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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장 33~44절 “눈물 배인 목소리”

2026-03-22
정대진 목사

정배교회 주일예배, 목사 정대진

사순절 다섯째 주일, 2026년 3월 22일

요한복음 11장 33~44절 “눈물 배인 목소리”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슬픔의 프리즘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셨습니다. 35절의 신약 원문을 곧바로 옮기면 “눈물 흘리다. 예수님이”입니다. 보통 사용하는 말의 순서를 뒤집었습니다. 뺨을 타고 또르르 흐르는 눈물이 예수님의 이름보다 먼저 나옵니다. 무척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이 모습 안에 많은 걸 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가장 짧은 이 구절은 우리 마음을 울컥하게 합니다. 함께 눈물짓게 합니다. 지금 겪고 있는 슬픔을 공감하시는 주님의 눈길을 떠오르게 합니다. 동시에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전지전능한 신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마땅히 그래야 할 것 같은, 또 그러길 바라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거대하고 매끈한 대리석입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초연한 모습으로 당신의 일을 묵묵히 이뤄내시는 분으로 그려냅니다. 하지만 그건 종교의 하나님이지 성경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아픔에 공명하며 애끊는 슬픔을 주저 없이 드러 내십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를 한결같이 들려줍니다.


관련하여 오늘 읽은 본문에서 슬픔을 묘사하는 다양한 표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33절 함께 읽겠습니다.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나사로가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목숨이 오락가락합니다. 기둥과 같은 오빠의 가뿐 숨소리를 동생들은 가만히 듣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황급히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미 주님과 친밀한 사귐을 나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이적을 펼치시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신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나사로를 회복시키실 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주님은 꿈쩍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나사로가 숨을 거둔 뒤에야 도착했습니다.


곧바로 장례 풍경이 펼쳐집니다. 슬픈 음악을 연주하고 통곡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방금 읽은 33절에서 마리아 그리고 주위 조문객들의 ‘울음’은 격한 슬픔에 사무친, 격렬한 통곡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 전통 장례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던, “아이고, 아이고” 울부짖었던 곡소리와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속으로 거칠게 콧김을 뿜다’라는 의미입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마가 흥분하여 코를 씩씩거리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격정적인 분노를 표현합니다. 


그런 다음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34~35절 함께 읽겠습니다.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단지 지금 나사로가 있는 위치를 묻는게 아닙니다. 그가 무덤에 누워있는 처참한 상황을 주위 사람들에게 거듭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나사로가 잠든 동굴로 안내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장면을 묘사하는 헬라어 문장은 담백합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울음과 당신의 비통함을 거쳐 고요하게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가슴 깊은 울분과 절망에 대한 반응입니다. 주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분노가 모이고 모여 맺은 물방울입니다. 온 우주의 아픔이 그 안에 고스란히 스며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대상과 실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느 분쟁 지역에 파견된, 국제 구호 단체에 소속 활동가를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그의 앞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참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심각한 부상을 당했습니다. 사회의 생활 기반은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치안이 무너져 각종 범죄가 들끓습니다. 전염병이 급속히 번지지만 기본적인 약품도 없어 어린 생명이 사그라집니다. 


이 모든 모습을 마주한 그 활동가는 자연스럽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낍니다. 그 대상은 누구일까요? 피해를 겪고 있는 시민들일까요? 그들이 연약하고 무지해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고 답답해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의 탐욕만을 채우느라 국민의 눈물을 외면하는, 그 나라의 포악한 독재자와 주변의 권력자들을 향해 분노하게 됩니다. 온 나라를 슬픔으로 가득 채운 악의 실체를 향한 울분으로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우리가 역사 혹은 뉴스를 통해 끔찍한 인권 유린과 학살을 접할 때 나오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입니다. 추악한 폭력을 대할 때 드러나는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오늘 본문 속 예수님의 모습이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본래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풍성한 생명을 누렸습니다. 그 모습을 창세기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에덴동산으로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죄가 이 땅에 들어오며 모든 게 무너졌습니다. 사망이 덮쳤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의 웃음소리과 찬송 대신, 고통 가운데 흘러나오는 통곡이 퍼져갔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단순히 나사로라는 한 사람의 죽음과 그 주변 풍경만을 두고 분노하며 슬퍼하신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어둠과 마주한 반응입니다. 사망에 이르게 하는, 그 모든 고통과 절망을 반드시 없애버리겠다는 단호한 선포입니다.


나흘의 침묵

그런 까닭에 38절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리켜 또다시 “비통해”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여전히 주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모든 인류를 삼킨 절망과 죽음을 향한 분노가 강렬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당시 풍습을 따라 시신은 동굴 안에 있었습니다. 그 앞을 큰 돌이 가로 막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과 마르다가 나눈 대화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39절 함께 읽겠습니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께서 동굴 입구에 놓인 돌을 치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놀라며 만류합니다. 사실 지극히 당연한 반응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누군가 돌아가시면 대부분 화장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간혹 시신을 관에 넣고 그대로 매장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흙을 다 덮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불쑥 나타나 무덤을 다시 파고 관 뚜껑을 열라고 하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누구나 놀라며 당황해 할 겁니다. 불쾌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매우 자연스런 행동입니다.


이때 마르다가 대답하며 언급한 한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나흘”입니다. 그녀는 왜 나사로가 죽은 지 사일이 되었다고 굳이 알려주었을까요? 관련해서 당시 유대인들이 죽음에 대해 어떻게 알고 믿고 있는 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며 3일 동안 떠돈다고 믿었습니다. 나흘 째, 즉 4일째가 되면 시신의 얼굴이 알아보기 힘들게 변하고 본격적으로 부패가 시작되고 냄새도 납니다. 유대인들은 그제야 영혼이 떠난다고 완전히 죽음을 맞이했다고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마르다의 말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지 4일이나 되어 시체 썩은 고약한 악취를 풍기고 있다는 알려줍니다. 그가 숨을 거두기까지, 앞서 마르다가 겪었던 절망을 표현합니다. 그 시대 남자 형제를 잃고 자매들만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막막한 삶의 무게를 의미합니다. 생존 자체가 심각한 위협을 받는 상황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 서둘러 사람을 보내 나사로의 위중한 상태를 알렸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발걸음을 지체하셨습니다. 그 주님을 향해 여전히 남은 원망이 ‘나흘’이라는 단어에 녹아 있습니다. 그 절절한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곧바로 나사로에게 달려가지 않으셨을까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애원에 귀를 닫으시고 나사로가 죽은 지 4일이 되어서야 그들에게 나타나셨을까요? 나흘이 되어, 사람들이 완전히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을 실감한 뒤에야 무덤 앞에 서 계셨을까요?


예수님이 무심하셔서가 아닙니다.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기대가 산산이 무너질 때 비로소 솟아오르는 소망이 있습니다. 죽음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갈 때 마침내 일어나는 생명이 있습니다. 절망의 맨 얼굴을 가까이 바라볼 때 비로소 환하게 비추는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온통 암흑으로 둘러싼 상황에서 마침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막연히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바람으로 3일을 기다렸습니다. 그 시간을 일부러 건너 뛰셨습니다. 누가 봐도 그의 사망을 부정할 수 없는 죽음 그 자체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인간의 계획을 완전히 벗어납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에 주님의 발길이 닿지 않습니다. 도리어 버려진 것 같은 완벽한 상실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합니다. 자연스럽게 원망과 불평이 쏟아집니다. 동시에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을 향해 진심으로 실망한 순간이야말로 그분의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을 신뢰해야 합니다. 인간의 소원을 뛰어넘어 이루시는 신실한 발걸음을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죽음에서 일으키는 외침

그렇다면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그 깊고 깊은 어둠과 죽음의 현장에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43절과 44절 앞부분을 화면 보시면서 새번역 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43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외치시니, 44 죽었던 사람이 나왔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 장면을 무덤 주위를 둘러싼 관찰자가 아닌, 동굴 안에 누워있는 나사로의 입장에서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주변 모두가 생각하듯이 죽어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시체로 누워있는 나사로의 귀가 열려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의 청력이 살아있고, 근육에 힘이 남아 있어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의 능력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 말씀이 사람 몸이 되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말씀 그 자체입니다. 그날 나사로를 향해 외친 예수님의 음성은 허공을 울리고 지나가는 평범한 목소리가 아닙니다. 당신의 전 존재를 건, 눈물 배인 진리입니다. 심장 떨리는 사랑으로 가득한 선포입니다. 


그 말씀이 거대한 죽음이라는 육중한 벽을 뚫고 다가왔습니다. 도무지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경계를 건넜습니다. 육중하게 가로막았던 모든 절망의 돌문을 넘어 나사로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를 사망에서 일으켜 세웠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마침내 동굴을 밖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신 생명과 희망의 능력을 생생하게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은 요한공동체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재 유대인들로부터 출교를 위협받는 심각한 위기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마침 지난 주일 설교 때도 말씀 드렸습니다. 회당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터전입니다. 종교 의식 뿐만 아니라 교육과 거래 등 주요 생활이 회당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한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은 사회적 사형선고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출교’라는 사회적 무덤에 놓여 있었습니다. 음산한 어둠과 고약한 악취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나사로야 나오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떻게 들렸을까요? 그 말씀으로 죽음에서 일어나 무덤에서 밖으로 나온 나사로가 어떻게 보였을까요? 자연스럽게 감정을 이입했습니다. 현재 자기들이 처한 힘겨운 현실을 이겨내는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무엇도 가로막을 수 없는 생명이 일으키는 부활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이곳에서의 구원

관련하여 앞서, 나사로의 무덤에 가기 전에 예수님과 마르다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 봐야 합니다. 23~26절 함께 읽겠습니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는 오빠가 죽고 난 뒤에야 나타난 예수님을 향해 아쉬움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미리 말씀하였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그 일이 “마지막 날 부활 때”라고, 즉 먼 미래의 일로 받아들입니다. 사실 마리아만이 아닙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이해합니다. 빈소에 방문해 조문할 때 가족분들과 보통 어떤 대화를 나누십니까? 천국에서 다시 만날 거라고 위로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 혹은 부활을 죽고 난 뒤, 아득히 먼 훗날 일어날 막연한 사건으로만 여길 위험이 있습니다. 특히나 눈앞에 경험하는 고통이 크면 클수록, 삶의 시름을 잠시 잊게 해주는 마취제로 구원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그 모든 어리석은 편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십니다. 마리아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미래가 아니라 지금 그녀 앞에 서 있는 예수님 당신이 부활이라는 선언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그 순간이 곧 구원입니다. 구원은 언젠가 앞으로 일어날 일이 아닙니다. 현재 내가 처한 현실 가운데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결정적인 증거를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그 음성 안에는 인생의 온갖 슬픔이 고스란히 배어있습니다. 깊은 아픔 속에 솟아오른 눈물이 진하게 스며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 모든 아픔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눈부신 영광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무덤 밖으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라는 외침에서 나사로 대신 갖자 자기 이름을 넣어 가만히 읊조려 보시길 바랍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동굴 안에 갇혀 있습니다. 때로는 질병이, 때로는 가난이 우리를 어둠 속에 밀어놓습니다. 그 외에 숱한 좌절과 절망이 마음을 썩어가게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코를 막게 하는 삶의 악취에 휩싸여 괴로움에 몸부림치기도 합니다. 도무지 벗어날 수 없어 보이는 무덤 한 복판에서 그저 절망하기만 합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쳐 부르십니다. 모든 죽음의 영역을 넘어 영혼 깊이 다가 오십니다. 마침내 죽음에서 일으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하십니다. 동굴 밖의 밝은 빛으로 이끄시어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이 장면에서 우리는 교회의 소명을 확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죽음을 이기고 무덤에서 구한다는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알게 됩니다. 44절 함께 읽겠습니다.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나사로는 당시 장례법에 따라 천으로 꽁꽁 묶인 채 무덤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동굴에서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본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 하십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죽음 안에 있던 사람을 다시 살리고 일으킨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를 싸맨 결박을 풀고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는 것은 공동체의 역할입니다.


그렇다면 주위를 차분히 돌아봐야 합니다. 묶여있는 사람들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얻었다 해서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내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갈등과 한계에 직면합니다. 여전히 여러 모양의 결박으로 답답해 하곤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몸을 휘감았던 천을 직접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시키며 역할을 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눈물 흘리신 예수님의 모습에 감동하고, 모든 죽음을 물리치는 주님의 음성에 감격하며 순종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해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며 진실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얽매이는 것이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기시는 간곡한 당부입니다. 동시의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건강을 가늠하는 정확한 기준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구세주는 웅장하고 차가운 대리석이 아닙니다. 격렬한 슬픔에 떨고 마침내 눈물 흘리는 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쉽게 흔들리는, 초라해 보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연약함과 비참함이 온 우주를 구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눈물 짓는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에 함께 하십니다. 함께 글썽이고 아파하십니다. 그런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 눈물 배인 목소리가 겹겹이 쌓인 절망을 뚫고 우리 영혼 가장 깊은 곳을 향해 다가옵니다. 그 말씀으로 다시 일어나 주어진 믿음의 여정을 묵묵히 이어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눈물 배인 큰 목소리로 저희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악취가 풍기는 캄캄한 무덤을 바라보시고, 마침내 사랑으로 다가 오시어 참으로 죽음에서 구하신 모습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주님께서 흘리신 눈물과 “나사로야 나오라”라며 말씀하신 음성이 모든 죽음과 절망에서 이겼음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 믿음 따라 저마다의 동굴에서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뜻에 순종해 풀어놓아 다니게 하는 사명을 충직하게 간직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고 문헌

Troels Engberg-Pedersen, "The Cosmology of the Raising of Lazarus (John 11–12)," in Coming Back to Life: The Permeability of Past and Present, Mortality and Immortality, Death and Life in the Ancient Mediterranean, eds. Frederick S. Tappenden and Carly Daniel-Hughes (Montreal, QC: McGill University Library, 2017), 153-179.

Bernhard Lang, "The Baptismal Raising of Lazarus: A New Interpretation of John 11," Novum Testamentum 58 (2016),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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