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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3장 “막벨라 굴 앞에서”
2025년 12월 24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23장 “막벨라 굴 앞에서” 찬송가 488, 490장사라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127년의 험난한 인생을 마쳤습니다. 그녀의 고단한 삶에 함께 한 남편 아브라함을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애통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계속 슬퍼할 수만은 없습니다. 곧 현실과 마주합니다. 바로 아내의 시신을 둘 곳이 없는 고단한 나그네 신세입니다. 성경은 분명 아브라함이 상당한 재산을 보유했다고 알려줍니다. 그렇지만 그는 뜨네기 신세입니다. 자기 땅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방에 보이는 모든 땅을 주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필요한 장례를 위한 땅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원주민들은 외지인들을 경계하기 마련이고 특히나 땅의 소유 문제는 언제나 예민한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시신 앞에서 일어나 그 지역에 영향력을 끼치는 헷 족속에게 찾아갑니다. 그들과 토지 거래를 합니다. 서로 정중한듯 하나 나이든 족장 아브라함으로서는 상당히 굴욕적인 상황이 이어집니다. 5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를 장례 지내기 위한 땅을 헷 족속에게 요청합니다. 6절에 의하면, 헷 족속은 표면적으로는 아브라함의 명예를 높이며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정작 구체적인 내용은 없습니다. 우회적인 거절이거나 보다 더 땅값을 받아내기 위한 형식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노회한 아브라함은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몸을 땅에 굽혀 ‘소할의 아들 에브론’이 소유한 막벨라 굴을 사고 싶다고 간청합니다. 예수님도 그러했듯이 그 시대, 그 지역 사람들은 우리나라와 달리 시신을 땅에 묻는 게 아니라 굴에 넣고 돌로 입구를 막아 자연 부패시키는 장례 방식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무리 중에 있던 에브론이 자기 땅을 드리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에브론의 말 역시 진심이 아니라 거래를 위한 형식적인 언행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은 사백 세겔을 주고 에브론의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둘러싼 나무를 샀습니다. 성문 앞에서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소유를 확정 지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내 사라의 장사를 지냈습니다. 18~20절 함께 읽겠습니다.18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19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20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18절과 20절에서 두 번, 그 땅이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되었다고 거듭 명시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유일한 땅입니다. 그가 나그네로서 얼마나 초라하고 힘겨운 삶을 살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지금 우리가 막연하게 연상하는 위대한 인물의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하나님은 그에게 많은 자손과 땅을 약속하셨지만 정작 그가 사는 날 동안에 마주한 혈육은 매우 적었고 땅은 무척 좁았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그가 당장 이룬 성취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과 극명히 반대되는 현실을 감수하였습니다. 결핍과 마주하고 굴욕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향한 당신의 언약을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이루셨습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며 많은 한계와 가난에 시달립니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자녀를 향한 눈부신 약속과는 한 참 거리가 먼, 비참한 시련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수록 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보이신 놀라운 사랑과 희생을 마음에 품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모든 아픔과 눈물을 위대한 영광의 씨앗으로 삼으실 줄 믿습니다. 기도자녀들의 믿음을 기뻐 받으시는 주 하나님아내를 장사 지낼 땅이 없어 비참한 고난을 통과한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저희를 발견합니다. 주님의 찬란한 언약과는 너무나 다른 쓰라린 결핍과 마주하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희 삶의 그 모든 시련과 가난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나라를 아름답게 이 땅에서 이루실 줄 믿습니다.하루하루 마주하는 아픔이 클수록, 그보다 더 눈부시게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저희의 판단과 기대를 넘어서는 참된 소망을 품고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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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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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장 “보시는 하나님”
2025년 12월 23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22장 “보시는 하나님”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과 마주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를 창세기는 그동안 절절히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요구합니다. 그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단순히 무리한 요구에 대한 좌절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뿌리 깊은 실망으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자녀를 바치는 인신 제사는 그 시대 서아시아 종교에서 흔히 보던 풍습이기 때문입니다. 깊은 절망이 아브라함 마음에 젖어들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주변 우상들과는 전혀 다른 정의와 공평의 하나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따뜻한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오해였습니다. 다른 우상들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아들을 태워 바치라고 요구하는 잔악무도한 신이었습니다.결국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으로 향합니다. 마침내 산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종들만 남기고 번제를 위해 쓸 나무와 불과 칼을 챙겨 이삭과 함께 산 위에 오릅니다. 그러자 아들은 종들 앞에서는 차마 못 던진 질문을 아버지께 드립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그 때 아브라함의 심경이 어떠했을까요? 아버지는 슬픔을 억누르고 이렇게 답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주님께서 정하신 곳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순종해 아들을 꽁꽁 묶었습니다. 많은 나무를 짊어질 정도로 충분히 자란 이삭 역시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두 손으로 칼을 움켜쥐었습니다. 아들이 고통 없이 빨리 숨을 거두도록 미리 생각해 두었던 급소를 향해 팔을 움직였습니다. 바로 그 때 하늘에서 황급한 소리가 들여옵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며 만류합니다.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을 보여 주시며 이삭 대신 제물로 바쳐 번제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타오르는 불길이 안겨준 온기가 아브라함의 마음을 녹였을 것입니다. 긴장감에 세차게 두근거리던 심장에 고요한 위로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들과 달리 인신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역설을 발견하는 장면입니다. 매우 잔인하고 가혹하지만, 주님과 생생한 화해를 고백하는 사건입니다.그 위대한 제사를 드린 땅을 기념하며 아브라함은 그 곳에 임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아브라함은 지금까지 겪은 격정적인 사건을 한 단어로 요약합니다. 바로 ‘이레’입니다. 여기서 이레는 무슨 뜻일까요? 14절 안에서 쉽게 답을 발견합니다. 바로 ‘준비’입니다. 주님께서 이삭을 대신할 제물을 예비하시고 공급하신 것으로 즉각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넘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르에’의 1차 의미는 ‘보다’이기 때문입니다.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극적인 공급 이전에 그분의 눈 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을 듣고 느낀 번민하고 좌절, 모리아 산으로 향하는 무거운 발걸음, 결국 아들을 향해 칼을 들이미는 극심한 절망 모두를 하나님은 보셨습니다. 보시고 당신을 보이시고 예비하신 숫양을 보내셨습니다. 이런 진리를 오늘 하루도 더욱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때때로 우리 역시 하나님께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없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무거운 걸음으로 절망을 헤치고 지나갑니다. 어쩌면 지금 그런 고통 가운데 괴로워하고 계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을 통해 거듭 마음에 새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의 모든 아픔과 좌절을 보십니다. 그 상처와 결핍 가운데 가장 합당한 선물을 예비하시고 보내십니다. 그러한 사랑어린 주님의 눈길과 시선을 맞추며 나아가는 오늘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자녀들의 모든 아픔을 보시는 하나님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처럼, 저희도 때로는 주님께 너무나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무거운 걸음으로 저마다의 모리아 산으로 향하곤 합니다. 그런 저희의 모든 슬픔과 절망을 들여다 보시고 자신을 드러내시며 합당한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의 구원을 신뢰합니다. 십자가에서 아들의 숨을 거두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마음에 품고, 따뜻한 눈길을 전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음을 가슴에 품고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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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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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1장 “웃음, 그 후”
2025년 12월 22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21장 “웃음, 그 후”마침내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지금까지 창세기를 함께 읽어오시면서 공감하실 겁니다. 단지 한 아기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간절히 바라온 위대한 언약의 결실입니다. 수없이 좌절하고 무너진 끝에 품에 안은 위대한 사랑의 결실입니다. 그날 아브라함과 사라는 살면서 가장 커다란 미소를 보였을 겁니다. 성경은 그 때, 사라의 격한 기쁨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6~7절 함께 읽겠습니다.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7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18장 12절에서 사라는 하나님을 비웃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 삶에 즐거움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그녀가 주위 사람들에게 들뜬 목소리로 외칩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웃음을, 아들 이삭을 안고 지었습니다. 그녀는 창조주 하나님의 생생한 권능과 사랑을 아들의 체온을 통해 뜨겁게 느꼈습니다.그런데 성경은 동시의 그녀가 보인 냉혹한 행동 또한 함께 기록합니다. 이삭이 자라 젖을 뗀 것을 기념하는 잔치가 열렸습니다. 대략 만 세 살때 열리는 행사입니다. 유아 사망이 흔했던 옛날, 위험한 시기를 무사히 넘긴 것을 축하하는 뜻깊은 장면입니다. 그 때 사라의 눈에 이삭과 이스마엘이 함께 있는 장면이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문 9절은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라고 기록합니다.하지만 실제로 그러했는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이복형제간의 평범한 놀이 장면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사라의 눈에는 예사롭지 않아 보였을 겁니다. 어렵게 낳은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보호 본능이 극도로 예민하고 날카롭게 드러냈습니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냅니다. 고대 서아시아 지방에서 엄마와 어린 아들만 광야로 내보내는 것은 사실상 사형 선고입니다. 하갈은 임신부일 때에 이어 한 번 더 비참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급기야 챙겨온 물이 모두 떨어졌습니다. 갈증에 힘겨워하며 차츰 숨이 꺼져가는 아들의 모습을 차마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갈은 그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나아가 꺼이꺼이 울었습니다. 그녀에게 하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17절 함께 읽겠습니다.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창세기에서 특별히 자주 반복되는 하나님에 대한 행동 묘사을 여기서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가족에 의해 이용당하고 폭력을 겪은 하갈과 이스마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도 귀를 기울이십니다. 응답하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시고 샘물을 마시게 하십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범위는 무한합니다. 온 우주를 아우르는 드넓은 사랑으로 연약한 죄인의 간구에 귀 기울이십니다.이와 같은 만유의 하나님께 오늘 하루도 기도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주님께 은혜를 입고 기뻐하면서도 여전히 미움과 분노로 가득한 연약함을 고백 하시길 바랍니다. 동시에 우리의 모든 신음에 응답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참된 평안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기도참 평안의 주 하나님주님께서 저희 삶에 안겨주신 참 기쁨을 소리높여 찬양합니다. 인생의 그 어떤 절망도 이겨내는 진정한 행복과 승리를 복음 안에서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동시에 욕망과 불안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공격하는 저희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고백합니다. 받은 사랑 그대로 전하고 나누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때로 힘겨운 고난에 빠질 때,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시고 탄식에 귀 기울이시는 주님의 드넓은 마음을 신뢰하며 은혜의 샘물을 마시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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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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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9장 “뒤돌아 보다”
2025년 12월 20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19장 “뒤돌아 보다”마침내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이 내렸습니다. 성경은 그 곳에 일어난 극심한 심판을 보여주기 전에 그 땅에 얼마나 죄악으로 가득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천사 둘이 어느 날 저녁 소돔에 도착하였습니다. 롯은 삼촌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극진히 맞이 합니다. 자기 집에 모시고 음식을 베풀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하지만 낯선 두 사람이 찾아왔다는 소문을 들은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을 둘러쌌습니다. 그런 다음 매우 충격적인 요구를 합니다. 그들을 자기들에게로 끌어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상관’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1차적인 의미는 ‘알다’입니다. 본문의 맥락과 다른 성경에 사용된 용례를 보았을 때 강제적인 성관계를 뜻 합니다.환대하고 따뜻하게 맞이해야 할 나그네들을 소돔 사람들은 추악한 욕망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멀리서까지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 땅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롯은 그들의 악행을 만류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 때 천사들이 롯을 보호한 다음 이제 소돔을 심판할 것을 선언합니다. 롯의 가족들을 데리고 얼른 성 밖으로 도망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 말씀에 따라 롯은 딸들과 약혼한 예비 사위들에게 자기가 들은 심판 소식을 알려줍니다. 그들의 반응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14절 함게 읽겠습니다.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사위들은, 자기들을 살릴 복음을 두고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얼마나 거짓으로 가득했는 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진리가 웃음거리로 전락한 처참한 현실을 낱낱이 보여줍니다.이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롯의 가족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도망칠 때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서둘로 산으로 도망쳐야 합니다. 마침내 하늘에서 유황과 불이 비처럼 쏟아졌습니다.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려옵니다. 불꽃이 곳곳마다 타오르고, 불쾌한 타는 냄새가 코끝을 향해 옵니다. 한시 바삐 달려가기 바쁩니다. 그 때 일어난 사건을 26절이 기록합니다.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롯의 아내는 도망치다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금세 그녀는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장면을 두고 그녀가 소돔에 대한 미련 때문에 몸을 돌린 결과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롯의 아내가 불순종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 원인이 과거에 누렸던 부귀영화에 대한 아쉬움이라는 언급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이 장면을 통해 한 가지 분명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심판의 자리에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소돔이 저지른 폭력에 희생된 이들이 외치는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오랜 인내의 결과입니다. 마침내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그 사이에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 있는 힘껏 내달려야 합니다.물론 이런 장면을 당장 우리 일상에 적용하는 건 곤란합니다. 오히려 지나친 이원론을 경계해야 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신앙의 근거는 불안과 초조함이 아니라 사랑과 기쁨이어야 합니다. 심판 받을까 두려워 벌벌 떨며 강박에 빠진 모습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천천히 걷거나 가끔씩은 멈춰 쉬어도 괜찮습니다.다만, 인생의 방향을 정확히 해야 합니다. 어영부영하지 말고 주님께서 알려주신 구원의 산을 향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향해 나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기도공의로우신 주 하나님소돔으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던 이들의 부르짖음을 주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셨음을 말씀을 통해 확인합니다. 동시에 그 땅에서 벌어진 처참한 죄악의 현실을 발견합니다. 약한 이들을 따뜻하게 돌보지 않고 도리어 더러운 탐욕의 대상으로 여기고, 진리를 비웃었던 그들에게서 저희의 죄와 연약함 또한 발견합니다.죄의 길에서 단호히 벗어나 담대히 생명의 진리를 향해 달려가길 소망합니다. 거짓과 욕망에 취해 타협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원의 길을 열고 전하며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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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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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장 “아브라함의 중보”
2025년 12월 19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18장 “아브라함의 중보” 서아시아의 한낮은 매우 뜨겁습니다. 사람들 대부분 나무 그늘 아래에서 더위를 피합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했습니다. 그 때 멀리서 걸어오는 낯선 남자 셋이 눈에 띄었습니다. 유목민 문화에서 나그네 대접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관습 만이 아니라 몸에 밴 섬김을 보여 줍니다. 상당한 규모를 이끄는 족장이지만 굳이 달려나가 몸을 땅에 굽혀 인사 하였습니다. 발 씻을 물을 가져다 주고 음식을 베풀었습니다.그들은 하나님이 이끄는 일행이었습니다. 어제 읽은 17장에서 할례 의식에 이어 한 번 더, 내년에 분명 사라에게서 아들이 태어날 것을 분명히 알려주기 위한 방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주님의 깊은 애정을 드러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명확하게 문장으로 말씀하십니다.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하나님이 말씀 하십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여기서 아브라함 대신에 자기 이름을 넣어보시기 바랍니다. 매우 감격스러운 음성입니다. 아브라함을 주님이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고 신뢰하는 지를 분명히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십니다. 바로 소돔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들려온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그들을 멸하려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류합니다. 소돔 땅에 혹시나 50명이 있다면 용서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 이렇게 다섯 번에 걸쳐 집요하게 하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그 결과 마지막으로 의인 열명을 구원의 조건으로 약속 받았습니다.이러한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고 당신의 뜻을 낱낱이 드러내시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복종하기 바라지 않으십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주님의 뜻에 의문을 표하고 따져 묻는 것을 얼마든지 이해하고 받아들이십니다. 특히나 그 안에 다른 사람을 향한 애끓는 중보의 마음이 있다면 더욱 그러합니다.바로 여기에서 노아와 아브라함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영국 최고 랍비를 역임한 조너선 색스의 통찰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왜 ‘믿음의 조상’이라는 영예가 훨씬 앞서 존재해 ‘의인’이라고 칭함 받았던 노아가 아닌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을까요? 둘 다 ‘심판’ 선고를 전해 들었습니다. 노아는 묵묵히 알겠다고만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간청하였습니다.그렇다고 해서 노아가 잘못했다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노아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노아가 아닌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 당신의 나라를 그려가시는 뜻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19절 말씀과 같이, 그의 후손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을 이루는 게 목적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아브라함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될 때, 부당하고 지나쳐 보일 때, 담대히 나아가 당돌히 막아서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반가워하시며 기뻐하십니다. 성경 전체에 드러난 주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웃을 살리는 기도, 주위 사람들을 일으키는 손길을 건네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의 모든 섬김을 하나님께서 즐겁게 받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줄 믿습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너에게 숨기겠느냐”기도정의와 공평의 주 하나님소돔 심판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의 위대한 중보기도를 말씀 가운데 확인합니다. 인간의 만류와 외침에 기꺼이 반응하시고 귀 기울이시는 주님의 드넓은 품을 발견합니다. 저희 역시 아브라함을 본받아 죽음 앞에 놓인 이들을 위해 중보하며 그들을 사망에서 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사랑받는 자녀로서 믿음의 기도를 드러내길 소망합니다. 저희에게 반드시 이루실 언약을 소망하며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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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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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7장 “전능하신 하나님”
2025년 12월 18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17장 “전능하신 하나님” 어제 읽은 창세기 16장의 마지막 절은 다음과 같습니다.16 하갈과 아브람 사이에 이스마엘이 태어날 때에,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이었다.바로 다음절인 오늘 본문 17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불과 1절 사이에 13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여든 여섯 살이었던 아브람이 구십 구세가 되었습니다. 더욱더 쇠약해진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언약에 마음이 무너져 내리며 내면에도 깊은 주름살이 잡혔을 겁니다. 그런 아브람을 향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1절 다시 한 번 다같이 읽겠습니다.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주님께서 당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말씀이 아브라함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더 큰 상실과 좌절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토록 전능하신 하나님이 정작 당신이 약속하신 언약을 아직 이루어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거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매우 도발적인 반응을 합니다.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었습니다. 기쁨으로 짓는 미소가 아닙니다. 쓰디쓴 냉소입니다. 꿈과 기대가 산산이 무너지고 부서진 노인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입니다. 그런 까닭에 18절에, 자조적으로 말합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단호하게 내년에 사라가 낳을 이삭을 통해 언약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은 집안 모든 남자와 함께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철저히 무력한 순간입니다. 움직일 수 없이 그저 아파하고 신음할 뿐입니다. 이 상황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너무나 큰 상징과 교훈을 안겨줍니다.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지극한 무력함을 통해 다가옵니다.하나님께서 분명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가리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전능하심은 아브라함의 소원을 마법처럼, 그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즉각 이루는 권능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실망을 끼치고 좌절을 안긴, 철저한 절망과 무능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능력입니다.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러합니다. 아기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비참한 모습으로 매달려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온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마음 깊이 품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굳게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동시에 그 전능하심이 지닌 입체성을 성경으로 온전히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하나님의 권능은 때로 너무나 쓰라리고 허무하고 불쾌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주님의 전능은 지극히 무력하고 무능한 얼굴로 나타나는 진리를 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십자가로 드러나신 하나님의 참된 능력이 오늘도 우리를 새롭게 하며 진실로 살릴 줄 믿습니다. 그 믿음을 함께 고백하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기도전능하신 주 하나님마치 아브람이 그러하였듯, 저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주님의 얼굴은 때로 너무나 무능하고 무심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저희의 간절한 바람과 소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냉기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철저히 무력한 모습으로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참된 구원은 힘겨운 공백을 통과한다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 믿음을 붙잡고 살아가며 겪는 그 어떠한 시련도 담대히 딛고 일어날 힘을 주시옵소서. 저희의 연약한 기대를 넘어서는 주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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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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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6장 “살피시는 하나님”
2025년 12월 17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16장 “살피시는 하나님” 찬송가 365, 363장어제 읽은 창세기 15장은 계속된 난임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브람에게 다가오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별을 마음에 품고 믿음을 지니고 의롭게 인정받은 아브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성경에 기록된 눈부시게 위대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장인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은 아내 사래의 권유의 따라 이집트 출신 여종 하갈과 동침하였습니다.분명 칭찬받은 믿음을 지녔으나 여전히 흔들리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브람을 함부로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런 아브라함의 연약함과 현실 속 갈등을 그대로 보여주며 우리를 위로합니다. 동시에 그 결과 겪었던 거친 시련 또한 보여 줍니다.하갈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여주인 하갈을 멸시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래는 가만히 있지 않고 하갈을 ‘학대’하였습니다. 여기서 ‘학대’에 해당하는 단어는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 생활을 묘사할 때도 등장합니다. 그만큼 하갈은 너무나 혹독한 핍박을 받고 무거운 배를 잡고 도망칩니다. ‘임산부 도망자’라는 가장 비참한 처지에 놓입니다. 그런 하갈에게 하나님이 다가와 말을 거십니다. 8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하나님이 물으십니다.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쉽게 지나칠 수 있겠지만 너무나 중요한 대화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물론이고 고대 서아시아 문헌에서 신이 여성에게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네는, 유일한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이른바 아브라함의 정통 족보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불신앙을 드러낸 행동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하갈에게 다가와 아픔에 귀 기울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그녀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하갈은 자신이 입은 은혜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13절 함께 읽겠습니다.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하갈은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가리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역시도 오늘 우리에게는 별거 아닌 장면으로 쉽게 지나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서아시아에서 여성이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행동이었습니다.이처럼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하나님과 하갈 사이의 파격적인 만남과 대화를 소개합니다. 주님은 아브람과 그의 아들들만이 아니라 천대받고 학대당한 이방인 여성에게 다가오셔서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이러한 은혜는 십자가와 부활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살리시려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몸소 나무에 달려 저주받은 모습으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러한 희생으로 온 세상을 구하셨습니다.이를 통해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얼마나 무한한지를 거듭 깨닫습니다. 인간은 어리석은 기준으로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제한합니다. 심지어 구원과 신앙에 있어서도 함부로 누군가를 배제하고 밀어내고는 합니다. 그렇지만 본문은 우리에게 더욱더 커다란 마음으로 주위에 고통당하는 이들의 신음에 귀 기울이고 안고 보듬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그 주님은 바로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는,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기도 가운데 내뱉는 신음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따스한 숨결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사랑을 이루고 전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기도저희 삶의 모든 아픔을 살피시는 하나님임신으로 부푼 배를 부여잡고 도망치는 하갈처럼, 때로 저희도 끝없는 좌절과 절망 가운데 깊이 빠지곤 합니다. 그런 저희의 모든 신음을 주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믿습니다. 그 사랑에 감긴 무한한 넓이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진심으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받은 은혜를 명심하며 주위에 있는 소외되고 아파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도움과 섬김의 손길을 건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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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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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5장 “별처럼 새긴 믿음”
2025년 12월 16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15장 “별처럼 새긴 믿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 뿐만이 아니라 아브람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를 알려 주십니다. 바로 하나님게서 그의 방패이자 상급, 즉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들어도 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생깁니다. 현재 아브람은 두려운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제 읽은 14장은 그가 거둔 놀라운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 결과 많은 전리품을 챙겼고 살렘왕 멜기세덱의 축복까지 받았습니다.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향해 ‘두려워 하지말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적어도 겉으도 드러난 조건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흔히 두려워하는 요소들, 이를테면 건강이나 재산에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무얼 두려워 했을까요? 아브람 스스로 답 합니다. 2~3절 함께 읽겠습니다.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아브람은 곧바로 자기 후계 문제를 두고 이야기 합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예전에 말씀 드린대로 고대에는 신에게 받은 저주로 여겼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시대 자녀가 없는 집은 입양하여 상속자를 세우는 일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아브람 역시 흔한 풍속을 따라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마음 깊은 공허함이 찾아왔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자녀를 약속하셨으나 여전히 묵묵부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실망과 서운함이 아브람을 비롯한 모든 인류가 품은 두려움의 본질입니다.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단호하게 말씀 하십니다.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아닙니다. 그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그의 상속자입니다. 이런 눈부신 약속을 확실히 아브람의 영혼에 심으시고자 하나님은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을 가리키며 그의 자손이 별들처럼 셀 수 없이 많을 거라고 알려주십니다. 그 별들이 아브람의 마음에 하나씩 들어와 박혔습니다. 그의 내면에 영롱한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 빛깔이 하나씩 모여 ‘믿음’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위대한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본문 6절 함께 읽겠습니다.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이른바 ‘이신칭의’라는 성경 전체의 가장 위대한 복음을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특히나 바울이 로마서에 인용하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서게 됩니다. 주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 그리고 그런 인간의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보석같이 찬란하게 빛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그런데 동시에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첫 번째 대화입니다. 그전까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아브람이 묵묵히 경청할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아브람의 마음을 덮친 의심과 회의와 좌절이 깊고 깊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그는 낱낱이 토로 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한탄을 하나님은 억누르거나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들으시고 밖으로 이끄시어 별을 보여주시며 그에게 믿음을 안겨 주셨습니다.그렇다면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칭송을 받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의심을 통과한 신앙이라는 걸 발견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을 배제하고 현실을 무시하며 억지로 이 앙다물며 외치는 ‘아멘’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두렵고 아프고 괴롭우며 원망과 탄식이 계속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펼치시는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며 잠잠히 믿음을 품기를 바라십니다. 그런 우리의 믿음을 주님께서 의롭게 여기실 줄 믿습니다. 오늘 하루도 저마다의 하늘 위에 뜬 별을 바라보며 신앙의 여정을 이어가길 축원 합니다.기도신실하신 주 하나님아브라함의 영혼 깊은 두려움을 보시고, ‘두려워 말라’라고 위로하시는 음성에 귀 기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솔직한 실망과 원망을 담은 진솔한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 저희 걸음을 이끄시어 손수 믿음을 아로새겨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하루도 참되고 진실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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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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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4장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2025년 12월 15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14장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이틀 전 토요일에 읽은 창세기 13장은 재산이 늘어 종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자 결국 따로 살게 된 아브람과 그의 조카 롯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아브람은 롯을 아버지처럼 키운 삼촌이었지만 조카에게 선택권을 양보합니다. 그러자 롯은 화려하고 풍요로운 소알 땅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롯은 그곳에서 전쟁에 휘말리는 힘겨운 처지에 놓입니다.14장 전반부는 여러 임금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그 지역에서 강력한 힘을 가졌던 엘람왕 그돌라오멜을 배신한 왕들과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왕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전쟁에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왕도 참여하였습니다. 그 결과 소돔이 침략당해 롯이 사로잡히고 그의 재산도 뺏겼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람이 집에서 키우고 훈련시킨 군사 318명을 데리고 쫓아가 롯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과 재산을 모두 찾아온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이 모든 숨 가쁜 상황이 마칠 때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18~19절 함께 읽겠습니다.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살렘 왕 멜기세덱이 전투를 마치고 기진맥진해 돌아온 아브람을 맞이합니다. 떡과 포도주를 가져와 베풀며 쉬게 합니다. 여기서 멜기세덱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왕이면서 제사장입니다. 그러한 제사장의 권위로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사실 고대 역사에서 흔히 발견하는 장면입니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사회에서 왕이 제사장을 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러한 멜기세덱이 섬기는 신이 그 지역 사회의 다른 우상이 아니라, 아브람과 같은 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18절은 멜기세덱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19절에 멜기세덱의 축복문에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22절에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라고 화답합니다.이러한 대화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아브람을 부르고 이끄신 하나님, 온 우주를 지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만, 그의 시대에만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그보다 훨씬 전에 온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며 수많은 이들에게 앞서 당신의 뜻을 보이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살렘 왕 멜기세덱입니다. 이처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역사와 우주를 다스리십니다. 그러한 권능으로 전쟁에 휩싸인 아브람과 롯을 구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곧 우리의 하나님 이심을 고백합니다. 때로 전쟁과 같은 삶의 순간을 경험합니다. 거친 현실의 물결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그 막막하고 괴로운 순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축복합니다. 주님의 드넓은 구원과 강력한 팔이 오늘도 우리 삶에 동참하시며 구하시고 지키실 줄 믿습니다.기도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왕들의 이해타산과 권력다툼에 휘말려 고난을 겪은 롯을 아브람을 통해 구하신 하나님, 마찬가지로 저희 삶에 경험하는 여러 전쟁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구하실 줄 믿습니다. 저희의 이해와 경험을 초월하는 지극히 높으신 주님의 뜻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 믿음 따라 오늘 하루도 참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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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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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3장 “눈을 들어 둘러보아라”
2025년 12월 13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13장 “눈을 들어 둘러보아라” 찬송가 545, 542장풍요는 갈등의 씨앗입니다. 인류 역사이래 곳곳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성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절 말씀에 따르면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의 종들과 조카 롯의 종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아브람은 아버지를 잃은 조카 롯을 아들처럼 키우고 돌보았습니다. 그가 성인이 되자 재산도 독립시켰습니다. 하지만 점점 불어난 가축들로 말미암아 함께 목축지를 공유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그러자 아브람이 결단을 내렸습니다.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가 살고 싶은 땅에 살게 하였습니다. 아브람의 매우 성숙한 인격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는 삼촌으로서 지닌 지위, 그동안 조카에게 아낌없이 베푼 재물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며 롯을 윽박지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평화를 선택했습니다. 평화를 위해 직접 희생했습니다. 체면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롯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롯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10절 함께 읽겠습니다.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롯은 형식적인 사양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욕망이 강렬하게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물론 롯도 죄송하고 민망했을 겁니다. 자기를 거둬주고 지금까지 보살펴주신 인자한 삼촌에 대한 애틋하고 고마운 마음도 컸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기에는 소알 땅이 너무나 매력적으로 그의 영혼에 다가왔습니다. 여호와의 동산처럼 그리고 이집트처럼, 온 땅에 물이 넉넉한 그곳에서 농사도 목축도 모두 풍성한 결실을 안겨 줄 것만 같았습니다. 동시에 성경은 묘한 암시를 남깁니다. 소알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평지 성읍입니다. 머지않아 일어날 동일한 심판의 장소입니다. 롯이 보기에 화려하고 찬란했던 그들의 풍요는 결국 죄악으로 이어져 준엄한 징계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즉, 좋은게 좋은게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선망하며 우러러보는 시선이 얼마나 유한하고 어리석은 지를 깨닫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보같이 져주고 양보한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14~15절 함께 읽겠습니다.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아라. 무슨 의미일까요?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연연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아브람이 서 있는 곳은 약삭빠른 롯이 외면한 땅입니다. 부족함이 많은 곳입니다. 또한 바보같이 조카에게 이득을 빼앗긴, 뒤늦은 후회와 쓰라린 배신감이 흐르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시선을 돌려 온 사방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이는 모든 땅을 아브람과 그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롯의 어리석은 판단과 전혀 다른 차원의 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쟁취하고자 애씁니다. 어떻게든 속이고 빼앗고 이기려 듭니다. 그러한 경쟁과 대결에서 패했을 때 좌절에 빠지며 분노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삶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고 기꺼이 져주는 사람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선포하십니다.그 절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비참하게 나무에 달려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죽음은 헛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혼돈스런 삶에서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어떻게든 이기고 쟁취하고자 몸부림치는 대신 져주고 양보해야 합니다. 남 위에 올라 군림하고 힘을 휘두르는 대신 낮아지고 섬겨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모든 헌신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어 온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일꾼으로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기도놀랍고 풍성한 사랑의 주 하나님금세 심판받을 소알 땅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어리석고 무례하게 행동한 롯의 모습에서 저희의 연약함과 유한함을 발견합니다. 또한 순진무구하게 손해를 택한 아브라함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에 동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오늘도 새로운 하루를 선물로 주신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으로 다가가 기쁨으로 섬기고 나누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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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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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장 “부르심과 순종의 이면”
2025년 12월 12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12장 “부르심과 순종의 이면” 새로운 시작이 열립니다. 창세기는 물론이고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단락에 들어섰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으로 완성될 구원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아브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시며 그 결과 얻을 복도 함께 약속 하십니다. 1~3절 다시 한번 함께 읽겠습니다.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아브람이 떠나야 할 곳은 그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입니다. 사실 이 셋 모두 같은 공간과 공동체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는 지금껏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력한 응집력을 자랑하는 집성촌들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런 씨족 사회가 주는 든든한 기반을 등진다는 것은 굉장히 무모한 모함입니다. 하물며 수천년 전 아브람 시대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 지닌 의미는 실로 막강합니다. 삶의 견고한 울타리이자 버팀목입니다. 게다가 고고학 발굴 결과 아브람이 살았던 ‘우르’는 당대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버려두고 떠나기에는 너무나 화려하고 찬란한 공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에게 풍성한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은 ‘복’ 그 자체가 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복을 전하고 나누는 중심에 섭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지으시며 선언하신 복이 다시금 그를 통해 세상에 퍼져나가게 됩니다. 너무나 눈부시고 찬란한 축복입니다. 아브람은 그 말씀 그대로 ‘믿음의 조상’으로 수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시작 이전의 시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11장 27절 이후 내용은 아브람이 부름 받기 전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30절과 32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아브람 부부는 난임의 고통을 시달렸습니다. 이로 인한 갈등이 아브람 이야기 전반에 흐릅니다. 오늘날에도 난임은 너무나 무거운 아픔을 안겨줍니다. 고대인들에게는 한 층 더 엄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신으로부터 저주’입니다. 옛 사람들은 자녀가 없는 사람을 두고, 후손을 남길 가치가 없는 너무나 비참한 존재로 여겼습니다.바로 아브람을 덮친 고난입니다. 조심스런 추측이지만, 아브람이 기존의 사회질서와 종교와 가치관을 과감히 던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를 수 있었던 이유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즉, 철저히 무너지고 좌절했기에 세속의 흐름 그리고 인간의 탐욕과 전혀 다른 주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커다란 상실과 절망과 마주할 때.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깊고 깊은 암흑에 빠질 때. 더욱더 소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그 모든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르심에 잠잠히 귀 기울이게 하는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뜻을 따라 담대한 믿음의 여정을 이어가며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기도신실하신 주 하나님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견고한 삶의 터전을 과감히 떠나 여정을 내디딘 아브람의 믿음을 말씀 가운데 발견합니다. 그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신 주님의 눈부신 언약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르심과 순종의 이면에 아브람 마음 깊은 곳에 얼룩진 쓰라린 흉터를 발견합니다. 십자가의 어둠이 깊을수록 부활의 영광이 찬란하듯, 저희 삶에 찾아온 절망이 하나님의 희망으로 이어지는 은혜의 도구임을 고백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담대히 믿음으로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저희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선하심을 전하고 나누며 살아가게 하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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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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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1장 “내려오사 흩으시다”
2025년 12월 11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11장 “내려오사 흩으시다”우리 삶의 언어를 다채롭고 풍성하게 펼쳐가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하루도 충만하길 축복합니다.홍수 이후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다시금 사람들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연약하고 완악한 인간들은 또 다시 죄를 지었습니다. 급기야 악한 계획을 꾸미고 실행합니다. 바로 ‘바벨탑’입니다. 시날 평지에 모여 하늘에 닿는 높은 탑을 쌓아 올리려 하였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반응을 5절이 묘사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세기 저자의 재치와 유머가 드러나는, 역설적인 장면입니다. 사람들 딴에는 하늘에 닿는 것과 같은 굉장히 높은 탑을 쌓았습니다. 땅에서 보기에는 너무나 웅장하고 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에는 정반대입니다. 굳이 내려와야 보일 정도로 극히 미미하고 작기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장면에서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깨닫습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그럴듯하고 화려하게 쌓아올린 그 무엇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높은 학벌과 많은 재산과 찬란한 명예를 내세우고 자랑하며 각자의 바벨탑을 쌓으면 쌓을수록 허무하고 공허하게 됩니다.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외형적인 규모와 그럴듯한 성과를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어떤 저명 인사가 있고, 어떤 힘을 가졌는지를 과시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 형식의 또 다른 바벨론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겸손히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헛된 계획을 무너뜨리셨습니다. 6~8절 다함께 읽겠습니다.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하나님께서 진단하시는, 바벨탑 건설의 원인은 ‘언어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의 언어, 욕망의 언어가 그들을 지배했습니다.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차단 되었습니다. 권력자들의 추악한 야망이 백성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다르게 하셨습니다. 결국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계획은 좌절되어 그들은 흩어졌습니다.이를 통해 우리는 건강한 공동체의 성격을 확인합니다. 다양한 언어가 살아 숨쉬는 곳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 강림의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이 임하자 사람들은 각각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과 문화가 공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성도님들의 가정이, 우리 정배교회가, 그리고 대한민국이 그렇게 건강한 공동체 되길 축복합니다. 힘 있는 한두 사람이 탐욕과 권위의식에 눈이 멀어 내뱉는 빈곤한 단어가 아니라, 성령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다채로운 빛깔의 언어로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바벨의 길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기도만유의 주 하나님하나님이 내려다 보시기에는 지극히 미미하나, 자기들 눈에는 거창한 탑을 쌓아올린 사람들의 모습에서 저희의 어리석은 죄악을 발견합니다. 헛되고 헛된 욕망의 성과를 자랑하기 보다는 잠잠히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저희가 되길 소망합니다.저희 가정과 정배교회가 대한민국 가운데,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다채롭고 아름다운 언어로 가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두 사람의 오만과 독선이 아닌, 힘없고 소외된 이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소망이 자유롭게 오가는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고 전하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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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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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9장 “덮어주는 사랑”
2025년 12월 10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9장 “덮어주는 사랑”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오늘 하루도 풍성히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우리는 본문에서 철저히 망가진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바로 노아입니다. 그는 지금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에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 칭찬받던 모습과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노아가 왜 이렇게 무너졌을까요? 그런 그를 과연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까요?지금까지 읽은 창세기 이야기 맥락에서 현재, 노아의 상황을 헤아려 보시길 바랍니다. 한마디로 그는 재난의 한복판을 지나온 사람입니다. 사십일 동안 홍수가 내렸습니다. 땅의 모든 생물이 물에 잠겼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방주에 태운 동물들만 살아남았습니다. 노아의 오랜 친구들, 친척들, 친밀하게 지냈던 마을 이웃들이 모두 숨을 거두었습니다. 퍼부어대는 빗소리 사이로 날카로운 비명이 방주를 뚫고 들려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지는 잔인한 절규 속에 노아는 몸서리치며 귀를 막았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끔찍한 침묵이 이어집니다.그렇게 노아는 살아남았습니다. 가족의 목숨은 무사히 건졌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비극을 경험한 사람의 삶은 그전과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 때 그 참담한 순간이 불연 듯 떠오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주들의 귀여운 재롱이 주는 행복도 그 때 뿐입니다. 망가지는 게 당연합니다.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그는 포도주에 취하고 말았습니다. 알콜 때문인지,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은 상처 때문인지, 정체를 알기 힘든 열기에 옷도 하나 둘 벗었습니다. 벌거벗은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술 주정을 하는 노인. 누가 봐도 볼썽 사납습니다. 그가 설령 과거에 놀라운 일을 이룬 의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순간, 추한 술주정뱅이에 불과합니다.그런데 성경은 그런 노아를 대하는, 명백히 대조적인 두 가지 태도를 보여줍니다. 술 취한 노아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둘째 아들 함입니다. 22절을 보면 함은 장막에서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점잖게 완곡해서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하체’에 해당하는 원문은 나체를 가리킵니다. 노아의 적나라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는 위신과 체면을 옷과 함께 모두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함은 그런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곧바로 장막에서 나와 형과 동생에게 달려갑니다. 그의 표정에는 이미 비웃음을 가득합니다. 벌써 입가가 씰룩거리고 있습니다. 형제들에게 도착하자마자 노아의 추태를 폭로합니다. 지금 아버지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인지를 희희덕거리며 떠들어댑니다. 그 말을 듣던 첫째 셈과 막내 야벳의 표정은 금세 굳어졌습니다. 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의 장막을 향해 달려, 그와 전혀 다르게 처신합니다. 2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함과 달리 셈과 야벳은 가장 먼저 옷을 챙겼습니다. 수치스러운 아버지의 상태를 덮어줄 도구입니다. 그 옷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쳐 들어갔습니다. 노아는 이미 술에 취해 인사불성입니다. 그럼에도 두 아들은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보지 않고 덮었습니다. 이 사실을 23절 후반부에서 강조합니다.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굳이 다시 언급합니다. 셈과 야벳이 함의 경박한 행동과 얼마나 달랐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결과 함은 아버지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습니다. 명확히 다른 태도에 따른 확연히 다른 결과입니다. 사실,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한순간의 실수에 대한 처벌치고는 너무나 가혹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은 재난으로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을 대하는 인류의 두 가지 태도를 고발합니다. 시련을 겪고 연약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돌봐주는 것은 상식입니다. 너무나 명징한 양심의 방향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세상사는 늘 상식과 양심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정반대의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아무런 죄 없이 끔찍한 폭력을 겪었음에도 공감을 받지 못할 때가 합니다. 심지어 억울한 모함을 겪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잔인한 조롱과 혐오와 공격의 대상이 될 때도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이념을 초월해 끝없이 반복해온 비극입니다. 그 가장 먼 과거에, 노아가 초라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고 그런 그를 함은 비웃었습니다.반면에 그런 노아와 같은 사람들을 품어준, 셈 그리고 야벳과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함부로 상처를 헤집지 않습니다. 무리하게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경우 없이 차가운 도덕을 들이밀며 완벽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노아가 겪어온 고통 어린 순간들을 말없이 보듬어 줍니다. 수치를 덮어줍니다. 굴욕을 씻어줍니다.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셈과 야벳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두 사람을 본받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함의 어리석음을 물리치라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명심해야 합니다. 늘 셈과 야벳처럼 행동하거나, 항상 함처럼 처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연약한 죄인인 우리는 모두 양 쪽을 수없이 오갑니다.그러므로 잠잠히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과연 다른 사람의 비극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그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가 겪어왔던 절망적인 홍수를 들여다 봐야 합니다. 급기야 그렇게 망가질 수 밖에 없었던 내면 깊은 아픔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아파하고 허물을 덮어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전히 이 시대의 노아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품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본받아 오늘 하루도 다른 이들의 허물을 덮어 주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기도위대한 용서와 속죄의 주 하나님.깊은 상심과 좌절로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노아를 향한 아들들의 전혀 다른 반응을 말씀을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조롱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함에게서 저희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뒷걸음쳐 아버지에게 다가가 몸을 덮어주는 셈과 야벳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확인합니다. 저희 역시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의 연약함을 용서하고 덮어주는 성숙한 인격과 신앙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때때로 삶에 지쳐 무너진 저희의 전 존재를 품어 안으시는 하나님의 넓고 크신 사랑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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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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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8장 “기억과 예배”
2025년 12월 9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8장 “기억과 예배”우리를 항상 기억하시고 품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성도님들과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온 땅을 덮는 홍수가 그쳤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행하시는 매우 중요한 동사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바로 ‘기억’입니다. 1절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하나님은 온 땅에 가득한 물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물을 마르게 하셨습니다. 얼핏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저 분노하고 심판만 하는 존재라면 죄를 지은 사람들을 물로 쓸어버린 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겁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주님의 성품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방주 안에서 무려 1년을 보낸 당신의 의인 노아와 그 가족들, 그리고 함께 있는 동물들을 기억하셨습니다.우리말 번역은 한글 어순을 살려서 ‘기억하사’가 1절 중간에 나옵니다. 그러나 구약 원문을 그렇지 않습니다. 1절 초반부를 직역하면 ‘그리고 기억하다.’입니다. 바로 앞절인 7장 24절은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온 땅에 물이 넘치자 마자 주님은 곧바로 먼저 기억하셨습니다. 방주에 태운 피조물들을 즉시 기억하셨습니다.이것은 노아 홍수의 목적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중요한 관심사를 보여줍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분노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복음 중의 복음인 요한복음 3장 16절을 잘 아실겁니다. 그런데 그 못지 않게 다음절인 17절을 주목해야 합니다.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하나님은 분명 세상을 심판하시지만 심판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심판은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통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구원과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이 이루시는 구원에 참여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기억하셨습니다. 방주 안에서 기약 없이 물 위에 떠도는 막막한 심정을 헤아리셨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는 그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정하신 때에 마침내 땅이 드러났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드디어 방주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때 노아가 행한 일을 주목해야 합니다. 20절 함께 읽겠습니다.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사, 즉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기억 안에 들어온 사람들, 하나님의 헤아림을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마땅한 반응입니다. 동시에 또 다른 기억의 행동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한 행동이 바로 예배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곧 기억의 순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가족들과 같습니다. 인생 여정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릅니다. 때때로 노아가 맡았던 습한 바다 내음과 노아가 들었던 동물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불안과 공포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합니다. 우리의 모든 처지와 형편을 헤아리시고 마침내 방주를 멈추고 나오게 하십니다.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각자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품고 곱씹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모여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동시에 주일 예배를 더욱 소중히 드리고, 또한 일상 가운데 예배의 삶을 살아가길 축복합니다.기도크고 넓으신 사랑의 주 하나님방주 안에서 1년간 정처 없이 떠돈 노아의 고난과 어려움을 기억하신 주님. 마찬가지로 저희 삶의 여러 아픔과 고난 또한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간절히 구하는 기도에 귀 기울이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열어보이실 구원을 기대하며 날마다 믿음으로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기억하는 주일 예배와 일상의 예배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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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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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7장 “방주의 문을 닫으시는 하나님”
2025년 12월 8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7장 “방주의 문을 닫으시는 하나님”마침내 심판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번 1절 읽겠습니다.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1절 말씀에는 노아를 향한 주님의 명령과 평가가 담겨있습니다. 그의 온 가족이 이제 방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세대에서 그의 의로움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저께 읽은 6장에 이미 노아가 ‘의롭다’라는 소개를 발견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에게 언급하십니다. 성경 속 누구에게서도 발견하기 힘든 극한의 찬사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아가 완전무결한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그의 한계 또한 명확히 보여줍니다. 관련하여 16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16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모든 생명의 암, 수가 방주에 탔습니다. 이제 홍수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방주가 배로 기능하기 위해 우선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문을 닫아야 합니다. 하지만 방주는 수많은 동물을 태울 만큼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배입니다. 그 배의 문 또한 분명 매우 컸을 겁니다. 사람 손으로 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오늘날과 같은 자동기술은 당연히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노아를 들여보내시고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노아는 비록 의인이나 철저히 무력한 인간이었음을 성경이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함을 보시고 심판을 결정하시고 그 가운데 노아를 택하여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주도하고 계심을 창세기는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방주’의 특성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저께 6장을 설교하며 언급했습니다. 방주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테바’는 ‘상자’를 의미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아기 모세를 넣은 ‘갈대 상자’ 또한 ‘테바’입니다. 한마디로 노아의 방주는 거대한 상자입니다.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와 전혀 다릅니다. 엄밀히 말해 배 아닌 배입니다. 방향키를 조절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속도를 더하거나 늦출 수도 없습니다. 그저 물결을 따라 흘러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흐름에 맡길 뿐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임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있으라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최선을 다해 순종하며 하루하루 맡겨진 소임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동시에 인생 전체의 진로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내 뜻, 내 욕심, 내 타이밍을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방주로 이끄신 하나님께서 몸소 안전하게 배의 문을 닫으십니다. 신실하신 은혜 가운데 가장 합당한 때에 합당한 곳으로 물결을 일으켜 주십니다.이처럼 선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오늘 하루도 마음 깊이 품으며 신뢰와 용기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복합니다. 기도전능하신 주 하나님저희의 작은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시며 구원하신 놀라운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동시에 방주의 문을 닫으시고 배를 물 위에 띄우시는 주님의 손길을 의지합니다. 인생의 항해를 하나님께서 이끄심을 고백합니다. 저희의 어리석은 욕심과 감정을 고집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담대한 순종으로 방주에 올라 물결에 몸을 맡기는 믿음을 주시옵소서.오늘 하루 마주해야 할 이들에게 복음의 향기를 전하며, 오늘 감당할 일들에 지혜의 빛깔을 더하길 소망합니다. 저마다 근심하며 부르짖는 신음에 응답하시고, 가정마다 평강을 더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참고문헌: 김세권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서울: 크리쿰북스, 2017) 69~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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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