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장 1~12절 “빛으로 빚으사”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사순절 넷째 주일, 2026년 3월 15일
요한복음 9장 1~12절 “빛으로 빚으사”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어둠의 장벽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입니다. 제자들은 오랜 궁금증을 주님께 털어놓았습니다. “랍비님, 누가 죄를 지어서입니까? 이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매우 잔인한 질문입니다.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 사실을 전제로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습니다.
오늘날 이런 상황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질병이나 사고 등, 너무나 끔찍한 비극을 겪은 사람을 가까이 대할 때 무엇을 가장 주의해야 할까요? 원인과 책임을 따지는 태도입니다.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상황 때문이라며 타박하고 가르치려 들면 절대 안 됩니다. 그 대신 현재 그가 겪는 아픔에 주목하고 공감해야 합니다. 삶은 복잡합니다. 단 하나의 원인으로 비극을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고통 앞에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분히 현대적인 생각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불행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나 로마의 침략으로 민족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선천적 장애를 당사자 혹은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결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독 무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상식에 자연스럽게 젖어들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자기 처지를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한 마디로 ‘거대한 어둠의 장벽’입니다. 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는 사실 만으로도 너무나 아프고 힘듭니다. 그런 자신을 살피고 배려하기는커녕 죄인으로 정죄합니다. 공기처럼 주변을 에워싼 폭력입니다.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비극입니다. 아마도 그 역시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며 아득한 암흑에 빠져 들었을 겁니다.
진흙으로 빚는 치유
하지만 예수님은 낯선 대답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누구의 죄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장애와 질병에 대한 그 시대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뒤엎으셨습니다. 전혀 새로운 차원의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이어서 그 말씀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6~7절 함께 읽겠습니다.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께서 그 눈먼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치유하신 방법을 주목해야 합니다. 얼마든지 말씀만으로 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훨씬 더 예수님을 권위 있게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구태여 땅에 침을 뱉고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발랐습니다. 당시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율법을 정면으로 어기는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왜 위험을 감수하시며 굳이 기이한 방식으로 그의 눈을 뜨게 하셨을까요?
여기서 주목할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진흙’입니다. 헬라어로 <펠로스>입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6번만 나옵니다. 그중에서 다섯 번이 요한복음 9장에 사용됩니다. 그만큼 본문의 핵심을 드러내는 주제어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제외하고 이 단어 <펠로스>, 즉 ‘진흙’이 등장하는 유일한 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서 9장 21절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켜 진흙을 빚는 토기장이로 묘사합니다. 자연스럽게 창세기 2장 7절과 연결됩니다. 바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새한글 성경으로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7 여호와 하나님이 땅 부스러기 곧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다. 그러고는 그의 코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으셨다. 그러자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어 생명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시각장애인을 고치시는 모습은 바로 그 옛날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을 재현합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9장에만 “진흙”이 무려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은 단지 시각장애인의 시신경을 고치시는 게 아닙니다. 그에게 새로운 눈을 창조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어두운 존재 한쪽을 밝혀주는 것으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더럽고 무가치한 진흙과 같은 그의 삶을 빚으시어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참 빛을 그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너무나 놀랍고 아름다운 회복과 치유이자 새 창조입니다.
여전한 어둠
너무나 감격적인 치유의 순간입니다. 몸과 마음을 얽어맸던 어둠의 속박에서 벗어나 마침내 해방을 경험했습니다. 오늘날이라면 주위 사람들의 축하 속에 성대한 잔치가 열릴 겁니다. 환하게 웃으며 기쁨을 만끽할 겁니다. 하지만 동화 같은 해피엔딩이 펼쳐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또 다른 불행과 마주합니다.
시각 장애로 구걸하던 사람이 눈을 뜨자, 주위 사람들이 무척 놀랐습니다. 그를 바리새인들에게로 데려갑니다. 분위기는 금세 차갑게 변합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에게 찾아온 눈부신 치유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한 인간을 비극에서 건진 놀라운 변화에는 둔감했습니다. 그 대신 싸늘한 율법을 들이밀며 그를 정죄했습니다. 안식일을 더럽힌 범인을 찾아내고자 눈을 붉혔습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법정 드라마처럼 흘러갑니다. 법률 용어와 표현이 빼곡하게 등장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남자를 매정하게 심문합니다. 심지어 부모까지 불러다 놓고 너희 아들이 맞냐며, 어떻게 눈을 떴는지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르는 일이라며 대답을 회피하였습니다. 자기 아들은 다 큰 성인이니까 그에게 질문하라고 떠넘겼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적극 보호해주지 못하는 무책임한 모습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22절 함께 읽겠습니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이미 주님은 유대 사회 기득권들에게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하는 사람을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때 “출교”라는 말은 “회당에서 쫓겨나다”라는 의미입니다. 단지 ‘회당’에 더 이상 들어올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시대 회당은 단순히 유대인들의 종교 시설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생존과 생활을 위한 토대입니다. 회당에서 배척당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사회적 사형선고였습니다.
이런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시각장애인이었던 남자는 부모에게조차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꿋꿋하게 자기 병을 고친 예수님을 옹호하였습니다. 자신이 겪은 치유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당당히 증언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34절 기록대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앞을 볼 수 없었을 때 보다 더욱 심각한 고립과 위협을 겪었습니다. 침 뱉음 당한 먼지처럼, 비참하게 짓 이겨졌습니다. 시각장애 이상의 또 따른 짙은 암흑 속에 던져졌습니다.
빛으로 다가오신 예수님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오십니다. 35절 함께 읽겠습니다.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예수님께서는 시각장애인을 고친 것으로 자기 역할을 다했다고 여기고 물러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후 그가 처한 암담한 절망을 들으셨습니다. 그를 다시 만나셨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먼지와 같은 인생을 찾아오시고 돌보시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쓸모없이 버려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존귀한 피조물입니다. 가까이 다가오시어 아픔을 어루만지십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는 질문을 듣고 당황해했습니다. 눈에 바른 진흙을 실로암 연못에서 씻고 난 후 시력을 얻었습니다. 자기를 고치신 분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런 자기에게 대뜸 “인자를 믿느냐”라는 물음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그 순간 파악하기 힘들었습니다.
여기서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하는 독특한 1인칭 표현입니다. 이러한 맥락을 모르는 그 남자는 그 “인자”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아마도 자기를 고치신 그 위대한 분일 거라고 자연스럽게 짐작했습니다. 그분을 믿겠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놀라운 대답을 하셨습니다. 37절 함께 읽겠습니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주님께서는 앞서 언급하신 “인자”가 바로 당신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입니다. 헬라어로는 <헤오라카스>입니다. “보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동사 <호라오>의 완료 시제입니다. 과거의 어떤 동작이 지금까지 지속적인 영향과 결과를 미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사진으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보통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면 ‘찰칵’하고 그 순간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카메라로 조리개를 오랫동안 열어두고 풍경을 촬영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화면에 보시는 것은 NASA가 공개한, 우주정거장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특정 순간의 별의 위치가 아니라, 수많은 별이 동그랗게 움직이는 궤적을 보여줍니다. 긴 시간 걸친 움직임을 지켜본 모습을 담았습니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와 비슷합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그 남자의 시선이 저 장노출 사진과 흡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눈을 뜨고 처음 예수님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몸의 눈으로는 예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장면을 묘사하는 요한은 다르게 적었습니다. 분명히 그전부터 지금까지 주님을 계속 보아왔다고 기록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로부터 누구의 죄 때문에 눈이 멀었는 지 가슴 아픈 질문을 들었을 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실로암에 달려가 눈가에 묻은 축축한 무언가를 씻어낼 때, 사람들이 놀라며 그를 바리새인들에게로 달려갈 때, 마침내 회당에서 쫓겨나 막다른 상황에 몰렸을 때, 그 모든 순간순간마다 그는 줄곧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 남자가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기 전에, 주님께서 그를 먼저 보셨습니다. 본문 1절 다시 한 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개역개정 성경은 자연스런 우리말 어순에 따라 “보신지라”를 가장 마지막에 배치하였습니다. 하지만 신약 원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길을 지나는 상황을 묘사하는 두 단어 다음에 곧바로 등장하는 첫 번째 동사가 “보다”입니다. 요한복음 9장을 시작하는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행동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눈부신 사랑과 은혜를 여는 움직임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보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죄인으로 정죄당하는 그를 보셨습니다. 온통 어둠에 휩싸여 아무런 빛을 발견하지 못하는 그를 보셨습니다. 부모에게조차 외면당하고 마침내 공동체에서 완전히 배척당하는 그를 보셨습니다. 다시 그에게 다가오시어 물으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 순간 그 남자는 지금껏 한결 같이 자기를 바라보신 주님의 시선과 마주쳤습니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바라본 대상이 누구셨는지 온전히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눈길을 마주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줄곧 바라보고 계십니다. 먼지처럼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존재로 느껴질 때, 수많은 비난으로 지치고 괴로울 때, 주위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할 때, 하나님은 변함없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다가오시어 우리의 가장 깊은 아픔에 함께 하시며 손을 내미십니다. 그 시선에 반응해야 합니다. 나와 언제나 함께 하신 주님의 모습을 영혼 깊이 품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엎드리다
눈을 뜬 그 남자는 예수님을 마주하고 위대한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마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38절 함께 읽겠습니다.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그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이어서 예수님 앞에 절했습니다. 너무나 단순명쾌한 외침과 행동입니다. 성경이 수없이 묘사하는 장면입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 9장이 들려주는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이 순간에 이르렀을 때, 매우 깊은 의미를 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향한 그 남자의 호칭이 계속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11절에는 처음 눈을 떴을 때, 이웃 사람들이 어떻게 눈을 떴는지 물었을 때 자기를 고친 예수님을 언급하며,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17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을 가리며 “선지자”라고 대답했습니다. 33절에는 점점 심해지는 심문에 맞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38절에 이르러 예수님을 가리켜 “주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마치 시력을 회복해 사물이 점차 또렷이 보이듯이, 예수님을 더욱 더 선명히 알아갔습니다. 주님께서 진흙으로 새로 빚은 눈이 그의 전 존재를 환하게 밝혀주었습니다. 아무런 죄 없이 죄인으로 몰려 지냈던 그의 삶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찬란하게 변화시키셨는 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이와 관련해 그가 예수님을 향해 부른 “주님”의 의미를 곰곰이 살펴야 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옮긴 번역 성경을 “70인역”이라고 부릅니다. 이 성경에서 아담을 흙으로 지으신, 창세기 2장의 하나님을 가리켜 여러 차례 “퀴리오스”, 즉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그가 예수님은 질병에서 고쳐준 유능한 치유자를 넘어 창조주로 인정한다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이 행동 역시 가볍게 지나치고 넘길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여기서 “절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는 <프로세퀴네센>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본문을 제외하고 단 두 장면에만 나옵니다. 둘 모두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는 행동을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한 때 시각장애인이었던 그 사람이 예수님 앞에 엎드린 것은 단순히 호감을 드러내려는 게 아닙니다. 단지 병을 고쳐주신 은인에게 감사를 표현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자기에게 새로운 창조를 선언하시고 이루신 주님을 경배하였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창조입니다.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며 계획하신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역시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점점 더 잘 알아가길 바라십니다. 오직 주님께만 엎드려 경배하길 바라십니다. 그게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이유입니다.
짓 밝혀 이룬 사랑
어느새 사순절의 중반을 넘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절기를 보내며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주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아득한 어둠의 장벽에 휩싸인 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각장애인 한 명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놓인 본질적인 상황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침과 먼지처럼 지저분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께서 사랑으로 품으시고 구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방법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짓이겨진 진흙이 되셨습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과 핍박을 당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세상 가장 깊은 어둠과 고독을 손에 움켜 쥐셨습니다. 눈부시게 찬란한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셨습니다. 빛으로 빚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때로 암흑과 마주할 때 절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나를 위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느끼며, 한없는 외로움에 사무칠 때 낙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어떤 위기와 고난 속에서도 쉽게 좌절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인생의 그 모든 먼지가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겪어온 모든 시련을 들여다 보시고 새롭게 창조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시고 바라보십니다. 그 은혜를 눈길 안에 가득 담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만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엎드려 경배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어 모든 삶을 밝은 빛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
창조주 하나님
저희 모든 삶이 주님의 손길 아래 있음을 믿습니다. 깊고 깊은 어둠을 빛으로 빚으사 영광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향한 고백이 더욱 성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며 경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님의 고난을 본받아 연약한 저희 마음에 사랑과 인내로 가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고문헌
박정식, "요한복음 9장의 재판 구조를 통한 죄 이해," 『신약연구』 제13권 제4호 (2014)
Frank England, "CREDO UT INTELLIGAM: Irony in John 9," Neotestamentica 48.2 (2014)
Zacharias Shoukry, "Creation Motifs in John 9," Biblica 102.4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