로 자신을 설명하십니다. 바로 ‘길’과 ‘진리’와 ‘생명’입니다. 이 셋은 같은 무게로 나란히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길’입니다. ‘진리’와 ‘생명’은 그 길을 설명하고 보충하는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열어가신, 참된 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진리와 생명의 의미를 살펴봐야 합니다.


먼저 ‘진리’란 무엇일까요? ‘진리’라는 두 글자를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각종 철학 개념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닙니다. 뜬구름 잡는 교훈도 아닙니다. 진리는 인격입니다. 주님은 “나는 진리를 알고 있다.”라거나 “내가 진리를 가르쳐 준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곧 진리입니다. 그 어떤 문자나 이론으로 함부로 제한할 수 없는, 살아있는 심장이 뛰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주님의 존재가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진리입니다.


관련해서 시편 43편을 주목해야 합니다. 2~3절을 새한글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2 주님은 나의 피난처인 하나님이시니까요. 무슨 까닭으로 나를 쫓아내십니까? 무슨 까닭으로 내가 슬픔에 빠진 채 이리저리 다녀야 합니까? 원수가 나를 괴롭힙니다. 3 보내 주십시오, 주님의 빛과 진리를! 그 빛과 진리가 나를 이끌어 가게 해 주십시오. 나를 데려가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거룩한 산과 주님이 머무시는 곳으로.


여기서 시인은 원수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 깊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슬픔에 빠져 길을 잃고 이리저리 떠돌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빛과 진리로 나를 이끌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주님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인도해 달라고 간곡하게 외쳤습니다. 43편을 쓴 시인 한 사람의 노래가 아닙니다. 오랜 시간 이 찬양을 함께 부른 이스라엘,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영혼 깊숙이 구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간구에 응답 하셨습니다. 백성을 구하시고 하나님께로 이끄는 빛과 진리가 바로 자신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거듭 생생히 깨닫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둘러싼 여러 모양의 원수들 그리고 온갖 어둠과 거짓에서 구하십니다. 주님께서 심오한 철학을 가르치시고 거대한 지식을 알려주셔서가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절정에 이른, 예수님이 몸소 살아내신 하나님 나라 복음이, 그 놀라운 사랑이 유일한 참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하나님으로 향하는 길이 됩니다. 



생명의 길

진리와 함께 예수님의 길을 알려주는 단어는 ‘생명’입니다. 호흡에 달린 생물학적인 목숨을 넘어서는 뜻입니다. 하나님 고유의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단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 오래오래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을 화면 보시면서 새한글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3 영원한 생명은 이것입니다. 곧 아버지께서 한 분뿐인 참하나님이신 것과,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펼쳐 보이신 길, 그 길을 따라 우리가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은 바로 한 분뿐인 참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통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과 친밀하고 온전하게 나누는 사귐입니다. 주님 품에 안겨 진실한 교제를 나눌 때 비로소 죽음을 이기고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 몹시 북적이는 대형 쇼핑몰에서 길을 잃고 겁에 질려 엉엉우는 어린 아이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 아이로서는 마치 죽을 것만 같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 그때 쇼핑몰의 상세 위치도를 쥐어 주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엄마가 나타나 와락 끌어안아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엄마의 따뜻한 품에 안겨 살아있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내가 사랑과 보호 아래 있는 아들, 딸이라는 진리를 생생하게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 드립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단지 죽은 다음에 한없이 길게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연약한 자녀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뻗으시는 넓은 두 팔에 안겨 진정한 생명으로 가득히 내쉬는 숨결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릴 때, 여러 모양의 폭력과 억압에 시달릴 때, 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온 세상을 살리려 십자가에서 목숨을 던지신 예수님에게서 진정한 생명의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길 그 자체이신 예수님

이렇게 예수님은 참된 진리이며 생명이십니다. 이 두 단어, 진리와 생명은 결국 하나의 핵심으로 향합니다. 바로 ‘길’입니다. 본문 6절 다시 한번 더 함께 읽겠습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무엇, 어떤 가르침을 가리켜 “길”이라고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존재 자체가 길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 목적지에 이르는 길은, 헤매지 않고 여정을 온전히 이어가는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길이신 예수님과 함께 걷는 순간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의 진리와 생명을 통해 길을 발견하고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와 철학은 “이 길을 걸으라”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어떤 규칙을 지키거나 수련을 쌓으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완전히 다릅니다. 길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러 방식이나 노력이나 체계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길입니다. 갈릴리 시골길을 걸으며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우셨던 주님, 힘겨운 멸시와 조롱, 가혹한 핍박과 모욕 속에서 묵묵히 지신 십자가가 바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햇볕에 그을리고 바람에 몸을 떨며 평범하게 보내신 하루하루가 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 어떤 상황에 놓이든지 예수님과 함께라면 결코 길을 잃은 게 아닙니다. 오직 주님에게서 참된 길이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막의 밤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온통 모래에 파묻힌 것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거짓과 죽음에 휩싸여 내 인생이 이대로 다 끝난 것 같은 상황에 놓이기도 합니다. 그 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그 순간 우리의 형편과 처지와 상관없이 생명과 진리의 길이 열립니다. 


특별히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정배교회를 드나드는 교육부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길이라는 소중한 진리를 분명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자신이 본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길을 걸을 때에만 인생 여정을 참 진리와 생명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래 위의 발자국

사막에 추락한 비행기 조종사 생텍쥐베리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정비사 프레보와 함께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목은 타들어 가고 힘은 다 빠졌습니다. 기력을 모두 잃고 환각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살 길을 발견했습니다. 해당하는 대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았다, 모래 위에 발자국이 있다! … 아! 우리는 인류의 발자취를 잃어버렸었고, 무리로부터 단절되어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채 거대한 생명의 이동으로부터 잊혀진 존재였는데, 지금 이 모래 위에서 기적처럼 찍힌 인간의 발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모래 언덕 위로 또 다른 아랍인이 옆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소리쳐 부르지만 너무나 작은 신음일 뿐이다. 그래서 두 팔을 내저어 하늘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신호를 보내보지만, 그 베두인은 여전히 오른쪽만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마침내, 그가 서서히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가 온전히 정면을 향하는 그 순간,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가 우리를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 그는 우리 안의 갈증과 죽음, 그리고 신기루를 이미 지워버린 것이 될 터였다. 그가 몸을 돌리는 그 작은 움직임이 이미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단지 상반신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시선을 한 번 돌리는 것만으로 그는 생명을 창조해 냈고, 내게는 마치 신과 같은 존재로 보였다… 이것은 기적이다… 그는 모래 위를 걸어 우리에게로 오고 있다. 마치 바다 위를 걷는 신처럼…


아랍인은 그저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우리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고, 우리는 그 손길에 순종했다. 우리는 바닥에 몸을 뉘었다. 이제 이곳엔 인종도, 언어도, 그 어떤 장벽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한 가난한 유목민이 있어 대천사의 손을 우리 어깨에 얹어주었을 뿐이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마지막 힘을 다해 걸음을 내디뎠던 생텍쥐베리는 마침내 무사히 살아났습니다. 그를 신기루와 죽음에서 구한 것은 나침반이나 지도가 아니었습니다. 비행기 조종사로서 몸으로 익힌 정보와 지식도 아니었습니다. 모래 위에 새겨진 사람의 발자국이었습니다. 그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이었습니다. 그 뒤를 따라 마침내 발자국의 주인을 만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막에 추락했던 생텍쥐베리처럼 어디로 가야할 지 알지 못한 채 방황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축 처진 몸과 마음으로 힘겹게 인생의 고개를 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도마처럼 “우리는 길을 모릅니다”라고 원망과 탄식이 나오기도 합니다. 빌립처럼 그 길을 눈으로 ‘확실히 보고싶다.’는 헛된 욕망과 기대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 모두를 향해 예수님께서 따뜻하고도 단호한 음성으로 이렇게 외치셨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주님은 말씀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몸소 길을 걸으며 길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모래바람이 불어 닥칠 때, 모래 위에 아로새겨진 예수님의 발자국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보다 앞서 걸으신 그 길을 따라 나서길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참 진리와 생명 주 하나님.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고백합니다.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헤매다 지쳐있는 이들에게, 도마처럼 길을 모른다고 고백하는 이들에게, 빌립처럼 확실한 것을 요청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걸음을 따라 걷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모래 위에 새겨진 발자국처럼, 먼저 이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따라, 오늘 한 주간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고 문헌

이상훈. 『요한복음』.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35.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Beasley-Murray, George R.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1.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현대문화센타, 2019.

Wilson, A. M. "Send Your Truth: Psalm 43 and John 14:6." Neotestamentica 41, no. 1 (2007): 22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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