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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장 11~26절 “소음과 침묵”

2026-03-29
정대진 목사

2026년 3월 29일, 수난주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27장 11~26절 “소음과 침묵”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1)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2)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찬송에서 소음으로

전통적으로 교회는 부활절을 한 주 앞둔,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을 가리켜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몰려나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친 모습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고난에 더 집중해 “고난주일” 혹은 “수난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주보에 “수난주일”이라고 적은 이유입니다. 


사실 종려주일과 수난주일, 이 둘은 별개가 아닙니다. 그날, 예수님을 향해 열광하며 예루살렘 성을 떠들썩하게 울린 함성은 역설적으로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감격적인 찬송은 금세 시끄러운 고함으로 변했습니다. 그 소음의 여파가 고스란히 오늘 읽은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어지러운 소리에 머리를 싸맨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소음의 시작: 대제사장의 고발

빌라도 앞에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끌고 왔습니다. 이미 주님은 참혹한 폭력을 당해 남루한 몰골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자처하는 신성모독범이라는 죄명입니다. 유대인으로서 가장 치명적인 범죄입니다. 당장 처형해도 모자랄 죄악입니다. 하지만 식민지 백성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로마 황제가 보낸, 총독 빌라도에게로 몰려갔습니다.


빌라도의 관저에는 순식간에 긴장감이 맴돌았습니다. 그와 유대 귀족들 사이가 미묘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원만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총독을 통해 로마에 협력해 상당한 부와 기득권을 누렸습니다. 빌라도 역시 그들의 도움을 받아 지역을 통제했습니다. 서로를 이용하며 각자 자기 필요를 채웠습니다. 


동시에 마찰도 적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을 무시하며 여러 강압 정책을 펼쳤습니다. 로마 황제의 그림이 새겨진 군대 깃발을 성전에 반입했습니다. 상수도 건설을 위해 성전 금고를 마음대로 열었습니다. 제사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빌라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분노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의 잘못을 황제에게 고발해 쫓아낼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Pilate's Role in Jesus's Death," Christian Standard Bible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Pontius Pilate: Roman Governor of Judea and Judge at Jesus' Trial," UASV Bible, 2026.

 

 

게다가 그때는 유월절 기간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를 5만명으로 추산합니다. 하지만 명절을 맞아 수십 만 명이 몰려왔습니다. 유월절은 이집트 노예에서 해방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작은 불똥 하나에도 삽시간에 반란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곳곳에서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정치생명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한순간 잃을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대제사장은 이러한 그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치 지도자를 자처했다고 고발합니다. 신성모독범에서 로마제국의 반역범으로 죄명을 교묘하게 뒤바꿨습니다. 밖에는 이미 군중이 몰려들어 소란스럽습니다. 욕망과 분노가 뒤섞여 혼잡스러운 불협화음이 울려 퍼집니다. 이 모든 혼란이 총독을 강하게 압박합니다.


빌라도의 오판

하지만 빌라도도 호락호락하게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는 대대로 군인을 배출한 기사 계급 출신입니다. Jacqueline Faulhaber, "Pilate's Unjust Condemnation of Jesus in Matthew 27:11-26: How God Brings to Light His Standard of Justice," Journal of Biblical Perspectives in Leadership 3, no. 1 (2010): 68

 지금 자기에게 벌어진 일들을 동물적인 정치 감각으로 간파했습니다. 본문 18절 함께 읽겠습니다.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사형장으로 끌고 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백성을 보호하거나 신앙 양심을 지키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바로 ‘시기’입니다. 해당 원어를 보면 그들의 속내가 낱낱이 드러납니다. 헬라어로 <프토노스>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질투가 아닙니다.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맹렬하고 악의적인 ‘시기심’을 뜻합니다. 내가 갖지 못한 무언가를 지닌, 그 사람을 무너뜨리고 죽이려는 폭력적인 감정입니다. 도날드 A. 헤그너, 『WBC 성경주석: 마태복음 하』 (서울: 솔로몬, 2004), 마태복음 27:18 

 

어느 날 갈릴리 시골 출신의 목수 예수가 나타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어떤 속임수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병을 고치고 신비로운 일들을 펼쳤습니다. 순식간에 백성의 열렬한 지지와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절정이 “호산나”라는, “우리를 구원하소서!” 외침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모습을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도무지 눈뜨고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움켜쥔 권력이 새나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이들의 시기심을 간파했습니다. 나름의 절묘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바로 유월절 특사입니다. 명절 때 백성이 원하는 죄인을 풀어주는 행사입니다. 이때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 바라바를 주목해야 합니다.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7절을 새한글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17 그래서 사람들이 함께 모였을 때 빌라도가 물었다. “누구를 여러분에게 풀어 주기 바라시오? 예수 바르압바요? 아니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요?”


두 번역 사이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예수님 옆에 섰던 다른 죄인의 이름을 개역개정성경은 “바라바”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새한글성경은 이 당시 사람들이 사용했던 아람어 발음대로 ‘바르압바’라고 옮겼습니다. 그런데 이 ‘바르압바’는 화면에 보시듯이, 각각 아들과 아버지를 뜻하는 ‘바르’와 ‘압바’가 합해진 단어입니다. 즉,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절묘하게 비슷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바르압바” 앞에 개역개정성경에 없는 단어가 있습니다. 무엇이죠? “예수”입니다. 놀랍게도 신약 초기 사본에 따르면 바라바의 전체 이름은 “예수 바르압바”입니다. 예수님과 이름이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빌라도의 뜰에 모인 백성 앞에는 두 명의 예수가 놓여있습니다. 둘 다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한 명은 폭력과 살인으로 세속적인 해방을 약속한, 예수 바라바입니다. 다른 한 명은 사랑과 희생으로 참된 구원을 선포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빌라도는 당연히 군중이 예수님을 선택하리라 예상했습니다. 유대 민중이 그동안 열렬한 지지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병든 사람을 낫게 하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렸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불과 며칠 전에 옷을 바닥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를 향해 열광했습니다. 그들이 명절 특사로 예수를 놓아 줄 거라고 자연스럽게 판단했습니다. 


더 크게 외치는 소리

빌라도는 그렇게하면 제사장들의 곤란한 요구를 거절하는 정치적 부담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계산했습니다. 동시에 죄 없는 예수를 죽여 손에 피를 흘리는 책임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 나름대로는 치밀한 고심 끝에 내놓은 해답이었습니다. 하지만 오판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기어이 죽이고자 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집요한 분노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시기심이 어느 정도까지 불타 올랐는지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습니다. 20~21절 함께 읽겠습니다.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빌라도의 뜰에 모인 백성들을 설득했습니다.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죽이게 하자고 선동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군중 심리의 위험을  확인합니다. 많은 사람이 흥분하며 모일 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하기보다는 분위기에 휩싸여 폭력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 없는 사람을 몰아붙이는 마녀사냥이 벌어집니다. 오늘날 인터넷에서도 쉽게 발견하는 모습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러한 군중 심리를 이용했습니다. 당장 그들 눈에 힘 있고 멋있어 보이는 바라바를 영웅시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무력하게만 보였습니다. 결국 백성들은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외칩니다. 빌라도는 당황했습니다. 계획이 완전히 엇나갔습니다. 이어지는 반응을 묘사한 22~23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22 그 때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그들이 모두 말하였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23 빌라도가 말하였다.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사람들이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빌라도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를 어떻게 해야할 지 백성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쉽게 상황을 끝낼 수 없었습니다. 한 번 더 군중을 향해 외칩니다.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그러자 사람들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그날 빌라도의 뜰에서 쩌렁쩌렁 울렸퍼졌을 온갖 소리를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고성이 이어집니다. 고함과 고함이 만나 아우성을 이룹니다. 저마다의 욕망과 이익이 부딪혀 괴성을 질러댔습니다. 누구도 쉽게 잠재울 수 없는 소음 그 자체입니다. 저절로 귀를 틀어막게 되고 이 순간이 빨리 지나길 바랄 뿐입니다. 


빌라도 마음 속 소음

하지만 소음은 총독 관저에만 울려 퍼지지 않았습니다. 빌라도 마음 깊은 곳 역시 금세 시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그의 상황이 녹록치 않습니다. 앞서 잠깐 말씀 드렸듯이 그는 평소 유대인들을 무시했습니다. 유대교 전통을 우습게 보고 강압 통치를 펼쳤습니다. 그러다 여러 차례 폭동이 일어나 황제의 눈 밖에 났습니다. "The Figure of Pontius Pilate in Josephus Compared with Philo and the Gospel of John," MDPI Religions 11, no. 2 (2020)

 

만약 유월절에 폭동이 일어난다면 그의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권력과 명예를 모두 잃은 채 나락으로 떨어질 심각한 위기입니다. 몹시 긴장되고 초조한 상황에서 그의 아내가 등장합니다. 19절 함께 읽겠습니다.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총독의 아내가 남편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흥미롭습니다. 그녀가 험한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이 볼 때는 비과학적인 근거입니다. 하지만 로마 문화에서 꿈은 단순히 무의식의 반응이 아닙니다. 신들이 보내는 심각한 계시 혹은 불길한 징조로 진지하게 여겼습니다. 도날드 A. 헤그너, 『WBC 성경주석: 마태복음 하』 (서울: 솔로몬, 2004), 1238.

 치열한 권력 투쟁 한복판에 있던 빌라도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아내가 긴박한 순간에 굳이 재판석까지 사람을 보내 알려준 이유입니다. 

 

빌라도의 내면에 더욱 복잡한 굉음이 울려 퍼졌을 겁니다. 안 그래도 폭동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 심각한 심리적 부담까지 겪었습니다. 빌라도의 머릿속에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양심, 아내의 불길한 경고, 그리고 군중이 들고 일어나면 내 경력이 이대로 끝장날 거라는 두려움이 시끄럽게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그 지독한 내면의 소음 속에서 결국 진실을 외면하였습니다. 자기자신만 위하는 얄팍한 타협을 선택합니다. 24~26절 함께 읽겠습니다.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가 찾아낸 출구 전략은 매우 기괴하고 비겁한 행동이었습니다. 무리 앞에서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며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이방인 총독이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흉내 내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위선의 극치입니다. 권력자의 추악한 책임 회피입니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인지 살피고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내면에 잠잠히 들려오는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로마 황제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하는 지가 더 중요했습니다. 빌라도는 결국 자기 몸 안 밖의 소음에 휩쓸려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는, 매우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핍박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사도신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를 비롯해, 이 신앙 고백을 드리는 전세계 교인들에게 매주 예배때마다 죄인으로 이름이 불립니다. 교회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저주입니다. 


놀라운 침묵

그렇다면 끔찍한 소음으로 가득한 빌라도의 뜰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계셨을까요? 밖에서는 군중의 맹목적인 분노가, 안에서는 권력자의 위선적인 계산이 만들어낸 극단적인 소음이 충돌했습니다. 이 모든 소음의 한 복판에서 예수님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11~14절 함께 읽겠습니다.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빌라도가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는 아주 짧은 대답만을 남기십니다. 헬라어 원문을 곧바로 옮기면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단순한 긍정이 아닙니다. “네가 말한 그 단어가 맞긴 하다. 그런데 네가 생각하는, 세속적인 힘을 휘두르는 왕은 아니다”라는 심오한 표현입니다. 달리 말하면 큰 호령 소리와 고함으로 세상에 소음을 더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잠잠히 침묵을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14절은 한 번 더 언급합니다. 그만큼 주님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무척 중요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입술을 굳게 닫은 예수님을 보고 빌라도는 크게 놀랐습니다. 당시 로마의 사법 제도에서 고발당한 사람이 변론을 포기하고 침묵한다는 것은, 범죄 사실을 인정하는 혐의 인정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유죄 판결을 확정 짓는 가장 확실한 법적 근거였습니다. 


예수님은 앙다문 입술로 당신의 뜻을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생명을 던지셨습니다. 빌라도로서는 너무나 경이로운 순간입니다. 그는 총독으로서 수많은 재판을 진행하며 살려 달라고 발버둥 치는 죄수들만 봐 왔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주님은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목숨을 구걸하지 않으셨습니다. 할 말이 없거나 무기력해서가 아닙니다. 이사야 53장 7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이 말씀에 예고된, 온 세상을 구원하는 종의 예언을 이루셨습니다. 괴롭고 힘겨워도 힘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얌전한 양처럼 침묵을 지켰습니다.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신 ‘적극적이고 주권적인 침묵’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26절 다시 한 번 더 읽겠습니다.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마침내 십자가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군중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바라바는 풀려나고 예수님은 십자가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본래 십자가는 로마 제국 반역범들을 처형하는 틀입니다. 마땅히 바라바가 짊어져야 할 형벌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바라바는 사람들의 환호 소리 가운데 풀려났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이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이 당시 로마의 채찍은 가죽 끝에 날카로운 뼛조각과 쇠구슬이 달려 있었습니다. 한 번 내리칠 때마다 등과 허리의 살점이 깊게 뜯겨 나가고 혈관이 파열되는 끔찍한 고문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도 전에 과다 출혈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 극심한 고통의 무게를, 예수님은 아무런 항변도 없이 철저한 침묵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침묵할 때 비로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우리는 본문에서 소음과 침묵의 명료한 대비를 발견합니다. 동시에 명심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가 바라바입니다. 바라바는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은유나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완벽하게 예수님이 대신 죽어준 사람입니다. 우리 또한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본래 온 우주를 덮은 깊고 깊은 어둠의 폭력과 괴성에 휩싸여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 해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믿고 고백한다면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침묵의 위대함을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더 큰 소리를 내라고 부추깁니다. 내 자존심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언성을 높여 싸우라고 합니다. 당장의 팍팍한 현실을 뒤엎어 줄 세속적인 영웅 ‘예수 바라바’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빌라도처럼 진실을 알고 양심이 흔들리면서도, 성공과 안전을 위해 모른 척 선을 긋고 손을 씻어버리라고 종용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복음은 전혀 다른 차원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진정한 생명과 구원은 분주하고 폭력적인 함성이 아니라 침묵 가운데 완성되었습니다. 


물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부당한 대우를 미련하게 참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정당하게 내야 할 목소리를 무조건 틀어막으라는 뜻도 아닙니다. 현실을 살아가며 때로는 소리쳐 외칠 일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불의한 사람들을 향해 거침없이 질타하셨습니다. 다만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내 주장을 드러내고 이기려 들며 큰 소리를 외치는 곳에 복음이 머물 자리는 없습니다. 십자가를 끌어안고, 가장 정당한 권리와 감정을 내려놓고 깊은 침묵을 지킬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구원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종려주일을 지나고 고난 주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하는 한 주간, 특별히 예수님의 침묵을 깊이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고함 소리가 나부끼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굳게 입을 다무신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에 품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리켜 함부로 다그치지 않고, 말 없이 감싸 안으시는 주님의 사랑에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붙잡은 십자가 복음이 세상의 소음에서 우리를 지켜 보호할 줄 믿습니다.



기도

놀라운 사랑으로 자녀들을 품고 구하시는 주 하나님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선고 받는 장면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과 그의 내면을 가득 채운 소음을 듣습니다. 온갖 굉음과 고함이 울려 퍼지는 현장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잠잠히 침묵하시며 저희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셨음을 고백합니다. 

자기 주장을 큰 소리 외치며 주장하기 전에 먼저 잠잠히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열게 하여 주시옵소서. 고통당하는 이웃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욕망의 소음을 닫고, 침묵의 생명을 충만히 깨닫고 실천하여 고난주간을 거룩하게 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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