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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1~11절 "어둠의 어깨를 짚고"

2026-03-08
정대진 목사

사순절 셋째 주일, 2026년 3월 8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인도, 목사 정대진

로마서 5장 1~11절 "어둠의 어깨를 짚고"


어둠의 수렁에서

시 한 편을 소개 해드리겠습니다.



- 임보


어둠을 탓하지 말라

모든 빛나는 것들은

어둠의 어깨를 짚고

비로소 일어선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들이 더 반짝이듯

그렇게

한 시대의 별들도

어둠의 수렁에서 솟아오른다


제가 즐겨 암송하는 시입니다. 마음에 무겁고 힘들 때마다 큰 위로를 받고는 했습니다. 내용 자체도 깊은 울림이 있지만 이 시를 처음 접했던 상황 때문에 더욱 저에게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저는 이 시를 군대에서 읽었습니다. 여러모로 많이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제 약함을 처절히 마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겪어왔고, 또 현재 마주하고 있는 어둠에 압도되었습니다. 자신이 무척 초라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거대한 절망 앞에 너무나 무력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별”이라는 이름의 시 한 편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몹시 뭉클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어둠의 어깨를 짚고 일어날 용기를 얻었습니다. 


아직 연약한 죄인

오늘 본문 말씀은 위대한 복음을 담고 있습니다. 1절 첫 단어는 “그러므로”입니다. 관련해서 로마서 전체의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는 크게 4부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 중 첫 번째인 1부는 1~4장입니다. 오늘 읽은 5장 1절은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면서 앞선 1~4장의 핵심을 요약합니다. 예수님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는 너무나 기쁘고 복된 소식입니다.


이러한 복음은 동시에 어두운 진실을 품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멀어졌던, 한 없는 암흑에 사무친 존재입니다. 본문 6절과 8절 함께 읽겠습니다.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바울은 구원 받기 전 인간이 어떠했는 지를 한 단어로 묘사합니다. 바로 연약함입니다. 무엇에 연약하다는 말일까요? 죄에 대한 무력함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절망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세상을 뒤덮은 악한 능력을 도무지 이겨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여기까지 들으시면 익숙한 종교 언어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막연하게 관념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이 거대한 자연재해가 일어났습니다. 마실 물을 구하기 힘듭니다. 전염병이 돌고 각종 위험에 그대로 노출돼 있습니다. 온 지구를 압도하는 재앙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재산과 지식과 능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철저히 무능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구원하시기 전 본래 사람이 놓인 처지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습니다. 희망의 원천인 주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아득한 죽음만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연약한 죄인을 위해 놀라운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고자 마음을 먹으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너무나 감격적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충격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단지 교리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막연한 신념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앞서 드린 재난 상황을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온 마을을 병들게 한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 누군가 대신 우물 속에 들어갔습니다. 혹은 죽을 걸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맹수 앞으로 달려나간 사람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그의 희생으로 많은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해낸 대상이 충분히 대가를 기대하고 보상을 바랄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연약한 죄인입니다.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수치스런 복음

이러한 복음이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감격적으로 들립니다. 내가 무력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익숙하게 받아들입니다. 특히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면 더욱더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편지를 받아 든 로마 사람들에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관련해서 당시 로마 시민들이 맹목적 추구하는 가치가 ‘명예’라는 사실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들은 명예를 위해 전 재산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명예와 반대되는 ‘수치’스런 상황을 무척 혐오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우리가 아직 죄인”이라는 바울은 말은 몹시 듣기 거북했을 겁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자체가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부끄러움을 안겨줍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십자가는 세련되게 윤색한 장식입니다. 경건한 종교 용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끔찍하게 저주스런 사형틀입니다. 최악의 혐오를 상징합니다.


주전 73~71년에 로마에서 있었던 스파르타쿠스(Σπάρτακος)의 반란에 대해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검투사 스파르타쿠스는 수만 명의 노예들과 함께 로마 제국을 향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온 나라를 흔드는 심각한 위협을 안겼습니다. 그러다 2년 만에 겨우 진압되었습니다. 패배한 노예들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록에 따르면 약 6000명의 노예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사형 방법은 십자가형입니다. 반란이 시작된 도시 카푸아에서 로마에 이르는 200km 거리에 십자가 육 천개가 세워졌습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거리입니다. 거기에 대략 30~40m 마다 시신이 달린 십자가가 하나씩 서 있었습니다. 그 길을 오가는 수 많은 사람들은 나무위에 매달려 내뱉는, 죄수들의 소름끼치는 신음을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시체썩는 고약한 냄새를 오랫동안 맡았습니다. 온 로마 제국에 강력한 충격을 안겨준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인지, 그 위에 벌거벗긴 채 매달려 죽음을 맞이하는 게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온 로마 사람들은 경악하며 생생히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대한 그 시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어떤 자랑

복음은 이러한 보편적인 생각을 뒤집습니다. 모두가 부끄러워하는 걸 자랑합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자랑하는 걸 부끄러워합니다. 2절 함께 읽겠습니다.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서 ‘즐거워하느니라’라고 옮긴 헬라어는 <카우카오마이>입니다. 본문에서는 “자랑”으로 번역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2절을 새한글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2 또한 그분을 통해서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자랑스러워합니다.


바울은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분, 즉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 안으로 들어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 것을 두고 무척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분을 통해서”라는 말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정확하게는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임당하신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하기에 바울은 한 번 더 반복하며 강조합니다. 11절 화면 보시면서 새한글 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11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도 “자랑”을 언급합니다. 그 자랑의 근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짧은 호칭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위대한 신앙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무 위에 달려 한 없이 초라하게 피를 흘리고 숨을 거두셨기에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 하였습니다. 더 이상 죄악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지 못합니다. 큰 영광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앞서 스파르타쿠스 반란으로 설명 드렸듯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과 정반대에 있는 때문입니다. 너무나 비참한 실패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만히 예수님의 인생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온통 좌절 투성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는 강력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인기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걸 당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왕이 되어 찬사를 받으며 군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거부하며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사람들의 모욕과 폭력을 겪으셨습니다. 심지어 열두 제자조차 아무도 주님 곁에 남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패배자 그 자체입니다. 한없는 멸시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를 입었습니다. 지극히 초라하고 별 볼일 없는 죄인을 향한 주님의 신실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화평을 얻었습니다. 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온 우주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눈부시게 찬란한 영광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자랑해야 할 복음입니다.


동시에 거듭 명심해야 합니다. 그 시작은 십자가입니다. 철저한 수치입니다. 바울은 자랑의 기준을 완전히 뒤엎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과연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이 추구하는 명예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까? 반드시 유념해야 합니다. 자랑에는 그 사람의 정체성이 담겨 있습니다. 자랑의 기준으로 삶의 궁극적인 지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며 무엇을 가장 자랑했는지를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수입을 자랑하셨습니까? 승진 혹은 높은 실적을 자랑하셨습니까? 자녀가 좋은 대학 혹은 직장에 들어간 것을 자랑하셨습니까? 부끄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 자랑이 영혼을 옭아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드높이 거대한 것만을 자랑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동시에 자랑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무엇을 이루었느냐보다 무엇을 나누었는지를, 얼마나 높이 올랐는지 보다 얼마나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지를 진정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내가 어떤 일에, 혹은 어떤 상황에 으쓱거리는 지를 돌아 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어떤 처지에 괴로워하고 움츠러드는 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 모든 판단과 행동에 영혼의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확증하는 사랑

사실 너무나 어렵습니다. 뒤틀린 기준으로 자랑하거나 부끄러움에 빠집니다. 왜곡된 판단을 되돌리기가 매우 곤란합니다. 우리는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욕망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게 할까요? 5절 함께 읽겠습니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 나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성령님을 오해합니다. 뭔가 화려하고 그럴듯한 이적을 행하시는 분으로만 여깁니다. 자기 욕심을 이루어 주시는 신비로운 존재로 왜곡시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으로 다시금 확인합니다.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가장 본질적인 사역은 다름 아니라 우리 영혼을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십자가에 담긴, 우리 주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깨달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관련해서 같은 주제를 반복하는 8절, 새한글 성경으로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8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실히 증명해 보이십니다. 곧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깊고 깊은 우울과 절망에 빠진 우리를 절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득한 어둠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자녀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이 세상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명확히 나타내 보이시는 걸 두고 바울은 ‘현재형’으로 적었습니다. 즉,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둔 과거의 한 순간 만이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사랑을 증명해 보이십니다. 성령님을 통해 날마다 마음 깊이 일깨워 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도 예외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사랑 받을 만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주님 앞에 결코 마주 설 수 없는 온갖 허물로 가득합니다. 무력하게 어둠만 탓하는 못난 모습만 보입니다. 아무런 희망을 찾지 못한 채 그저 절망 속에 쓰러질 때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시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희망으로 이어지는 환난

이와 같은 믿음을 고백하며 지켜야 할 중요한 삶의 자세가 있습니다. 3, 4절 새한글 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큰 어려움들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큰 어려움 가운데 견디는 힘이 생긴다는 것을요. 4 또 견디다 보면 굳세지고, 굳세지다 보면 희망이 생긴다는 것을요.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서 세 번이나 나오는 핵심 단어가 있습니다. 개역개정성경에 ‘즐거워하다’로 옮긴 ‘자랑’입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2절과 11절은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 바울은 전혀 뜻밖의 대상을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큰 어려움”입니다. 개역개정성경은 “환난”이라고 적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을, 큰 어려움을 자랑할 수 있으십니까? 너무나 어렵습니다. 누구나 부끄럽게 여기며 감추려 합니다. 성장과정에서 겪은 결핍, 돈과 성공에 대한 크나큰 상실과 좌절 또는 관계 속에서 당한 폭력과 굴욕을 어떻게 해서는 남들 모르게 숨기려 합니다. 지극히 자연스런 본능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외칩니다. 우리는 환란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짧게 줄이면 환란은, 큰 어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안겨줍니다. 보편적인 상식으로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힘든 일을 겪을 때 희망 대신 절망에 빠지는 게 일반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바울이 살던 시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소망은 불확실한 미래를 두고 거는 기대를 의미했습니다.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지만 다가오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을 뜻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는 정반대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앞으로 명확히 일어날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희망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통해 놀라운 사랑을 발견합니다. 바울은 이로 말미암아 분명히 드러날 희망을 담대히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구하신 하나님의 신실함을 신뢰하는 사람은 반드시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희망은 믿음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금 겪는 환난이 인내와 연단을 거쳐 소망을 이룬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비로소 일어서다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한 시를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 임보


어둠을 탓하지 말라

모든 빛나는 것들은

어둠의 어깨를 짚고

비로소 일어선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들이 더 반짝이듯

그렇게

한 시대의 별들도

어둠의 수렁에서 솟아오른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둠을 탓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모든 어둠은 어깨를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손길이 미치지 못합니다. 그렇게 어둠의 수렁에 잠긴, 죄인인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을 분명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해 어둠의 어깨를 짚고 일어나 그 어떤 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별을 반짝이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참 소망의 주 하나님

어둠의 수렁에 빠진, 연약한 죄인을 구하시려 아들을 보내신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죄인을 위해 죽으시어 날마다 확실히 증명해 보이신 놀라운 사랑을 높여 찬양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며, 인생의 그 어떤 큰 어려움에도 희망을 품는 신실한 자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고문헌

김도현 『나의 사랑하는 책 로마서』(서울: 성서유니온, 2014)

잭슨 W. 『동양의 눈으로 읽는 로마서』(서울: IVP, 2022) 

비벌리 로버츠 가벤타 『로마서에 가면』(서울: 학영,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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