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4장 28~35절 “어둠을 가르고”
2026년 4월 19일, 부활절 셋째 주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24장 28~35절 “어둠을 가르고”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어둠에 빠진 화가
17세기 네덜란드에 한 청년 화가가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입니다. 스물다섯 살에 이미 암스테르담 최고의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시장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귀족으로 자란 아내 사스키아는 평민 출신인 남편의 성공을 적극 도왔습니다. 덕분에 렘브란트는 젊은 시절, 인생의 화려한 성취를 누리며 각종 사치품을 사 모았습니다.

화면에 보시는 그림은 렘브란트가 34살에 그린 자화상입니다. 난간에 오른팔을 걸치고 몸을 기댄 자세에서 그의 자신감이 가득 드러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거장들의 초상화를 모방해 자기를 그렸습니다. 자신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당당하고 거침없는, 청년 화가의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렘브란트에게 금세 어둠이 덮쳐 왔습니다. 세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숨을 거두었습니다. 계속된 출산으로 몸이 쇠약하진 아내는 남편과 어린 아들 하나를 남겨두고 갑자기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재정이 파탄 나고 전 재산이 경매에 부쳐졌습니다. 인생의 급격한 내리막을 타고 한 없는 어둠에 빠져 들었습니다.

지금 보시는 그림은 렘브란트가 46살에 그린 자화상입니다. 앞서 본 34살의 자화상과 극명하게 다릅니다. 화려한 귀족 복장이 아닌 낡은 작업복을 입었습니다. 고된 삶의 흔적이 담긴 거친 피부를 두꺼워진 붓 터치로 표현했습니다. 그를 둘러싼 인생의 어둠이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당당하게 양손을 허리에 집고 정면을 바라봅니다. 처절한 실패와 고난 속에 만난 하나님이 그의 얼굴에 빛을 드리워 주었습니다.
눈의 어둠
오늘 읽은 본문에도 깊고 깊은 어둠에 사무친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먼저 누가복음 24장 13~16절 함께 읽겠습니다.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출발해 엠마오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약 11킬로미터 거리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직선거리로 양수리에 있는 ‘세미원’까지입니다. 성인 남성의 걸음으로 두세 시간은 족히 걸어야 하는 먼 길입니다.
두 사람은 터벅터벅 길을 걸으며 슬픔에 잠겨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4절은 대화 주제를 알려줍니다. 바로 “이 모든 된 일”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사건입니다. 충격과 공포가 그들의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었던 구원자가 인간이 만든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세계관 전체가 무너지는 어마어마한 충격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16절에 보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선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부활의 몸을 덧입으셨기 때문입니다. 그전과 모습이 완전히 다릅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신약 원문은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눈이 가려졌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단순히 시력이 나빠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강하게 붙잡다, 억눌러 막다’라는 의미입니다. 무언가 강력한 외부의 힘이 그들의 시야를 적극적으로 차단했습니다. 이런 표현을 가리켜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라고 부릅니다. 두 제자의 눈을 철저히 가려 당신을 못 알아보게 하는 예수님의 명백한 의도를 표현합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얼핏 잔인한 숨바꼭질처럼 보입니다. 깊은 어둠에 잠긴 그들에게 빨리 진실의 빛을 비추는 게 당연한 것 같습니다. 얼른 당신을 드러내고 ‘내가 바로 너희가 따랐던 그 예수’라고 알려 주는 게 맞아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정반대로 부활의 빛을 감추셨습니다.
여기에 담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탄광 사고로 오랫동안 지하 깊은 곳에 갇혀 있다가 구출된 광부를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관련 TV 뉴스 화면을 기억하실 겁니다. 구조대원들은 광부의 눈을 가린 채 땅 위로 끌어올립니다. 계속 앞을 못 보도록 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랜 시간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갑작스러운 빛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칫 시력을 크게 잃을 수 있습니다. 그 대신 서서히 빛에 적응하도록 돕는 세심한 배려입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고 다윗 왕국을 재건할 강력한 정치적 군주를 예수님에게 기대했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 대부분이 바랐던 메시아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반대로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임 당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런 메시아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께서 곁에 계시지만, 그들의 어두운 눈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의 어둠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눈 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어두웠습니다. 22~23절 함께 읽겠습니다.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당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을 들려줍니다.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여인들이 부활 소식을 전했습니다. 천사들이 증언했습니다. 빈 무덤을 확인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루살렘을 등지고 걸었습니다.
이 장면을 주목해야 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내면이 너무나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마주하고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뒤틀린 기대와 욕망이 훨씬 더 컸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을 둘러싼 두 번째 어둠, ‘마음의 어둠’입니다.
자연의 어둠
이뿐만이 아닙니다. 두 제자는 길에서 예수님과 한 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좀 더 멀리 가려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고 함께 여관에 들어가자고 권유했습니다. 이 때 그들이 언급하는 자연 배경을 주목해야 합니다. 29절을 새한글성경으로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29 그들은 억지로 권하며 말했다. “우리와 함께 머물러 주세요. 해 질 녘이고 이미 날도 저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머무시려고 들어가셨다.
이 장면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습니다. 그들 앞에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습니다. 석양으로 길이 붉게 물들고 그림자가 길어집니다. 이윽고 깜깜한 밤이 찾아 왔습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오늘날 같은 전깃불과 치안 체계가 없었습니다. 밤은 단지 낮이 끝난 시간이 아닙니다. 암흑 그 자체입니다. 강도와 짐승을 비롯한 온갖 위험에 노출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습니다.
두 사람은 이미 눈과 마음이 어두웠습니다. 거기다가 날도 어두워졌습니다. 그들은 겹겹이 에워싼 암흑 속에서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모든 어둠을 가르고 다가오셨습니다. 그들을 흑암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어둠의 틈새를 열어 젖히고 따스한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몸과 마음과 주변 상황을 차분하게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여러 모양의 어둠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흑암의 파도를 만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숨이 턱 막힐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어둠을 가르고 다가오신 예수님
앞서 살펴본 15절을 새한글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15 그들이 대화를 나누며 의논하고 있을 때였다. 예수님이 몸소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셨다.
예수님은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거대한 어둠을 뚫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몸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나서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여기서 ‘가까이 다가가다’는 말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접근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누가복음은 이 단어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에 사용합니다. 단지 예수님이라는 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자체가 두 제자에게 찾아왔습니다. 주님의 신실한 다스림이 그들을 붙잡았습니다.
그렇게 함께 하신 예수님은 슬픔과 절망에 잠겨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셨을까요? 27절 함께 읽겠습니다.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구약 전체에 흐르는 진리를 통해 당신의 복음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말씀의 의미를 새롭게 풀어 주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왜 못 자국을 바로 보여주지 않으셨을까요? 상식적으로 그게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두 사람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곧바로 이해시킬 수 있는 제일 쉽고 명쾌한 길입니다.
하지만 부활은 단순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신비로운 사건이 아닙니다. 온 세상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의 정점입니다. 단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신기한 이적을 목격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강력한 체험은 복음을 오해하게 합니다. 주위에서 종종 발견하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단이 악용하는 수법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말씀입니다. 어둠을 부수는 십자가를 온전히 깨닫기 위해 무엇보다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진리로 어둠을 내몰아야 부활의 빛을 가득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펼쳐 묵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야 연약하게 흔들리는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영원한 복음 위에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풀어주시는 성경을 통해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은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에게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옵니다. 30~31절 함께 읽겠습니다.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여기서 예수님의 네 가지 동작의 흐름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셨습니다.’ 우발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어디서 보지 않으셨습니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어른만 오천명을 먹인 오병이어.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성찬을 베푸실 때 하신 예수님의 동작과 똑같습니다.
두 사람은 잡히시던 날 밤과 동일한 모습으로 빵을 떼어주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눈을 떴습니다. 이 동작은 성경에서 수동태로 기록됩니다. 그들이 자기 의지와 노력으로 눈을 뜬 게 아닙니다. 어둠에 사로잡혔던 두 제자의 눈을 하나님께서 밝아지게 하셨습니다. 마침내 모든 암흑을 가르고 참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역설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짓궂은 장난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을 버려두고 떠난 게 아닙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서 더 이상 그곳에 머물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마침내 부활을 생생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만을 위해 부활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또다시 빵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면서, 그 거룩한 일상의 식탁을 통해 위대한 구원을 선언하셨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기념하고 주님의 함께 하심을 고백하기 위해 지난 부활주일에 성찬을 나누었습니다.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엠마오는 먼 옛날 예루살렘 근처의 어느 마을이 아닙니다. 성찬을 나누는 곳이 바로 엠마오입니다. 빵과 잔에 성령님께서 함께하시어 예수님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루터와 칼뱅이 매주 성찬식을 한 이유입니다. 우리 교회도 가능한 자주 성찬식을 하려 합니다. 성찬이라는 종교 의식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가장 평범한 일상의 자리에서 부활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사랑을 성찬을 통해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어둠을 뚫고 나아갈 참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빛을 품고 어둠을 가르는 제자들
그 뒤에 일어난 제자들의 변화를 살펴 보겠습니다. 33~35절을 화면 보시면서 새한글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33 두 사람이 바로 그 시간에 일어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가서 보니, 그 열한 명과 또 그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34 그들이 말했다. “주님이 진짜 일으킴받아 살아나셨어요! 시몬에게 나타나 보이셨어요!” 35 그러자 그 두 사람은 길에서 있었던 일과 예수님이 빵을 떼실 때에 자기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미 날이 저물고 밤이 되었습니다. 몹시 위험한 밤길을 지났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에는 스승을 못 박아 죽인 적대자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도망쳐 나왔던 곳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참 빛이신 주님께서 두 사람의 모든 어둠을 가르고 다가오셨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자기들을 둘러싼 짙은 암흑의 벽을 무너뜨리고 찾아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두 제자 또한 담대히 어둠을 헤치고 나가 빛을 품고 나아가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몸소 찾아오셨음을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어떤 어둠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흑암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밀어낼 수 없습니다. 그 모두는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비추시는 영광 앞에 무너져 내릴 뿐입니다. 그 빛을 가슴 깊이 품고 여러분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어둠을 뚫고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렘브란트, “엠마오의 저녁 식사”
화가 렘브란트는 사랑하는 가족의 연이은 죽음과 가난 그리고 외로움과 비난 속에 무척 힘겨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고통 가운데 성경을 진지하게 읽으며 자신의 신앙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날 밤, 제자들과 식사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애정을 담아 그렸습니다. 바로 화면에 보시는 이 작품입니다.

렘브란트가 1648년에 그린 “엠마오의 저녁식사”입니다. 여기에는 극적인 묘사가 없습니다. 화면 전체에 부드럽고 성숙한 침묵이 흐릅니다. 번쩍이는 광채가 아니라 은은한 빛이 떡을 떼시는 예수님으로부터 퍼져나옵니다. 특별히 주님의 얼굴을 주목해야 합니다. 확대한 그림 보여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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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는 부활하신 주님을 신비감으로 가득한 초월적인 인물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창백한 유령처럼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십자가의 어둠을 통과한 고통과 고뇌의 흔적이 그늘진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그 모든 아픔을 끌어안고 이루어낸 부활의 위대한 영광을 깊은 울림을 담아 보여줍니다. 렘브란트의 눈부신 신앙입니다. 자신을 둘러싼 참혹한 어둠 속에서 피워낸 찬란한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을 만큼 온통 암흑으로 둘러싸여 있을 지라도 결코 절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모든 어둠을 가르고 우리 곁에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함께 길을 걸으시어 흑암을 빛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못 자국난 손으로 건네시는,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몸과 마음 깊이 받아들여 어둠을 뚫고 나아가 부활을 증언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기도
어둠을 가르고 참 빛으로 오신 주 하나님.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절망에 사무쳐 길을 걸었습니다. 고난 가운데 눈이 가려지고 마음이 둔해졌습니다. 밤처럼 다가오는 시련 가운데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런 저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어 부활의 진리를 일깨우신 주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십자가에서 찢기신 몸과 흘리신 보혈을 일상의 식탁에서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깊은 뜻을 겸손히 헤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흑암을 뚫고 일어나 부활을 전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고 문헌
발터 니그. 『렘브란트 영원의 화가』. 칠곡: 분도출판사, 2008.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교육자원부. 『100주년 기념 성경주석: 누가복음』.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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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es, Serene. Trauma and Grace: Theology in a Ruptured Worl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Van der Kolk, Bessel. The Body Keeps the Score: Brain, Mind, and Body in the Healing of Trauma. New York: Viking,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