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장 18~25절 "그 이름 예수"
2026년 9월 6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마태복음 1장 18~25절 "그 이름 예수"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성도님들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지난 세 달 동안 성경에 기록된 여러 하나님의 이름들을 묵상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 모든 은혜를 마무리하는 가장 중요한 이름의 의미를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바로 “예수”입니다.
창조의 이름들
오늘 본문 말씀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합니다. 첫 구절인 18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라고 시작합니다. 이후에 펼쳐질 일들은 곧 주님께서 이 땅에 한 아기로 오신 사건이라는 걸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가장 주목할 단어는 바로 ‘나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나심’과 같은 단어가 마태복음 1장 1절에 등장합니다. 화면 보시면서 함께 읽겠습니다.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여기서 “계보”로 번역한 말은 ‘기원’, 즉 무언가의 근원을 뜻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을 시작하는 1장 1절의 경우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족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그리스어 성경에서 ‘창세기’를 가리키는 제목과 같습니다. 마태는 왜 같은 말을 중요한 순간마다 반복했을까요? 마태복음을 읽는 사람들은 율법에 친숙합니다. 그들은 ‘기원’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창세기의 가장 앞부분에 기록된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마태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흑암과 혼돈 속에서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며 온 세상을 창조하신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게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또 다른 위대한 창조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배경은 정반대입니다. 아름다운 별빛으로 반짝이는 광활한 우주가 아닙니다. 갈릴리 변두리 한 목수 집안의 작고 평범한 삶 한복판에서 조용히 열립니다. 지극히 초라하고 익숙한 일상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러면서 마태는 여러 이름을 나열합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기까지 14대, 포로기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를 나눕니다. 사실 구역 성경과 비교해 보면 엄밀하게 정확한 기록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일부러 숫자 14를 세 번에 걸쳐 반복했습니다. 14는 ‘다윗’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며 암호처럼 ‘다윗’을 세 번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으로 상징되는 메시아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매우 정교한 구성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얼마나 다윗처럼 강력한 존재인지를 뒷받침하는 힘 있는 조상들만을 언급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마태복음이 기록한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네 여인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다말, 라합, 룻, 밧세바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족보에 여성의 이름이 오르는 것부터가 드문 일입니다. 거기다 이 네 명 모두 하나같이 부끄러운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를 속여 대를 이었습니다. 라합은 가나안의 몸을 파는 여인이었습니다. 룻은 신명기 율법에서 엄중하게 저주했던 모압 출신 이방인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로 언급되는 밧세바는 다윗이 억울한 죽음으로 몰아넣어 빼앗은, 충성스런 부하의 아내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존경하는 왕의 가장 치명적인 죄악을 보여줍니다.
만약 예수님의 족보가 사람들 보기에 번듯한 가문을 자랑하려는 목적이었다면, 마태는 이 이름들을 지웠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이 이름들을 족보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새겨 넣었습니다. 그 이름들을 무시하지 않고 소중히 불러 주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진정한 창조와 구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 이름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이름을 품기 가장 합당한 험난한 삶을 가장 잘 드러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완벽한 뜻을 완벽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지 않으십니다. 정반대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부끄러워하고 감추고 싶어하는 모든 아픔과 허물을 끌어 안고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누구에게나 흑역사가 있습니다. 지난날들을 돌이켜 볼 때마다 수치와 후회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감추지 마시길 바랍니다. 신실하신 주님께서 그 모든 이름을 품으시어 더욱 찬란한 은혜를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의로운 요셉
이와 같은 배경으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18~19절, 새번역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여기서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그는 마리아와 약혼했습니다. 정식으로 혼인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미 법적으로 부부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임신했습니다. 아직 같은 방을 쓰기 전입니다. 요셉은 그녀가 남의 아기를 가졌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때 그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래 율법에 따르면 마리아의 잘못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녀가 얼마나 더러운 죄를 저질렀는지 폭로해 돌에 맞아 죽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깨끗하게 하는 게 그 시대 사람들 기준에 올바른 행동입니다. 날카로운 율법의 칼날을 휘두르는 게 정의라고 여겼습니다.
요셉은 정반대로 행동했습니다. 마리아를 지켜 주기 위해 조용히 덮으려 했습니다. 율법의 기준으로는 잘못된 처신입니다. 범죄를 감춰준 죄악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를 가리켜 마태는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의로움을 알려줍니다. 차가운 원칙을 붙잡고 무엇을 잘했고 잘못했는지를 일일이 따지는 게 아닙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억울함을 안고 누군가를 지켜 보호하는 사랑입니다.
이름을 지으라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의로운 요셉에게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이름을 짓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20~21절 새번역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20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괴로워하며 잠에 든 요셉에게 하나님이 보낸 천사가 꿈에 나타났습니다. 천사는 우선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지으라고 합니다. 엄청난 무게가 담긴 행동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아이의 이름을 정하는 것은 단순히 호칭을 부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를 자기 가문의 자녀로 받아들이겠다는 공식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요셉은 이 아이가 자기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엄청난 결단입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 자식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쏟아질 온갖 조롱과 모욕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지금 우리가 감히 상상하기 힘든 크나큰 손해와 희생입니다.
그렇게 요셉이 지어야 할 아기의 이름을 천사가 알려줍니다. 바로 ‘예수’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예수”라는 이름은 종교적으로 들립니다. 거룩하고 고결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주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예전에 ‘철수’나 ‘민수’처럼 동네에 몇 명씩 꼭 있는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의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사람들에게 불릴 이름을 천사를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얼마든지 특별한 이름을 정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부러 가장 평범한 이름을 선택하셨습니다. 참 하나님께서 참 사람이 되신 것과 같은 결단입니다. 눈에 띄지 않는 뻔한 것으로 가장 놀라운 은혜를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명심해야 할 소중한 진리입니다. 이 이름이 안겨주는 가장 위대한 울림입니다. 뻔하고 지루한 일상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남들과 비교해 볼 때 특별히 잘난 것 없는 내 초라함을 주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십니다.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 깊은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예수’라는 이름에 대한 천사의 설명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바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본래 “예수”라는 말은 히브리어 “여호수아”에서 가져온 말입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대로 구약의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정복에 성공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난날 그 영광의 시간을 그리워 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아들들의 이름을 “예수로”지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약속한 구원은 사람들이 기대한 구원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백성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압제 아래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세금과 군대의 횡포에 시달렸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바란 것은 로마를 몰아내고 자유를 되찾아 줄 강력한 군사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말합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한가한 소리였습니다.
이 오해의 간격 때문에, 예루살렘 입성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이 불과 며칠 만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며 돌아섰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로마를 무너뜨릴 칼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영혼 깊숙이 자리 잡은 진짜 폭군, 곧 죄를 무너뜨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로마가 무너지고 정치적 독립을 이룬다 해도, 인간의 죄악이 일으키는 온갖 폭력과 비극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진짜 문제는 언제나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드러난 증상이 아니라, 존재의 뿌리를 치료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치 피부에 난 상처만 치료해 달라고 찾아간 환자에게, 의사가 몸속 깊은 곳의 근본 원인을 정확히 짚어 수술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표면적인 필요를 넘어, 가장 깊은 곳까지 찾아와 고치십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이제 마태는 이 모든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구약 성경을 인용하며 설명합니다. 22~23절 새번역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22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는 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여성이 아들을 낳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신비로운 사건 자체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남녀 간에 친밀한 관계가 있었느냐 아니냐 여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종종 ‘처녀 이스라엘’로 불렸습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만들어 낼 수 없는 무력한 처지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노력과 결심으로는 결코 구원의 생명을 잉태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은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임을 선언합니다. 인간에게는 아무런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이 땅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이루신 사건입니다. 죄인의 철저한 무능과 무지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의 손길만이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 고백하는 참된 복음입니다.
여기서 또 다른 예수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에 담긴 주님의 구원을 더욱 생생히 알려줍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옛날 어느 임금이 문서에 옥새(玉璽)를 찍어 보냈다면 아무리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도 왕의 권위를 전달합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의 임재가 비슷했습니다. 성전 안에 있는 지성소 장막 안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백성은 두려움에 떨며 멀리서, 조심스럽게 그분의 오심을 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의 가장 생생한 임재를 선언하셨습니다. 옛 임금들이 적어 보낸 문서 한 장이 아닙니다. 온 세상 가장 위대한 왕이신 주님이 화려한 옷을 벗고, 직접 낮고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걸어 들어오는 사건입니다. 온갖 악취와 얼룩으로 가득한 삶 한복판으로 직접 걸어 들어오셔서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리시며 곁에 머무르십니다.
세상의 많은 가르침은 사람이 수행하고 애써서 신의 경지에 다다르는 방법을 말합니다. 하지만 임마누엘 하나님은 정반대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이러한 복음의 위대함을 진심으로 고백하고 깨달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부를 이름
관련해서 임마누엘을 전달하는 천사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사가 인용한 이사야 7장 14절에 보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사람을 한 명으로, 단수로 적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23절을 신약 원문으로 보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여러 사람으로, ‘복수형’으로 적혀 있습니다.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놀라운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는 오직 소수의 신실한 사람들만이 이 이름을 붙들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렸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더 이상 한 사람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이제는 “그들”이 부르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 ‘예수’이시고 ‘임마누엘’이라는 주님의 이름은 바로 ‘우리가 부를 이름’입니다. 그 이름에 담긴 사랑과 구원이 바로 우리를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이름을 감격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마태복음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맨 첫 장인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한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가 모두 끝난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서 다시 한번 같은 약속으로 마무리됩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 새한글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20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했던 것은 무엇이나 다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바로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날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기 전에 남기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의 처음과 끝이 같은 약속으로 맞물려 있습니다. 마태복음 전체가, 그리고 예수님의 온 생애가 이 하나의 이름 안에 담겨 있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전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베들레헴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먼저 걸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지나 성령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 한복판에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온 생애를 통해 한결같이 알려주시는 소중한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거듭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어떤 시련에도 변함없이 지켜야 할 생명의 진리입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이 거룩한 주님의 이름이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일 줄 믿습니다. 피곤함에 지친 몸으로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때, 일터에서 힘겹게 자리를 지킬 때, 병상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그 모든 고단한 삶의 순간에도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이 연약함을 짊어지고 살아가시다가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진심 어린 고백을 담아 부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만이, 임마누엘의 주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름을 누구보다 감격하며 맞이한 사람입니다. 그는 과거에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도저히 씻을 수 없는 부끄러운 과거를 지녔습니다. 다메섹을 향해 가는 길에 시력을 잃으며 철저한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일으키셨습니다. 죄악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훗날 바울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빌립보서 2장 5~11절을 새번역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입니다. 마태복음 족보에 기록된 여인들처럼, 아니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이 가장 초라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함께 하셨다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다른 헛된 영광을 내려 놓으시길 바랍니다. 오직 주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고 예배 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 이름을 우리 곁에 있는, 인생에 지쳐 쓰러진 이들과 함께 부르며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
저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는 하나님.
오늘 저희에게 주신 두 이름, 예수와 임마누엘을 다시 새깁니다. 저희의 죄를 구원하시고, 저희의 인생 한복판까지 걸어 들어오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고백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앞에 무릎 꿇고 주님께 영광 돌리며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