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장 42~47절 “찬양과 칭찬”
2026년 4월 26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사도행전 2장 42~47절 “찬양과 칭찬”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Again 1907?
2007년을 기억하십니까?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때 온 한국 교회가 “again 1907”을 외치며 들썩였습니다. 100년 전 있었던 평양대부흥이 다시 일어나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뜨거운 부흥을 소망하며 각종 집회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습니다. 관련 행사와 이벤트가 일년 내내 이어졌습니다.
그 때 이미 한국교회는 여러모로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평양대부흥을 재현하며 그 모든 위기를 돌파하려 했습니다. 그 열망을 타고 하나님을 움직여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습니다. 분명 그 안에는 순수한 소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진심 어린 반성과 회개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러한 열망 자체를 함부로 비웃거나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후 약 20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요? 교인 수는 훨씬 더 줄었습니다. 교회는 더욱더 큰 사회적 비난을 듣고 있습니다. 1907년의 대부흥이 다시 일어나길 바랐던 열망 자체가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뭔가 화려하고 그럴듯한, 많은 사람이 모여 경험하는 뜨거운 경험이 지닌 한계를 분명히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 하나님을 만났던 가슴 벅찬 순간이 있으실 겁니다. 너무나 소중한 경험입니다. 뚜렷한 체험이 없다면 자연스럽게 바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몇 십년 전까지 이른바 부흥회가 유행했던 이유입니다. 강력한 은사를 체험하길 소망하며 목이 쉬도록 부르짖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이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특별한 체험으로 충분하시던가요? 함께 청소년부 혹은 청년부 수련회에서 뜨겁게 기도하던 친구 중 지금은 교회를 떠난 경우를 주변에서 쉽게 보실 겁니다. 났거나 심지어 신앙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 속에 섞여 확실한 음성을 듣고 눈부신 환상을 보았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여전히 삶은 버겁습니다. 작은 아픔과 고통에도 눈물겨운 감격은 금세 사라집니다. 고단한 현실만 남을 뿐입니다. 그 틈새로 하나님을 향한 의심과 원망이 솟아 오르기도 합니다.
오순절 체험 그 이후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성경에 집중해야 합니다. 수많은 부흥회의 단골 주제는 사도행전 2장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윽고 여러 나라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베드로가 담대히 일어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무려 삼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가 강렬히 바라는 놀랍고도 신비한 체험입니다.
저는 담임목사로서 우리교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예배 때마다 뜨거운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병 고침을 비롯해 각종 이적이 펼쳐지길 기대합니다.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몰려와 교인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제 솔직한 소원입니다. 굳이 부정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 자체가 나쁜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본문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오순절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 뒤에 교회가 어떻게 했는지를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42절 함께 읽겠습니다.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믿는 사람의 숫자가 삼천 명이 늘었다는, 놀라운 성장 기록 바로 다음에 펼쳐진 장면입니다. 사도들은 성과를 자랑하며 들뜨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신비한 느낌을 계속 부추기며 이성을 마비 시키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행사와 프로그램을 연달아 진행하며 교회 안에 가두지도 않았습니다.
그 대신 무엇을 했을까요?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진리를 알려줍니다. 거듭 말씀 드립니다. 함께 모여 경험하는 뜨거운 성령 체험 자체가 나쁘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오늘날에도 놀라운 이적을 일으키시어 교회를 부흥하게 하십니다. 그러한 신비를 부정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거기서 멈추지 말고 다음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성경위에 굳게 선 신앙입니다.
마침 지난 주에,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쓴 또 다른 성경인 누가복음 24장을 함께 읽었습니다. 절망과 혼란을 안고 엠마오를 향해 터덜터덜 걷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부활의 영광을 곧바로 비추지 않으셨습니다. 함께 걸으며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참된 부활 신앙은 말씀에 뿌리내릴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의 결실을 맺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오순절의 열기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히 말씀을 가르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오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황홀한 체험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올바로 깨우치게 하기 위해 성령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군중의 열기에서 벗어나 진지하게 성경을 펼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정배교회가 다른 무엇보다 말씀을 풍성하고 생생하게 익히고 깨닫는 데 집중하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동시에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때때로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순간이 있습니다. 마치 태양이 구름이 가려질 때처럼 어둡고 스산한 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감격이 저만치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무엇보다 말씀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펼쳐 읽어야 합니다. 거기에 담긴 예수님의 복음을 곱씹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를 참으로 바로 세우는 생명의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제, 예배, 기도
조금 전에 읽었던 본문 42절에는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특성 네 가지를 보여줍니다. 그 중 첫 번째는 방금 살펴보았듯이 ‘말씀’입니다. 나머지는 교제와 ‘떡을 떼는 것’과 기도입니다. 여기서 “떡을 떼는 것”은 단순히 ‘식사’를 넘어 ‘예배’로 이해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당시 예배는 예수님의 성만찬을 재현하는 음식 나눔을 포함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교회가 시작할 때부터 드러낸 본질적인 모습을 확인합니다. 바로 말씀과 교제와 예배와 기도입니다. 사실 이 네 개는 따로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런 사귐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같이 떡을 떼며 식사를 하고, 예배하며 기도합니다. 이 네 가지가 원활하게 이어져 하나의 건강한 흐름을 이룰 때 비로소 교회는 부활 생명으로 살아 숨 쉬게 됩니다.
또한 이 네 가지는 우리 신앙 생활의 건강을 점검하는 선명한 기준입니다. 신앙은 결코 나 혼자만의 영역이 아닙니다. 반드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알려주는 진리입니다.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서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 지금 깊은 우울과 절망에 빠져 계시다면 이 네 가지를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내 삶에서 말씀과 성도의 사귐과 예배와 기도가 어떤 의미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중 어떤 하나에만 지나치게 치우쳐 있지 않은지 혹은 너무 무관심한 건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부담을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다시 사신 주님의 은혜에 안겨 참된 희망을 찾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사명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함께 말씀을 읽고 교제를 나누며 예배로 모여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정배교회로 모인 목적은 규모를 키우는 게 아닙니다. 교회 이름을 널리 알리고 영향력을 자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활의 복음을 믿고 소망할 때 얼마나 아름다운 나눔이 일어나는 지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건강한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남들 보기에는 우리 교회가 양평 전원 지역에 있는, 그저 작고 예쁜 교회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정한 성령 충만을 힘입어 부활 신앙의 본질을 꽃피우는 공동체를 세워 갈 때,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기뻐하시는 교회로 자라갈 줄 믿습니다.
모든 걸 나누는 교회
우리가 꿈꾸고 닮아가야 할, 균형 있는 교회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 보겠습니다. 44~45절 새한글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44 믿는 사람 모두가 한곳에서 지내며, 모든 것을 공유했다. 45 모은 재산이든 있는 재산이든 팔아서 모두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다.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사실 몹시 불편합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당장 모든 재산을 팔고 교회로 가져오라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대부분 불쾌해 하시며 화를 내실 겁니다. 당장 사이비 혹은 이단이라는 반응이 나올 겁니다. 많은 분이 교회를 떠나거나 제가 나가야 할 겁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특히나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땀 흘려 번 돈은 목숨과 같습니다.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합니다.
하지만 이때 교회는 공산주의처럼 사람들에게 강제로 돈을 뜯어서 나눠준 게 아닙니다. 스스로 지갑을 열었습니다. 부활의 복음이 그들을 강력하게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돈을 넘어서는 위대한 가치를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성령께서 성도의 눈을 여시어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과 절망을 마주 보게 하셨습니다. 내게 주어진 재물이 오로지 나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을 향해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이 모습은 그냥 툭 튀어 나온게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뿌리가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 날마다 내려주신 만나입니다. 출애굽기 16장 18절 화면 보시면서 함께 읽겠습니다.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이스라엘이 험한 광야 여정을 이어갈 수 있었던 힘은 하나님께서 매일 먹이신 만나에 있습니다. 이 만나에는 신비로운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긁어모아 계속 보관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쌓아둬봐자 금세 썩어 없어집니다. 반대로 어쩌다 하루이틀 적게 거두어도 괜찮습니다. 날마다 내리는 만나로 굶주린 배를 다시 채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광야를 함께 지나는 사람들 사이에 지나치게 부유하거나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함께 먹으며 공동체를 이룹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첫 번째 교회를 포함해, 오늘 우리가 깊이 곱씹어야 할 진리입니다. 물론 공산주의의 오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지극히 당연한 욕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 것을 가지고자 합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이 있더라도 남의 재산을 억지로 뺏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복음이 우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만나의 원리를 살아내야 합니다. 내가 가진 돈의 주인이 진정 누구인지를 되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고백한다면 하나님께서 쓰고자 하시는 곳을 향해 재물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교회가 건강해지는 길입니다. 교회는 돈을 쌓아두는 곳이 아닙니다. 흘려보내야 합니다. 부디 우리 정배교회가 이 시대의 만나를 나누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길 소망합니다.
차별 없이 식사하는 교회
균형 있는 교회의 두 번째 특성이 있습니다. 차별 없이 함께 식사합니다. 46절 함께 읽겠습니다.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오순절 성령님의 임재로 교회를 이룬 사람들은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여기서 ‘순전하다’라는 말은 ‘돌이 없는’, 매끄럽고 평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꾸미거나 차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속셈이나 계산 없이 먹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형제 자매이기에 거리낌 없이 함께 식사했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별거 아닌 것 같습니다. 얼핏 평범한 식사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당시 로마 사회의 문화를 염두에 둔다면 무척 충격적인 모습입니다. 당시 로마 귀족들은 저녁 연회 자리에서 디귿 자 형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했습니다. ‘트리클리니움’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식사 자리에는 철저한 서열이 있었습니다. 가장 좋은 자리에는 최상위 귀족이 누웠습니다. 신분이 낮을수록 점점 자리가 나빠집니다.
심지어 음식의 질도 달랐습니다. 주인에게는 최상급 와인을 따라주었지만 신분 낮은 사람에게는 싸구려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심지어 노예는 그 자리에 들어오지도 못한 채 문가에 서서 먹었습니다. 따라서 로마 문화에서 식탁은 신분을 증명하는 무대였습니다. 누가 어디에 앉느냐가 곧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였습니다.
유대 사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결법에 따라 누구와 밥을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엄격하게 구분되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죄인으로 낙인 찍힌 사람과 같은 식탁에 앉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함께한 식사가 큰 논란을 불러 일으킨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초기교회의 식탁에는 누가 앉아 있었을까요? 그들의 식사 장면을 머리 속에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로마 귀족이 화려한 옷을 걸치고 품위 있는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습니다. 그 옆에는 바다 내음과 땀 냄새가 묘하게 뒤 섞인 갈릴리 어부가 앉아 있습니다. 맞은 편에는 먼 나라에서 온 상인이, 그리고 어제까지 매를 맞던 노예가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 재산과 지식과 사회적 지위를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빵을 떼어 먹으며 서로를 향해 형제, 자매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식사 장면이 그 시대 로마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요? 굉장히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매우 위험한 집단입니다.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불온 세력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는 심각한 오해를 받았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가혹한 핍박으로 이어졌습니다. 시간이 흘러 수 많은 순교자가 생긴 씨앗이, 당시 제국의 눈에 볼 때 위험천만한 식사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식탁은 그전까지 알지 못했던 위대한 사귐을 보여주었습니다. 신분과 서열이 사라졌습니다. 힘 있고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로 마주 보았습니다. 너무나 낯설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교제입니다. 그 위대한 나눔이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정배교회가 이미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 점심 식탁에 끼리끼리란 없습니다. 나와 비슷한 여건의 편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함께 맛있게 밥을 드십니다. 매주 주일 점심, 식당에 들어설 때마다 저는 뭉클한 감동을 느낍니다. 부디 우리 교회가 이 세상의 식탁과 구별되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는 식사를 앞으로 더욱 풍성히 이루길 바랍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실천을 이어가길 소망합니다.
찬양과 칭찬의 조화
본문의 결론인 47절 함께 읽겠습니다.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방향을 확인합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향한 찬미, 옆으로는 온 백성에게 받는 칭송입니다. 이 때 ‘찬미’와 ‘칭송’을 좀 더 익숙한 단어 “찬양과 칭찬”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교회의 시작부터 함께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주님을 경배하는 찬양만 일방적으로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혹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만 지나치게 집착하지도 않았습니다. 둘 다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나님 찬양과 이웃의 칭찬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어느 한쪽만 있을 수 없습니다. 단지 오늘 본문을 포함한 사도행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이 일관되게 강조합니다. 가령 십계명에는 하나님을 향한 네 가지 계명과 이웃을 위한 여섯 가지 계명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도 성경 전체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높여 예배한다면 자연스럽게 선한 삶의 열매를 맺고 향기를 풍기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사랑과 섬김을 실천합니다. 아무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굶주리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비웃지 않습니다. 기꺼이 먹을 것을 나누고 필요를 채우고 아픈 몸과 마음을 품어 안아 줍니다. 그 모습이 주위 사람의 칭찬으로 이어집니다. 그 결과 주님께서 날마다 교회로 구원 받는 사람들 더해 주셨습니다.
순서를 놓치면 안 됩니다. 흔히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는 내용에 더 눈길을 뺏깁니다. 그렇게 당시 교인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사실에 흥분합니다. 솔직히 담임목사로서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정배교회에 부임해서 몇 배로 부흥했다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마땅히 꿈꿀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위험합니다. 자칫 숫자에 연연해 본질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세기 교회의 교인 수가 급격하게 늘어난 것은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사람이 억지로 해낼 수 있는 업적이 아닙니다. 그럴듯한, 분주한 이벤트와 프로그램으로 이뤄낸 실적도 아닙니다. 그저 교회의 본질인 말씀과 교제와 예배와 기도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 가운데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이웃에게 칭찬받을 만한 복음의 삶을 실천했습니다. 그 결실로 성도의 수가 늘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 보기에 그럴듯한 성과가 아니라 진정 중요한 핵심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로 신앙과 삶의 조화입니다.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새벽기도회와 수요 성경 공부에 가급적 꾸준히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즐겁게 가까이 하고 찬양하며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이는 예배를 삶의 중심에 두시길 바랍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주위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칭찬받을 만해야 합니다. 겸손히 자신을 비우고 섬겨야 합니다. 로마 제국의 오만처럼 힘을 드러내고 과시하기 보다는 기꺼이 낮아질 줄 알아야 합니다. 배려하고 물러서서 약한 사람들을 오히려 높이고 품어야 합니다. 그렇게 교회의 겉모습에 연연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부활 공동체의 본질을 깊이 헤아리고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법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으실 줄 믿습니다.
어떤 다짐
우리나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로 결심하고 신앙 고백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다짐을 글로 적었습니다.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험한 말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외에 많이 언급하는 또 다른 중요한 결심이 있습니다. 혹시 짐작하시겠습니까? 바로 “누구나 함께 밥을 먹겠다.”는 다짐입니다.
지금 우리와 다른 시대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철저한 계급 사회였습니다. 신분을 나누고 차별했습니다. 하지만 양반과 천민,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교회 안에 모여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그 결단과 헌신이 나라를 새롭게 했습니다. 우리가 1907년 평양대부흥 못지않게 주목하고 이어가야 할 찬란한 신앙 유산입니다.
거창한 결단으로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1세기 교회 모습을 문자 그대로 따라 하자는 게 아닙니다. 교회 재산을 다 팔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장 노숙자를 교회로 데려와 같이 밥 먹자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연약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이는 너희를 위해 찢기는 내 몸”이라고 말씀하시며 빵을 떼어주신 놀라운 사랑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당신을 배신하고 떠난 제자들을 먹이셨습니다. 그 식탁에 우리 또한 초대 받았습니다. 이 가슴 벅찬 은혜를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그 믿음을 함께 모여 고백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온전한 찬양을 드리며 참으로 칭찬받는 공동체가 되길 꿈꿉니다. 그 결과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따라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지는 정배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
찬양받기 합당하신 주 하나님.
오늘 주신 말씀으로 교회의 본질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하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오순절의 화려한 불길에 머물지 않고, 말씀에 집중하는 성숙한 신앙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별 없이 함께 교제하고 예배하며 기도하는 건강한 공동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할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로부터 칭찬받는 교회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