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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장 1~9절 “떠남 그리고 예배”

2026-03-01
정대진 목사

정배교회 주일예배 인도, 목사 정대진

사순절 둘째 주일, 2026년 3월 1일

창세기 12장 1~9절 “떠남 그리고 예배”


말을 거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말을 건네셨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아브라함 한 사람은 물론이고 온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을 보여줍니다. 바벨탑이 무너지고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미련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금 구원 계획을 펼치셨습니다. 그 시작에 아브라함과 만남이 있습니다. 


이렇듯 어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가까이 다가가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경우 누가 누구에게 찾아가 말을 걸었을까요? 본문 1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은 한국어 어순을 살려 ‘이르시되’라는 동사가 나중에 나옵니다. 하지만 구약 원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마르>가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만남을 기록한 장면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먼저 입을 여신 대화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개개인의 삶에 어떤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으십니까? 입학, 취업, 결혼, 첫 아이 출산 등 여러 사건이 떠오르실 겁니다. 물론 모두가 각별한 의미로 다가오실 겁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은혜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나에게 찾아와 말을 건네셨다는 사실입니다.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유한하고 무능한 죄인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말을 건네시고 대화를 이어가시며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은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뭔가 거창하고 신비로운 체험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영혼 깊이 확고 부동한 신념을 심어주는 경험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방황하지만, 때때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그분과의 첫 만남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부모님께서 들려주신 성경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혹은 가까운 누군가가 함께 교회에 가자며 건넨 손길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나도 모르게 발길을 예배당으로 옮기게 한 어떤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모양과 색깔은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만남과 사귐의 시작은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오시고 말을 건네셨기에 이루어진 구원입니다. 아무런 자격 없는 죄인을 향한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본질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각자를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을 보다 깊이 헤아릴 수 있습니다.


우르와 하란

동시에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먼저 걸어오신, 하나님 말씀의 내용입니다. 분명 사랑으로 다가오셨지만 그 내용은 엄중합니다. 바로 “가라”입니다. 한글 성경은 우리말 어법대로 “가라”가 가장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러나 구약 원문은 다릅니다. “가라!”라는 명령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깨닫습니다. 인간에게 다가오신 주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 따르는 순종입니다.


본문의 경우 “가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디로 가야하는 지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곳을 가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게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무엇으로부터’ 떠나야 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를 언급하셨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입니다. 사실 이 셋은 결국 같은 개념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세 번에 걸쳐 변형해 반복하며 강조하셨습니다. 


셋 중 핵심인 ‘고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고향’이라는 말은 의역입니다. 뜻을 풀어서 옮긴 번역입니다.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에레츠>의 1차 의미는 “땅”입니다. 그렇다면 그 땅은 어디를 가리킬까요?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1장의 마지막 단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만나기 전에 있었던 가족의 역사를 알려줍니다. 그중에서 11장 31절 함께 읽겠습니다.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여기에 보면 두 개의 땅 이름이 등장합니다. ‘우르’와 ‘하란’입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아브라함이 떠났던 고향은 어디일까요? 정답은 11장 28절에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고향을 “갈대아인의 우르”라고 분명히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아브라함은 이미 우르를 떠나 하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또다시 우르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가 우르를 떠났지만 여전히 우르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위해 고대 서아시아의 지리와 종교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화면에 보시는 지도를 통해 확인하듯이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아래쪽에 있습니다. 반면에 하란은 메소포타미아의 북쪽에 위치합니다. 둘 사이는 직선거리로만 대략 1000km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아라비아 사막이 있어 보통 강줄기를 따라 돌아갑니다. 그럴 경우 1200km가 훌쩍 넘는 먼 거리입니다. 참고로 양평에서 부산까지가 320km입니다. 양평과 부산 사이를 네 번이나 오가야 하는 매우 먼 거리입니다. 게다가 많은 가족과 가축을 끌고 걸어가야 합니다. 최소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 걸리는 무척 고단한 여정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왜 이토록 무모한 선택을 했을까요? 일단 이러한 정황은 그가 상당한 재력과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걸 암시합니다. 그가 살았던 도시 우르는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왕국의 중심 도시입니다.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매우 화려한 문명을 꽃피운 지역입니다. 




이를 대표하는 유적이 지금 화면에 보시는 “지구라트”입니다. 매우 친숙하실 겁니다. 그런데 이 지구라트는 달 신을 숭배하기 위해 세운 건물입니다. 이러한 우르에 심각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도무지 살 수 없는 황폐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무 근처 적당한 곳으로 옮길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지 않고 굳이 북쪽 끝, 멀리 있는 도시 하란으로 향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 보시는 사진은 하란에 발굴한 신전 비석입니다.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신전을 세운 왕 “나보니두스”(Nabonidus, 재위 기원전 556~539년)입니다. 가장 가까이에 가장 크게 새겨진 초승달 문양은 달의 신 “씬”(Sîn)을 가리킵니다. 하란의 달 숭배가 얼마나 강력했는 지를 확인하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살았던 두 도시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달 신 숭배’입니다. 따라서 데라는 우르를 떠나 하란에 살면서도, 여전히 마음은 우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달 신을 섬기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확고히 지켰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를 비롯한 수많은 가족과 친척이 우상 숭배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달 신이 안겨주었다고 착각하는, 화려한 문명과 풍요에 취해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떠나야 할 곳은 어디인가?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상황을 오늘날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뉴욕 맨하탄 중심 사는 가족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거액의 돈을 굴리는 유능한 펀드 메니저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에게 큰 어려움이 닥쳐왔습니다. 부득이 살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야 합니다. 많은 선택지가 있습니다. 이곳 양평처럼, 뉴욕 근교의 아름다운 전원 마을에 갈 수도 있습니다. 혹은 한적한 중소 도시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굳이 멀리 있는 또 다른 금융도시로 떠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과 수고를 감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그 가족의 핵심 가치는 무엇일까요? 바로 돈입니다. 돈과 매우 밀접한 도시의 문화를 추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많은 돈을 모으고 그것을 불리는 데 인생의 목표를 두었다고 과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지금껏 살아왔던 환경이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다가오셔서 말을 건네십니다. 그가 자라왔던 화려한 풍요로부터 떠나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십니까?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 구원의 역사가 예수님을 거쳐 나에게로 다가왔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역시 같은 명령 앞에 마주 서 있습니다. 가만히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떠나야 할, 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은 무엇입니까?


실제 물리적인 자기 고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나를 강력히 사로잡은 영적 실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나를 기꺼이 움직이게 하는, 어떤 수고도 감수하고 멀리 이동하게 하는 탐욕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돈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권력일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눈부신 명예일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오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을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품는 욕망 자체를 부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저를 포함해 누구나 ‘우르’의 화려함에 눈길이 뺏기기 마련입니다. 가능하면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며 사길 소망합니다. 


그러한 욕구 자체는 지극히 당연합니다. 다만 그러한 탐욕이 하나님을 대신 해서는 안 됩니다. 삶의 근본이자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그 순간 아브라함의 둘러쌌던 이 시대의 ‘달 신’이 되어 우리 영혼을 휘어잡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떠나, 가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되어야 할 것

그렇다면 주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무엇이 되게 하실까요? 2절 함께 읽겠습니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고이>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아브라함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명확하게 약속하셨습니다. “큰 민족”을 이룰 것입니다. 나이가 들었지만 당장 아들 하나도 없는 그에게는 너무나 감격 적인 언약입니다. ‘민족’이라는 것은 가족을 넘어 훨씬 많은 숫자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민족의 ‘성격’입니다. 


관련해서 “민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가리켜 말씀하실 때, 히브리어로 <암>을 사용합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민족을 가리킬 때는 히브리어 <고이>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훗날 아브라함이 이룰 민족을 두고 <암>이라고 적는 게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런데 <암>이 아니라 <고이>라고 언급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두 히브리어 단어, <암>과 <고이>의 본래 의미 때문입니다. 단순히 이스라엘이냐 아니냐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암>은 한 마디로 언약 공동체입니다. 같은 믿음을 지닌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사실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손들이 자연스럽게 지니는 개념입니다. 이와 달리 <고이>는 “통치와 영토”를 강조하는, 구체적인 삶의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가리켜서 “커다란 고이”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님은 그들이 단지 같은 신앙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이방인 사이에 살아가는 현실 한 가운데서 삶의 구조를 갖추라는 의미입니다. 우상 숭배로 가득한 가나안 땅에서 신앙 정체성을 굳게 지치며 하나님 나라를 넓혀 가라는 뜻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들입니다. 교회로 함께 모여 신앙 공동체를 이룹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의 정체성을 소중히 여깁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부르시고 구하시는 백성들에게 훨씬 더 놀랍고 위대한 꿈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넓혀 가는 것입니다. 


마치 가나안 땅에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온통 탐욕을 숭배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이 자기들끼리만 모여 동아리를 이루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세상과 담을 쌓고 자기들만의 틀에 갇혀 있는 것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굳게 땅을 딛고 일어나 치열하게 삶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루어 가길 기대합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가정과 직장과 학교에서 복음의 가치관으로 세상의 거짓과 폭력을 무너뜨리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고이를 이루는 현실, 그리고 예배

물론 이러한 부르심은 너무나 어려운 숙제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는 어떠했을까요? 떠나서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큰 민족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떤 무게로 다가왔을까요? 6~7절 함께 읽겠습니다.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아브라함은 부르심에 순종하여 길을 떠나 세겜 땅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서 세겜은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 계곡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따라서 좁은 땅입니다. 거기서 아주 오래전부터 가나안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거기에 ‘모레’라는 이름을 지닌 상수리 나무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에 도착하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여기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서 가라고 명령하셨지만 정작 어느 곳으로 가라고는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정처 없이 내디딜 뿐이었습니다. 몹시 막막하고 불안한 여정입니다. 그러다 도착한 세겜 땅에서 하나님은 불쑥 나타나 바로 그곳이 당신이 준 땅이라고 알려줍니다.


아브라함은 무척 황당했을 겁니다. 부르심을 따라 나아간 자신에게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주겠다고 말씀하신 땅은 가나안 사람들로 이미 가득한 곳입니다. 6절에서 굳이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라고 언급한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이 겪은 난감한 상황을 강조하는 기록입니다. 주님은 많은 손해와 위험을 무릅 쓴 그에게 넓고 평탄한 땅을 안겨 주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그를 경계하고 위협하는 가나안 사람들로 사이로 몰아 넣으셨습니다.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넓히는, “큰 민족”을 이룰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를 통해 다시금 확인합니다.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은 공백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를 미워하고 경계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 한복판에서 선포됩니다. 거친 삶의 과정을 거쳐갑니다. 온통 상처입고 비난 당하고 공격 당하는 현실 속에서 주님의 뜻에 귀 기울이며 언약에 순종해야 합니다.


너무나 무겁고 버거운 부르심입니다. 동시에 놀라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르를 떠나는 손해를 겪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위축될 때, 후회와 염려로 괴로울 때, 그 때야말로 하나님의 찬란한 언약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계획은 위기 가운데 오히려 명료하게 빛 났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결단을 주목해야 합니다. 8절을 새한글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브라함은 순례자에서 예배자로 거듭 났습니다. 소소한 듯 하지만 바벨탑과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자기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보통 자기 소유를 드러내는 건축물을 세우려는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내세우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우선 제단부터 쌓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 하였습니다. 이 때 그들 주위에는 우상을 섬기는 가나안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거듭 기억해야 합니다. 살벌한 긴장 속에 견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주 되심을 진심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가장 힘들 때 드린 예배를 소중히, 기뻐 받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해 이 땅에 당신의 통치를 넓혀 가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헌신을 거듭 기억하는 거룩한 절기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 땅에 오신 놀라운 희생을 묵상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시어 온통 당신을 조롱하고 위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이셨습니다.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배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우리가 믿고 따를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진정 우리가 예배할 대상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에게 가까이 다가오시어 말을 건네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헛된 탐욕으로 쌓은 신기루와 모래성을 떠나 신앙의 여정을 걸으시길 바랍니다. 그 어떤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만 예배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우리의 모든 순종을 기뻐 받으시어 이 시대의 아브라함으로 세워 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  

사랑으로 자녀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입니다. 든든한 울타리로 여기며 강렬히 욕망했던 대상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은 우상들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어리석은 탐욕으로 저희 발목을 붙잡았던 이 시대의 우르에서 벗어나길 소망합니다. 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나 주님과 동행하며 믿음의 걸음을 내딛게 하여 주시옵소서. 

숱한 위험과 위협으로 가득한 현실 속에서 담대한 예배자로 살길 소망합니다. 저희를 ‘큰 민족’으로 세우시는 주님의 계획을 신뢰합니다.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손길을 바라보며 순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고문헌: 김세권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서울: 크리쿰북스, 2017) 87~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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