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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14~16절; 에베소서 5장 8~9절 “빛을 품고, 빛이 되어”

2026-09-13
정대진 목사

2026년 9월 13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5장 14~16절; 에베소서 5장 8~9절 “빛을 품고, 빛이 되어”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영광으로 우리를 비추시고 빛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성도님들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빛에 안기다

혹시 이곳이 어디인지 아시겠습니까? 제주도 섭지코지 근처에 있는 “유민 아르누보 뮤지엄”입니다. 아름다운 유리 공예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물 못지 않게 건물 자체도 매우 유명합니다. 세계적인 거장 안도 타다오의 작품입니다. 다음 사진에 보시듯이, ‘빛의 건축가’라는 별명답게 지하로 들어간 건물 안에 들어오는 빛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꼭 방문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이 미술관에 얽힌 뭉클한 추억이 있습니다. 작년 10월이었습니다. 제가 섬기고 있던 교회 부서 중 한 곳 봉사자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갔습니다. 저의 정배교회 담임 목사 청빙을 축하하며 부서 자체로 주도해서 여행을 계획하고 진행했습니다. 그전까지 없었던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권사님 중 한 분께서 건축에 관심이 많으셔서 일부러 저를 위해 일정 중에 유민 미술관을 넣으셨습니다. 


천천히 관람하다가 눈 앞에 보이는 예술 작품 그리고 그 옆에 쏟아져 내리는 빛이 저를 끌어 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동안 꽤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임하는 날까지 마음이 복잡한 상황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저를 그곳에 보내시어, 그 특별한 공간을 통해 포근하게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공간’의 중요성을 실감했습니다. 한 번 쯤은 비슷한 일을 겪어 보셨을 겁니다. 잘 지은 건물이 주는 아늑함과 온기가 있습니다. 교회 예배당이 그러해야 합니다. 물론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 건물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부르며 지나치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걸 주의해야 합니다. 다만 예배당을 우리가 복음을 온전히 경험하는 공간으로 가꾸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지난 2주간 “빛의 여정”을 주제로 환경 개선 공사를 한 이유입니다. 마침 풍성한 이론과 실무 경험이 있는 최고 전문가이신 오동섭 목사님과 제가 오랜 인연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을 모시고 우리 교회 예배당을 보여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우리 교회 예배당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감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모든 아이디어를 “빛”이라는 주제로 정리했습니다. 성도님들께서 예배당에 들어오고 나가는 걸음을 통해 복음의 빛을 경험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1층에 들어오셔서 슬리퍼를 갈아신는 곳에 남쪽을 향해 있는 커다란 창문이 있습니다. 그 앞에 써 있는 성경 구절을 기억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14절을 화면 보시면서 공동번역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1층 창문은 이 말씀을 마음에 품을 최적의 장소입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함께 반드시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 거친 세상을 살아가며 상처 입은 자녀를 주님께서 환영하십니다. 따뜻한 햇빛으로 껴안아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정체성을 새롭게 일깨워 주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솔직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부담감이 올라오곤 합니다. 나 자신을 돌아볼 때, 밝은 빛 대신 음울한 어둠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모습으로 가득합니다. 도무지 빛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막중한 부담감을 안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빛이 되어라”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빛이 되라는 요구라면 누구나 주눅 들고 움추러 듭니다. 모든 인간은 연약한 죄인입니다. 영혼 깊이 어둠이 숨 쉬고 있습니다. 죄인이 빛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대신 이미 너희는 빛이 되었다는, 존재 자체가 달라졌음을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처음 들었던 제자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당대 유대 사회에서 인정받는 종교 엘리트가 아닙니다. 율법적으로 완벽하거나 대단한 인품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귀족 출신도 아닙니다. 갈릴리 호숫가의 평범하고 거친 어부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으며 매국노 취급을 당하던 세리를 포함해, 하루하루의 삶을 겨우 견뎌내던 허물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남들보다 대단한 성과를 이루거나 고결한 업적을 이루어서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게 아닙니다. 철저히 은혜입니다. 여전히 영혼 깊은 곳에는 흑암과 혼돈으로 가득합니다. 너무나 약하고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부르심을 따라 걷고 위대한 사랑에 기자 빛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마치 스스로 조금의 빛도 만들 수 없지만 태양 빛을 마주 보고 반사하는 밤 하늘의 달과 같습니다. 



함께 빛을 이루는 사명

이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포하신 말씀의 의미를 풍성히 깨달아 알기 위해 참고해야 할 구약 성경이 있습니다. 바로 이사야서입니다. 이사야 42장 6절 함께 읽겠습니다.


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아버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통해 이루실 일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이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온 우주의 참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절망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던 백성에게 구원의 큰 빛을 비추셨습니다. 은혜의 빛으로 음습한 죄악을 비추시고 생명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중요한 사명 선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구원하는 메시아로서 짊어지신 역할을 나누셨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지를 뻔히 알면서도, 심지어 십자가를 앞에 두고 당신을 배신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으면서도 빛을 품고 빛이 되어 세상을 향해 비추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게다가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 1세기 교회 성도들의 삶을 가만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유대교 주류 사회의 미움을 받아 회당에서 쫓겨났습니다. 일터를 잃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 숭배 체제 속에서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방에서 핍박과 미움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최대한 몸을 사리고 은밀하게 숨어 지내는 것이 안전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위대한 선포를 하십니다. 마치 산 위에 세워진 동네가 숨겨지지 못하는 것처럼, 등잔대 위에 올려놓은 등불이 집안 모든 사람을 비추는 것처럼, 빛인 자신을 세상 앞에 온전히 드러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쟁에서 밀리고 쓸모없는 취급받던 제자들에게 거룩한 자부심을 일깨우는 선포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나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어두운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하나님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할 때, ‘너희’는 우리말 번역과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을 의미하는 ‘복수형’입니다. 그런데 ‘빛’은 한 사람을 가리키는 ‘단수형’입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빛의 사명은 나 홀로 외롭게 펼치는 개인기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어 발하는 위대한 빛입니다.


우리 정배교회에게 맡겨진 가장 소중한 사명입니다. 더욱 사랑으로 하나되길 소망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세찬 바람이 불면 허무하게 꺼져버리는 작은 촛불 하나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주님 안에서 하나의 빛을 이룰 때 이 세상의 그 어떤 어둠도 이길 수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올 때마다 1층 창문 앞에 적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을 통해 거듭 다짐해야할 진리이자 사명입니다.



야곱의 십자가

이렇게 말씀을 통해 생명의 빛을 품은 성도는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해야 합니다. 이 땅에 한 아기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주님의 삶을 천천히 곱씹을 때 더욱더 빛을 아름답고 영롱하게 세상을 향해 비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단을 따라 주님의 일생을 묘사한 그림을 나무에 새겨 걸어둔 이유입니다. 계단에 설치한 등은 성령님의 조명을 상징합니다. 성경께서 비추시는 빛을 따라 천천히 오르면서 예수님의 삶을 하나씩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그 끝에 있는 마지막 그림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묘사합니다. 공사가 진행 중일 때 놀란 분들이 계셨습니다. 주님의 생애가 십자가에서 끝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닙니다. 계단 위를 올라 눈앞에 마주하는 커다란 벽에 걸린 조형물이 있습니다. 바로 “야곱의 십자가”입니다.




창세기 28장에 기록된,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과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제작한 십자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표현한 십자가입니다. 장신대 채플실에 있는 십자가와 같은 디자인입니다. 원작자가 직접 제작해 설치한 야곱의 십자가는 청주 상당교회 다음으로 우리 교회가 두 번째 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생애와 부활을 묵상하고 가급적 곧바로 2층 예배당에 들어오지 마시길 권합니다. 헌금을 적는 공간과 게시판을 일부러 2층으로 올리고 그 앞에 묵상 공간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렘브란트가 그린 “엠마오의 저녁 식사”입니다. 이미 예전에 설교 시간에 한 번 보여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무척 사랑하는 그림입니다. 사진으로 인쇄해 제 목양실 책상 앞에 두고 늘 묵상하는 명작입니다.




제가 이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뿜어나오는 영광의 빛 때문입니다. 다른 그림들처럼 주님을 마치 천사처럼 신비롭게 몽환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주변을 어둠으로 절묘하게 감쌉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얼굴에도 고난을 겪은 어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야곱의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죽음과 부활을 모두 아우르는 복음의 본질을 위대한 조화로 묘사합니다. 예배 전에 시간 여유가 있다면 미리 앉아서 천천히 묵상하고 들어오시기를 추천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교회 들르실 때도 가만히 의자에 앉아 십자가를 마주하고 기도하시길 권합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보시듯이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새롭게 설치했습니다. 야곱의 십자가 안에 있던 무늬를 고스란히 안에 넣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보혈과 다시 사신 생명을 동시에 담아 냈습니다. 흔한 상징물이 아닙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정체성을 소중히 품고 기도하며 예배하기 위한 은혜의 도구입니다. 참고로 두께는 3cm, 폭은 12cm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고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로 대표되는 신구약 성경을 상징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정배교회 예배당에만 있는 십자가입니다. 이 의미를 묵상하며 예배하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예배 마치고 문 밖을 나설 때 우리 앞에 또 다른 창문 놓여있습니다. 거기에는 에베소서 5장 8~9절을 화면 보시면서 새번역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8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9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님께서 안겨주신 소중한 정체성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에베소 교회를 향해 편지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신분 차이를 파격적으로 대조해 보여 줍니다. 바로 어둠과 빛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과거에 단순히 어두운 환경이나 불행한 상황 속에 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둠 그 자체’였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자신의 어두운 과거가 절절히 담긴 고백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빛”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마치 애벌레가 고치를 뚫고 나와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날아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보잘 것 없는 벌레로 보였으나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완전히 변화된 삶의 방식을 살아갑니다.


이처럼 빛으로 변화되는 유일한 통로를 바울은 언급합니다. 바로 “주 안에서”입니다. 이 말은 본문 뿐만 아니라 바울의 편지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다스림 안에 머문다는 의미입니다. 죄와 사망의 통치에서 완전히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안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 결과 소속과 신분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선포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고,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고 계단을 올라 들어온 예배당에서 오직 주님만을 높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나에게는 선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너무나 연약하고 어리석을 뿐입니다. 온통 어두움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 안길 때 우리는 이 세상 가장 찬란한 빛이 됩니다. 이 놀랍고도 감격적인 진리를 진심으로 맞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세 가지 열매

동시에 주님 안에서 주 안에서 존재 자체가 빛으로 달라진 성도의 사명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로 “빛의 자녀답게” 사는 삶입니다. 그 구체적인 열매를 바울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9절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빛의 자녀된 성도들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 이 세가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가정과 일터를 비롯한 인생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야 할 중요한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본을 보이시며 가르치신 진리이기도 합니다.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착함’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착함’은 단순히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유순한 상태가 아닙니다. 이기심을 거슬러 타인의 유익을 위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베푸는 ‘따뜻한 관대함’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외면과 손가락질하던 소외된 이들, 병든 자, 가난한 과부, 세리와 죄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말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약한 자들의 아픔을 끌어안으시는 거룩한 선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둘째는 ‘의로움’입니다. 단순히 법정에서 무죄 선언을 받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뿌리를 내립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올바름을 실천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더 나은 의’를 몸소 가르치고 실천하셨습니다. 권력자들의 부당한 횡포에 맞서 소외된 자들을 지켜주셨습니다. 안식일에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 율법의 본질임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나누는 진실한 사귐으로부터 나오는 공의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셋째, ‘진실함’입니다.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 도덕적 차원을 넘어섭니다. 겉과 속이 한결 같은 진정성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에메트’에서 유래한 이 개념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변함없이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길거리에서 기도하고 나팔을 불며 구제하던 바리새인들의 겉치레와 가면을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오직 하늘 아버지만을 향한 단일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까지 진실하게 걸어가셨습니다.


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은 머릿속에만 머무는 관념이 아닙니다. 식탁을 마주한 가족들, 일터에서 마주하는 동료들을 비롯해 현실을 가장 가까이 함께 보내는 이들을 향해 구체적인 성품과 행동으로 피어나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때, 세상을 지배하는 어두움은 힘을 잃어 버립니다. 그 빈 자리에 참 빛이신 하나님의 삶아 계심이 온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 정배교회 온 성도의 삶이 그러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계속 이어가는 빛의 여정

그렇다면 예배를 마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마주보는 창문을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이번 공사에 숨은 세부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모든 창문을 하늘 방향으로 둥글게 타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럽에 있는 오래된 교회 창문처럼 하늘을 향해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겸손한 태도를 표현합니다.


그 창문에서 쏟아지는 빛과 함께, 앞서 묵상한 대로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세상 속에서 지켜야 할 소중한 사명입니다. 동시에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아가며 걸음을 내딛는 힘을 주는 위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1층 거울 앞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정체성을 확인하고 교회 밖을 나섭니다. 그렇게 “빛의 여정”을 마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가정과 직장을 비롯한 일상 속에서 빛의 여정을 계속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예배당 안에서 빛의 여정은 예배당 밖에서 진정한 빛의 여정을 이루어갈 때 비로소 참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참 빛을 세상에 비추시기 위해 무엇을 하셨을까요? 당신 자신을 불태우셨습니다. 마치 등불이 빛을 환하게 비추기 위해 심지를 태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모든 생명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철저히 모욕과 핍박을 당하셨습니다. 그 결과 찬란한 부활의 영광을 온 우주에 가득히 비추셨습니다.


그런 주님을 본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헛된 탐욕을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아득바득 남을 이기고 굴복시키려는 자존심을 내려 놓으시길 바랍니다. 기꺼이 낮아지고 섬기며 손해를 감수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를 불태운 모든 아픔이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세상을 밝게 할 줄 믿습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를 덮쳐온, 그리고 내 안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모든 어둠은 하나님의 빛을 밝히는 고귀한 연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통하여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시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손길로 말미암아 모든 상처와 회복되듯이, 오랜 암흑으로 뒤덮인 영혼과 세상이 찬란하게 빛나는 변화를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말씀 드렸듯이 작년에 방문했던 유민 미술관은 저에게 따뜻한 위로를 안겨 주었습니다. 어두움을 비추는 빛의 포근함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다시 희망을 호흡할 수 있었습니다. 그 강력한 추억 때문에 지난 여름에 가족과 함께 한 번 더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굳이 다시 갈 것 같지 않습니다. 빛의 여정을 주제로 새롭게 단장한 우리 교회에서 더욱 선명한 복음의 빛을 충만히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사 과정에서 마음 모아 기도했습니다. 성도님들이 우리교회 예배당에 들어와 계단을 오르내리는 걸음 자체가 가슴 뭉클한 묵상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공간을 통해, 빛으로 임재하시고 빛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히 경험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정배교회를 드나드는 우리 아이들 인생에 가장 소중한 추억이 흐르는 아름다운 배경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그렇게 빛을 품고 빛이 되어, 빛의 여정을 정배교회 예배당 안팎으로 묵묵히 기쁨으로 이어가는 모두가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참 빛을 온 땅에 비추신 주 하나님

“빛의 여정”을 주제로 진행한 예배 환경 개선 공사를 마치게 하신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인생의 고단한 먼지가 묻은 신발을 벗은 저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며 감격적인 정체성을 선포하신 말씀에 귀 기울입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가 아니라 달과 같은 반사체임을 고백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세상을 향해 나서며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이라는 복음을 진심으로 고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배당 안과 밖에서 빛의 여정을 담대히 이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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