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제목 | 날짜 |
|---|---|
|
창세기 15장 “별처럼 새긴 믿음”
2025년 12월 16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15장 “별처럼 새긴 믿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 뿐만이 아니라 아브람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를 알려 주십니다. 바로 하나님게서 그의 방패이자 상급, 즉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들어도 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생깁니다. 현재 아브람은 두려운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제 읽은 14장은 그가 거둔 놀라운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 결과 많은 전리품을 챙겼고 살렘왕 멜기세덱의 축복까지 받았습니다.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향해 ‘두려워 하지말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적어도 겉으도 드러난 조건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흔히 두려워하는 요소들, 이를테면 건강이나 재산에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무얼 두려워 했을까요? 아브람 스스로 답 합니다. 2~3절 함께 읽겠습니다.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아브람은 곧바로 자기 후계 문제를 두고 이야기 합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예전에 말씀 드린대로 고대에는 신에게 받은 저주로 여겼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시대 자녀가 없는 집은 입양하여 상속자를 세우는 일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아브람 역시 흔한 풍속을 따라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마음 깊은 공허함이 찾아왔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자녀를 약속하셨으나 여전히 묵묵부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실망과 서운함이 아브람을 비롯한 모든 인류가 품은 두려움의 본질입니다.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단호하게 말씀 하십니다.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아닙니다. 그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그의 상속자입니다. 이런 눈부신 약속을 확실히 아브람의 영혼에 심으시고자 하나님은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을 가리키며 그의 자손이 별들처럼 셀 수 없이 많을 거라고 알려주십니다. 그 별들이 아브람의 마음에 하나씩 들어와 박혔습니다. 그의 내면에 영롱한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 빛깔이 하나씩 모여 ‘믿음’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위대한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본문 6절 함께 읽겠습니다.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이른바 ‘이신칭의’라는 성경 전체의 가장 위대한 복음을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특히나 바울이 로마서에 인용하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서게 됩니다. 주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 그리고 그런 인간의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보석같이 찬란하게 빛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그런데 동시에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첫 번째 대화입니다. 그전까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아브람이 묵묵히 경청할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아브람의 마음을 덮친 의심과 회의와 좌절이 깊고 깊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그는 낱낱이 토로 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한탄을 하나님은 억누르거나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들으시고 밖으로 이끄시어 별을 보여주시며 그에게 믿음을 안겨 주셨습니다.그렇다면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칭송을 받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의심을 통과한 신앙이라는 걸 발견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을 배제하고 현실을 무시하며 억지로 이 앙다물며 외치는 ‘아멘’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두렵고 아프고 괴롭우며 원망과 탄식이 계속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펼치시는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며 잠잠히 믿음을 품기를 바라십니다. 그런 우리의 믿음을 주님께서 의롭게 여기실 줄 믿습니다. 오늘 하루도 저마다의 하늘 위에 뜬 별을 바라보며 신앙의 여정을 이어가길 축원 합니다.기도신실하신 주 하나님아브라함의 영혼 깊은 두려움을 보시고, ‘두려워 말라’라고 위로하시는 음성에 귀 기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솔직한 실망과 원망을 담은 진솔한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 저희 걸음을 이끄시어 손수 믿음을 아로새겨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하루도 참되고 진실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2025-12-16 |
|
창세기 14장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2025년 12월 15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14장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이틀 전 토요일에 읽은 창세기 13장은 재산이 늘어 종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자 결국 따로 살게 된 아브람과 그의 조카 롯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아브람은 롯을 아버지처럼 키운 삼촌이었지만 조카에게 선택권을 양보합니다. 그러자 롯은 화려하고 풍요로운 소알 땅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롯은 그곳에서 전쟁에 휘말리는 힘겨운 처지에 놓입니다.14장 전반부는 여러 임금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그 지역에서 강력한 힘을 가졌던 엘람왕 그돌라오멜을 배신한 왕들과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왕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전쟁에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왕도 참여하였습니다. 그 결과 소돔이 침략당해 롯이 사로잡히고 그의 재산도 뺏겼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람이 집에서 키우고 훈련시킨 군사 318명을 데리고 쫓아가 롯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과 재산을 모두 찾아온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이 모든 숨 가쁜 상황이 마칠 때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18~19절 함께 읽겠습니다.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살렘 왕 멜기세덱이 전투를 마치고 기진맥진해 돌아온 아브람을 맞이합니다. 떡과 포도주를 가져와 베풀며 쉬게 합니다. 여기서 멜기세덱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왕이면서 제사장입니다. 그러한 제사장의 권위로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사실 고대 역사에서 흔히 발견하는 장면입니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사회에서 왕이 제사장을 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러한 멜기세덱이 섬기는 신이 그 지역 사회의 다른 우상이 아니라, 아브람과 같은 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18절은 멜기세덱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19절에 멜기세덱의 축복문에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22절에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라고 화답합니다.이러한 대화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아브람을 부르고 이끄신 하나님, 온 우주를 지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만, 그의 시대에만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그보다 훨씬 전에 온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며 수많은 이들에게 앞서 당신의 뜻을 보이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살렘 왕 멜기세덱입니다. 이처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역사와 우주를 다스리십니다. 그러한 권능으로 전쟁에 휩싸인 아브람과 롯을 구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곧 우리의 하나님 이심을 고백합니다. 때로 전쟁과 같은 삶의 순간을 경험합니다. 거친 현실의 물결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그 막막하고 괴로운 순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축복합니다. 주님의 드넓은 구원과 강력한 팔이 오늘도 우리 삶에 동참하시며 구하시고 지키실 줄 믿습니다.기도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왕들의 이해타산과 권력다툼에 휘말려 고난을 겪은 롯을 아브람을 통해 구하신 하나님, 마찬가지로 저희 삶에 경험하는 여러 전쟁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구하실 줄 믿습니다. 저희의 이해와 경험을 초월하는 지극히 높으신 주님의 뜻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 믿음 따라 오늘 하루도 참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2025-12-15 |
|
창세기 13장 “눈을 들어 둘러보아라”
2025년 12월 13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13장 “눈을 들어 둘러보아라” 찬송가 545, 542장풍요는 갈등의 씨앗입니다. 인류 역사이래 곳곳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성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절 말씀에 따르면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의 종들과 조카 롯의 종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아브람은 아버지를 잃은 조카 롯을 아들처럼 키우고 돌보았습니다. 그가 성인이 되자 재산도 독립시켰습니다. 하지만 점점 불어난 가축들로 말미암아 함께 목축지를 공유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그러자 아브람이 결단을 내렸습니다.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가 살고 싶은 땅에 살게 하였습니다. 아브람의 매우 성숙한 인격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는 삼촌으로서 지닌 지위, 그동안 조카에게 아낌없이 베푼 재물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며 롯을 윽박지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평화를 선택했습니다. 평화를 위해 직접 희생했습니다. 체면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롯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롯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10절 함께 읽겠습니다.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롯은 형식적인 사양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욕망이 강렬하게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물론 롯도 죄송하고 민망했을 겁니다. 자기를 거둬주고 지금까지 보살펴주신 인자한 삼촌에 대한 애틋하고 고마운 마음도 컸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기에는 소알 땅이 너무나 매력적으로 그의 영혼에 다가왔습니다. 여호와의 동산처럼 그리고 이집트처럼, 온 땅에 물이 넉넉한 그곳에서 농사도 목축도 모두 풍성한 결실을 안겨 줄 것만 같았습니다. 동시에 성경은 묘한 암시를 남깁니다. 소알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평지 성읍입니다. 머지않아 일어날 동일한 심판의 장소입니다. 롯이 보기에 화려하고 찬란했던 그들의 풍요는 결국 죄악으로 이어져 준엄한 징계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즉, 좋은게 좋은게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선망하며 우러러보는 시선이 얼마나 유한하고 어리석은 지를 깨닫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보같이 져주고 양보한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14~15절 함께 읽겠습니다.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아라. 무슨 의미일까요?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연연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아브람이 서 있는 곳은 약삭빠른 롯이 외면한 땅입니다. 부족함이 많은 곳입니다. 또한 바보같이 조카에게 이득을 빼앗긴, 뒤늦은 후회와 쓰라린 배신감이 흐르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시선을 돌려 온 사방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이는 모든 땅을 아브람과 그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롯의 어리석은 판단과 전혀 다른 차원의 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쟁취하고자 애씁니다. 어떻게든 속이고 빼앗고 이기려 듭니다. 그러한 경쟁과 대결에서 패했을 때 좌절에 빠지며 분노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삶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고 기꺼이 져주는 사람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선포하십니다.그 절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비참하게 나무에 달려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죽음은 헛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혼돈스런 삶에서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어떻게든 이기고 쟁취하고자 몸부림치는 대신 져주고 양보해야 합니다. 남 위에 올라 군림하고 힘을 휘두르는 대신 낮아지고 섬겨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모든 헌신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어 온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일꾼으로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기도놀랍고 풍성한 사랑의 주 하나님금세 심판받을 소알 땅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어리석고 무례하게 행동한 롯의 모습에서 저희의 연약함과 유한함을 발견합니다. 또한 순진무구하게 손해를 택한 아브라함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에 동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오늘도 새로운 하루를 선물로 주신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으로 다가가 기쁨으로 섬기고 나누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2025-12-13 |
|
창세기 12장 “부르심과 순종의 이면”
2025년 12월 12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12장 “부르심과 순종의 이면” 새로운 시작이 열립니다. 창세기는 물론이고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단락에 들어섰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으로 완성될 구원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아브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시며 그 결과 얻을 복도 함께 약속 하십니다. 1~3절 다시 한번 함께 읽겠습니다.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아브람이 떠나야 할 곳은 그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입니다. 사실 이 셋 모두 같은 공간과 공동체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는 지금껏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력한 응집력을 자랑하는 집성촌들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런 씨족 사회가 주는 든든한 기반을 등진다는 것은 굉장히 무모한 모함입니다. 하물며 수천년 전 아브람 시대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 지닌 의미는 실로 막강합니다. 삶의 견고한 울타리이자 버팀목입니다. 게다가 고고학 발굴 결과 아브람이 살았던 ‘우르’는 당대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버려두고 떠나기에는 너무나 화려하고 찬란한 공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에게 풍성한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은 ‘복’ 그 자체가 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복을 전하고 나누는 중심에 섭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지으시며 선언하신 복이 다시금 그를 통해 세상에 퍼져나가게 됩니다. 너무나 눈부시고 찬란한 축복입니다. 아브람은 그 말씀 그대로 ‘믿음의 조상’으로 수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시작 이전의 시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11장 27절 이후 내용은 아브람이 부름 받기 전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30절과 32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아브람 부부는 난임의 고통을 시달렸습니다. 이로 인한 갈등이 아브람 이야기 전반에 흐릅니다. 오늘날에도 난임은 너무나 무거운 아픔을 안겨줍니다. 고대인들에게는 한 층 더 엄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신으로부터 저주’입니다. 옛 사람들은 자녀가 없는 사람을 두고, 후손을 남길 가치가 없는 너무나 비참한 존재로 여겼습니다.바로 아브람을 덮친 고난입니다. 조심스런 추측이지만, 아브람이 기존의 사회질서와 종교와 가치관을 과감히 던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를 수 있었던 이유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즉, 철저히 무너지고 좌절했기에 세속의 흐름 그리고 인간의 탐욕과 전혀 다른 주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커다란 상실과 절망과 마주할 때.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깊고 깊은 암흑에 빠질 때. 더욱더 소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그 모든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르심에 잠잠히 귀 기울이게 하는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뜻을 따라 담대한 믿음의 여정을 이어가며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기도신실하신 주 하나님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견고한 삶의 터전을 과감히 떠나 여정을 내디딘 아브람의 믿음을 말씀 가운데 발견합니다. 그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신 주님의 눈부신 언약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르심과 순종의 이면에 아브람 마음 깊은 곳에 얼룩진 쓰라린 흉터를 발견합니다. 십자가의 어둠이 깊을수록 부활의 영광이 찬란하듯, 저희 삶에 찾아온 절망이 하나님의 희망으로 이어지는 은혜의 도구임을 고백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담대히 믿음으로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저희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선하심을 전하고 나누며 살아가게 하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2025-12-12 |
|
창세기 11장 “내려오사 흩으시다”
2025년 12월 11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11장 “내려오사 흩으시다”우리 삶의 언어를 다채롭고 풍성하게 펼쳐가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하루도 충만하길 축복합니다.홍수 이후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다시금 사람들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연약하고 완악한 인간들은 또 다시 죄를 지었습니다. 급기야 악한 계획을 꾸미고 실행합니다. 바로 ‘바벨탑’입니다. 시날 평지에 모여 하늘에 닿는 높은 탑을 쌓아 올리려 하였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반응을 5절이 묘사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세기 저자의 재치와 유머가 드러나는, 역설적인 장면입니다. 사람들 딴에는 하늘에 닿는 것과 같은 굉장히 높은 탑을 쌓았습니다. 땅에서 보기에는 너무나 웅장하고 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에는 정반대입니다. 굳이 내려와야 보일 정도로 극히 미미하고 작기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장면에서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깨닫습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그럴듯하고 화려하게 쌓아올린 그 무엇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높은 학벌과 많은 재산과 찬란한 명예를 내세우고 자랑하며 각자의 바벨탑을 쌓으면 쌓을수록 허무하고 공허하게 됩니다.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외형적인 규모와 그럴듯한 성과를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어떤 저명 인사가 있고, 어떤 힘을 가졌는지를 과시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 형식의 또 다른 바벨론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겸손히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헛된 계획을 무너뜨리셨습니다. 6~8절 다함께 읽겠습니다.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하나님께서 진단하시는, 바벨탑 건설의 원인은 ‘언어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의 언어, 욕망의 언어가 그들을 지배했습니다.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차단 되었습니다. 권력자들의 추악한 야망이 백성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다르게 하셨습니다. 결국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계획은 좌절되어 그들은 흩어졌습니다.이를 통해 우리는 건강한 공동체의 성격을 확인합니다. 다양한 언어가 살아 숨쉬는 곳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 강림의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이 임하자 사람들은 각각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과 문화가 공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성도님들의 가정이, 우리 정배교회가, 그리고 대한민국이 그렇게 건강한 공동체 되길 축복합니다. 힘 있는 한두 사람이 탐욕과 권위의식에 눈이 멀어 내뱉는 빈곤한 단어가 아니라, 성령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다채로운 빛깔의 언어로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바벨의 길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기도만유의 주 하나님하나님이 내려다 보시기에는 지극히 미미하나, 자기들 눈에는 거창한 탑을 쌓아올린 사람들의 모습에서 저희의 어리석은 죄악을 발견합니다. 헛되고 헛된 욕망의 성과를 자랑하기 보다는 잠잠히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저희가 되길 소망합니다.저희 가정과 정배교회가 대한민국 가운데,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다채롭고 아름다운 언어로 가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두 사람의 오만과 독선이 아닌, 힘없고 소외된 이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소망이 자유롭게 오가는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고 전하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2025-12-11 |
|
창세기 9장 “덮어주는 사랑”
2025년 12월 10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9장 “덮어주는 사랑”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오늘 하루도 풍성히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우리는 본문에서 철저히 망가진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바로 노아입니다. 그는 지금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에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 칭찬받던 모습과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노아가 왜 이렇게 무너졌을까요? 그런 그를 과연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까요?지금까지 읽은 창세기 이야기 맥락에서 현재, 노아의 상황을 헤아려 보시길 바랍니다. 한마디로 그는 재난의 한복판을 지나온 사람입니다. 사십일 동안 홍수가 내렸습니다. 땅의 모든 생물이 물에 잠겼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방주에 태운 동물들만 살아남았습니다. 노아의 오랜 친구들, 친척들, 친밀하게 지냈던 마을 이웃들이 모두 숨을 거두었습니다. 퍼부어대는 빗소리 사이로 날카로운 비명이 방주를 뚫고 들려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지는 잔인한 절규 속에 노아는 몸서리치며 귀를 막았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끔찍한 침묵이 이어집니다.그렇게 노아는 살아남았습니다. 가족의 목숨은 무사히 건졌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비극을 경험한 사람의 삶은 그전과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 때 그 참담한 순간이 불연 듯 떠오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주들의 귀여운 재롱이 주는 행복도 그 때 뿐입니다. 망가지는 게 당연합니다.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그는 포도주에 취하고 말았습니다. 알콜 때문인지,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은 상처 때문인지, 정체를 알기 힘든 열기에 옷도 하나 둘 벗었습니다. 벌거벗은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술 주정을 하는 노인. 누가 봐도 볼썽 사납습니다. 그가 설령 과거에 놀라운 일을 이룬 의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순간, 추한 술주정뱅이에 불과합니다.그런데 성경은 그런 노아를 대하는, 명백히 대조적인 두 가지 태도를 보여줍니다. 술 취한 노아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둘째 아들 함입니다. 22절을 보면 함은 장막에서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점잖게 완곡해서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하체’에 해당하는 원문은 나체를 가리킵니다. 노아의 적나라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는 위신과 체면을 옷과 함께 모두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함은 그런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곧바로 장막에서 나와 형과 동생에게 달려갑니다. 그의 표정에는 이미 비웃음을 가득합니다. 벌써 입가가 씰룩거리고 있습니다. 형제들에게 도착하자마자 노아의 추태를 폭로합니다. 지금 아버지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인지를 희희덕거리며 떠들어댑니다. 그 말을 듣던 첫째 셈과 막내 야벳의 표정은 금세 굳어졌습니다. 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의 장막을 향해 달려, 그와 전혀 다르게 처신합니다. 2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함과 달리 셈과 야벳은 가장 먼저 옷을 챙겼습니다. 수치스러운 아버지의 상태를 덮어줄 도구입니다. 그 옷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쳐 들어갔습니다. 노아는 이미 술에 취해 인사불성입니다. 그럼에도 두 아들은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보지 않고 덮었습니다. 이 사실을 23절 후반부에서 강조합니다.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굳이 다시 언급합니다. 셈과 야벳이 함의 경박한 행동과 얼마나 달랐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결과 함은 아버지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습니다. 명확히 다른 태도에 따른 확연히 다른 결과입니다. 사실,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한순간의 실수에 대한 처벌치고는 너무나 가혹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은 재난으로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을 대하는 인류의 두 가지 태도를 고발합니다. 시련을 겪고 연약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돌봐주는 것은 상식입니다. 너무나 명징한 양심의 방향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세상사는 늘 상식과 양심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정반대의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아무런 죄 없이 끔찍한 폭력을 겪었음에도 공감을 받지 못할 때가 합니다. 심지어 억울한 모함을 겪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잔인한 조롱과 혐오와 공격의 대상이 될 때도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이념을 초월해 끝없이 반복해온 비극입니다. 그 가장 먼 과거에, 노아가 초라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고 그런 그를 함은 비웃었습니다.반면에 그런 노아와 같은 사람들을 품어준, 셈 그리고 야벳과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함부로 상처를 헤집지 않습니다. 무리하게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경우 없이 차가운 도덕을 들이밀며 완벽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노아가 겪어온 고통 어린 순간들을 말없이 보듬어 줍니다. 수치를 덮어줍니다. 굴욕을 씻어줍니다.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셈과 야벳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두 사람을 본받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함의 어리석음을 물리치라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명심해야 합니다. 늘 셈과 야벳처럼 행동하거나, 항상 함처럼 처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연약한 죄인인 우리는 모두 양 쪽을 수없이 오갑니다.그러므로 잠잠히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과연 다른 사람의 비극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그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가 겪어왔던 절망적인 홍수를 들여다 봐야 합니다. 급기야 그렇게 망가질 수 밖에 없었던 내면 깊은 아픔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아파하고 허물을 덮어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전히 이 시대의 노아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품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본받아 오늘 하루도 다른 이들의 허물을 덮어 주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기도위대한 용서와 속죄의 주 하나님.깊은 상심과 좌절로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노아를 향한 아들들의 전혀 다른 반응을 말씀을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조롱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함에게서 저희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뒷걸음쳐 아버지에게 다가가 몸을 덮어주는 셈과 야벳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확인합니다. 저희 역시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의 연약함을 용서하고 덮어주는 성숙한 인격과 신앙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때때로 삶에 지쳐 무너진 저희의 전 존재를 품어 안으시는 하나님의 넓고 크신 사랑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2025-12-10 |
|
창세기 8장 “기억과 예배”
2025년 12월 9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8장 “기억과 예배”우리를 항상 기억하시고 품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성도님들과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온 땅을 덮는 홍수가 그쳤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행하시는 매우 중요한 동사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바로 ‘기억’입니다. 1절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하나님은 온 땅에 가득한 물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물을 마르게 하셨습니다. 얼핏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저 분노하고 심판만 하는 존재라면 죄를 지은 사람들을 물로 쓸어버린 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겁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주님의 성품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방주 안에서 무려 1년을 보낸 당신의 의인 노아와 그 가족들, 그리고 함께 있는 동물들을 기억하셨습니다.우리말 번역은 한글 어순을 살려서 ‘기억하사’가 1절 중간에 나옵니다. 그러나 구약 원문을 그렇지 않습니다. 1절 초반부를 직역하면 ‘그리고 기억하다.’입니다. 바로 앞절인 7장 24절은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온 땅에 물이 넘치자 마자 주님은 곧바로 먼저 기억하셨습니다. 방주에 태운 피조물들을 즉시 기억하셨습니다.이것은 노아 홍수의 목적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중요한 관심사를 보여줍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분노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복음 중의 복음인 요한복음 3장 16절을 잘 아실겁니다. 그런데 그 못지 않게 다음절인 17절을 주목해야 합니다.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하나님은 분명 세상을 심판하시지만 심판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심판은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통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구원과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이 이루시는 구원에 참여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기억하셨습니다. 방주 안에서 기약 없이 물 위에 떠도는 막막한 심정을 헤아리셨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는 그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정하신 때에 마침내 땅이 드러났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드디어 방주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때 노아가 행한 일을 주목해야 합니다. 20절 함께 읽겠습니다.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사, 즉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기억 안에 들어온 사람들, 하나님의 헤아림을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마땅한 반응입니다. 동시에 또 다른 기억의 행동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한 행동이 바로 예배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곧 기억의 순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가족들과 같습니다. 인생 여정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릅니다. 때때로 노아가 맡았던 습한 바다 내음과 노아가 들었던 동물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불안과 공포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합니다. 우리의 모든 처지와 형편을 헤아리시고 마침내 방주를 멈추고 나오게 하십니다.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각자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품고 곱씹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모여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동시에 주일 예배를 더욱 소중히 드리고, 또한 일상 가운데 예배의 삶을 살아가길 축복합니다.기도크고 넓으신 사랑의 주 하나님방주 안에서 1년간 정처 없이 떠돈 노아의 고난과 어려움을 기억하신 주님. 마찬가지로 저희 삶의 여러 아픔과 고난 또한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간절히 구하는 기도에 귀 기울이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열어보이실 구원을 기대하며 날마다 믿음으로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기억하는 주일 예배와 일상의 예배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2025-12-09 |
|
창세기 7장 “방주의 문을 닫으시는 하나님”
2025년 12월 8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7장 “방주의 문을 닫으시는 하나님”마침내 심판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번 1절 읽겠습니다.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1절 말씀에는 노아를 향한 주님의 명령과 평가가 담겨있습니다. 그의 온 가족이 이제 방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세대에서 그의 의로움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저께 읽은 6장에 이미 노아가 ‘의롭다’라는 소개를 발견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에게 언급하십니다. 성경 속 누구에게서도 발견하기 힘든 극한의 찬사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아가 완전무결한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그의 한계 또한 명확히 보여줍니다. 관련하여 16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16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모든 생명의 암, 수가 방주에 탔습니다. 이제 홍수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방주가 배로 기능하기 위해 우선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문을 닫아야 합니다. 하지만 방주는 수많은 동물을 태울 만큼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배입니다. 그 배의 문 또한 분명 매우 컸을 겁니다. 사람 손으로 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오늘날과 같은 자동기술은 당연히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노아를 들여보내시고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노아는 비록 의인이나 철저히 무력한 인간이었음을 성경이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함을 보시고 심판을 결정하시고 그 가운데 노아를 택하여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주도하고 계심을 창세기는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방주’의 특성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저께 6장을 설교하며 언급했습니다. 방주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테바’는 ‘상자’를 의미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아기 모세를 넣은 ‘갈대 상자’ 또한 ‘테바’입니다. 한마디로 노아의 방주는 거대한 상자입니다.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와 전혀 다릅니다. 엄밀히 말해 배 아닌 배입니다. 방향키를 조절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속도를 더하거나 늦출 수도 없습니다. 그저 물결을 따라 흘러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흐름에 맡길 뿐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임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있으라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최선을 다해 순종하며 하루하루 맡겨진 소임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동시에 인생 전체의 진로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내 뜻, 내 욕심, 내 타이밍을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방주로 이끄신 하나님께서 몸소 안전하게 배의 문을 닫으십니다. 신실하신 은혜 가운데 가장 합당한 때에 합당한 곳으로 물결을 일으켜 주십니다.이처럼 선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오늘 하루도 마음 깊이 품으며 신뢰와 용기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복합니다. 기도전능하신 주 하나님저희의 작은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시며 구원하신 놀라운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동시에 방주의 문을 닫으시고 배를 물 위에 띄우시는 주님의 손길을 의지합니다. 인생의 항해를 하나님께서 이끄심을 고백합니다. 저희의 어리석은 욕심과 감정을 고집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담대한 순종으로 방주에 올라 물결에 몸을 맡기는 믿음을 주시옵소서.오늘 하루 마주해야 할 이들에게 복음의 향기를 전하며, 오늘 감당할 일들에 지혜의 빛깔을 더하길 소망합니다. 저마다 근심하며 부르짖는 신음에 응답하시고, 가정마다 평강을 더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참고문헌: 김세권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서울: 크리쿰북스, 2017) 69~71쪽.
|
2025-12-08 |
|
창세기 6장 "생명을 보존하라"
2025년 12월 6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6장 "생명을 보존하라"세상이 죄로 인해 타락한 후 하나님의 본격적인 구원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를 위해 부름 받은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노아’입니다. 9절에 보면 그를 가리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소개합니다. 성경 속 가장 눈부신 인물 묘사입니다. 노아와 견줄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 다면 마땅히 노아와 같은 찬사를 듣고 싶어합니다.그렇지만 동시에 그가 살았던 시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인’이라는 칭찬의 배경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완전히’ 행하고자 하는 생생한 현실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11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온 땅이 하나님 앞에서 썩었습니다. 그 결과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천지가 되었습니다. 온통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의인 노아의 일상은 어떠했을까요? 성경이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노아는 홀로 고고하게 살며 주님께 예쁨 받은 게 아닙니다. 따라서 그가 겪었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따라가는 사람을 세상이 그냥 둘 리 없습니다. 분명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통과했던 시련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 받았습니다. 그의 삶이 그를 둘러싼 세상과 선명하게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노아에게 주님께서 소중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19~20절 함께 읽겠습니다.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20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원문에는 ‘상자’라는 뜻입니다. 상자처럼 네모난 배를 만들어 모든 생물을 각각 암수 한 쌍씩 태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적이 무엇일까요? 바로 심판 가운데 생명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에 노아는 묵묵히 순종하였습니다. 세 아들과 함께 산 위에서 거대한 배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그는 분명 그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고초를 겪었을겁니다.이러한 말씀을 통해 의인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되짚어 보게 됩니다. 포악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이 지닌 무게감을 깨닫게 됩니다. 분명 고되고 어려운 여정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코 허무하게 우리를 삼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진실로 동행하며 의롭게 되는 과정입니다.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모든 성도는 곧 ‘의인’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역시 노아와 같습니다. 완전무결해서가 아닙니다. 여전히 많은 죄와 허물이 있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사명을 부여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생명을 보존하는 것입니다.오늘 하루도 각자의 헌신과 순종으로 저마다의 방주를 만드시길 축복합니다. 세상의 거센 파도에서 복음과 진리를 지킬 내면의 공간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또한 섬김과 희생의 손길을 주위 사람들을 향해 건네시길 소망합니다. 그런 우리 모두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어 생명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생명의 주 하나님포악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패한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이 시대의 노아로 부르셨음을 믿습니다. 그 어떤 시련과 어려움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붙잡고 주님의 생명을 전하며 나아갈 힘과 지혜를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2025-12-06 |
|
창세기 5장, "동행과 위로"
2025년 12월 5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5장, "동행과 위로"창세기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 중 하나는 ‘족보’입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족보가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족보는 단순한 연대기 정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담은 또 다른 계시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5장은 아담과 그의 아들 ‘셋’의 계보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것은 명확히 바로 앞에 있는 4장 16절 이하에 기록된 ‘가인의 족보’와 대조하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가인의 자손 중에 야발은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입니다. 비록 가인은 범죄자였으나 그의 후손들은 화려한 문명과 문화를 꽃 피우는, 강력한 힘을 자랑하였습니다.동시에 가인의 족보에는 음산한 정서가 담겨있습니다. 후손 라멕이 한 말을 굳이 함께 담았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들을 향해 이렇게 으스대며 말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그는 살인자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살인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자랑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알게 됩니다. 가인의 자손들이 이룬 찬란한 업적 이면에는 폭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반면 아벨이 죽고 난 후 아담과 하와가 낳은 셋의 후손들에게는 별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그저 ‘살고 죽었다’라는 일상적 언급만 반복될 뿐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처럼 무언가 대단한 걸 이루었다는 사실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두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에녹과 노아입니다. 24절 함께 읽겠습니다.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다른 사람은 모두 “죽었더라”라고 기록되었는데 에녹만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라고 언급합니다. 이를 두고 에녹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말도 죽음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에녹 승천의 사실 여부가 아닙니다. 그의 삶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언급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29절 함께 읽겠습니다.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가인의 후손 중에 살인을 자랑한 라멕과 이름이 같은, 셋의 후손 중 또 다른 라멕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노아’입니다. 그런데 노아라는 이름은 ‘위로’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을 그가 덧붙입니다. 바로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땅에서 힘들게 일하는 백성에 대한 위로입니다. 인생의 무게를 견디며 고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위안입니다.이처럼 아담의 족보에 등장하는 두 사람, 에녹과 노아를 통해 가인의 후손들과 정반대의 특성을 깨닫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동행 그리고 위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비교할 때 우리가 이룬 것이 초라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고 악을 저지르는 이들이 더욱더 화려한 성공을 거두기도 합니다. 그런 현실에 너무나 답답하고 힘겨운 순간이 수시로 찾아옵니다. 그럼에도 묵묵히 하나님과 동행하며, 위로의 삶을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비록 사람들 눈에는 초라하고 별 볼일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우리의 모든 여정을 기뻐 받으시어 온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통로로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마치 십자가의 고난이 참혹할수록 부활의 영광은 더없이 찬란하다는 복음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가슴 깊이 품고 더욱더 주님과 발걸음을 맞추고 위로를 전하며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기도위로의 주 하나님가인의 후손들에 둘러싸여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악한 이들의 폭력이 기세 등등하고 그들이 거둔 화려한 업적과 승리에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과 동행하며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저희 삶을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더욱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묵묵히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2025-12-05 |
|
창세기 4장 "죄의 파장"
2025년 12월 4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4장 "죄의 파장"이 새벽, 주님의 포근한 은혜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어제 읽은 창세기 3장은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한 죄와 그 결과를 기록합니다. 또한 그럼에도 사랑으로 옷을 입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줍니다. 그렇지만 비극은 멈추지 않습니다. 죄가 지닌 파괴력은 계속 내달립니다. 창세기 4장은 성경이 기록한 첫 번째 살인 사건을 보여줍니다. 아끼고 돌봐야 할 동생을 형이 시기하고 분노한 나머지 쳐 죽였습니다. 살인자 가인에게 주님이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이 대답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죄가 얼마나 사람의 양심을 병들고 어둡게 하는 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가인은 아버지 아담과 정반대 행동을 합니다. 적어도 아담은 부끄러워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 죄를 낱낱이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가인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완악하게 행동합니다. 자기가 숨을 끊었음에도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냐고 뻔뻔하게 되물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대답이 인상적입니다. 10~11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가인은 자기가 저지른 살인을 완전 범죄라고 여겼습니다. 아무도 자기 행동을 모른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벨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 매우 중요한 사실을 확인합니다. 성경은 피를 의인화 합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희생을 헛되이 여기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에는 사라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비참하게 희생당한 핏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살인에 이르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서러운 피를 흘리며 살아갑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부당한 폭력과 압력에 시달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두 아십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상처와 억압에 함께 하시고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동시에 여기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합니다. 어제 읽은 창세기 3장에서 범죄하여 부끄러움에 눈을 뜬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주님께 받은 징벌을 감당하기 벅차 했습니다. 크나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런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5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하나님께서는 분명 가인의 저지른 죄에 분노하고 그를 심판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영 저주 아래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보호하는 표를 주셨습니다. 어제 말씀대로 창세기를 비롯해 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랑의 패턴입니다.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여기서도 발견합니다.그 사랑이 또한 우리에게도 향해 있음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억울한 눈물에 함께 신음하시는 하나님, 때로 꾸짖으시나 끝까지 사랑으로 돌보시는 주님의 넓은 품에 안겨 살아가는 오늘 하루 보내시길 축원합니다.기도거룩하신 주 하나님동생의 피를 흘렸음에도 뻔뻔하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되묻는 가인의 모습에게서 죄의 막강한 파괴력을 실감합니다. 문 앞에 엎드려 있는 죄를 다스리는, 정결한 삶을 살아갈 힘을 주시옵소서. 또한 저희가 흘리는 모든 피와 눈물의 호소를 주님께서 듣고 계심을 믿고 기도 가운데 아픔을 토로하며 새 힘을 얻길 구합니다. 끝까지 죄인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넒은 품에 안기며 그 놀라운 사랑을 닮고 전하는 오늘 하루 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2025-12-04 |
|
창세기 3장 "하나님이 입히시다"
2025년 12월 3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3장 "하나님이 입히시다"갈수록 추워지는 겨울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이 성도님들 가정과 삶 가운데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창세기 1장과 2장의 찬란하고 눈부신 이야기를 지나 이제 어두운 상황이 펼쳐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 해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을 확인합니다. 죄라는 것은 단지 특정 행동을 했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원이 아닙니다. ‘관계의 파괴’를 가리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뱀으로 나타난 악한 피조물의 꾀임에 넘어가 주님이 금지하신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의 행동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몰라서 하신 질문이 아닙니다. 주님과 친밀한 사귐이 무너지고 홀로 음침한 곳에 숨어있는 그의 상태를 스스로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결국 하나님은 두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냅니다. 너무나 절망스러운 형벌입니다. 이 이상의 비극이 없습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눈부시게 위대한 사랑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3장 21절 함께 읽겠습니다.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옷이 왜 필요 했을까요? 죄를 짓고 부끄러움에 눈을 떠 몸을 가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즉, 죄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위해, 그들이 저지른 허물을 몸소 덮어 주셨습니다. 게다가 그 옷은 가죽 옷입니다. 어느 동물의 희생으로 생긴 옷감입니다.이 짧은 장면에서 성경 전체에 반복되며 흐르는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부족하여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준엄하게 심판하시면서도 동시에 위대한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십니다. 그 과정에서 희생의 피를 흘립니다. 그 절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제가 전에 섬겼던 포항제일교회 박영호 담임 목사님은 신약학자이기도 하십니다. 그분께서 쓰신 “다시 만나는 교회”를 오늘부터 수요기도회 시간에 나누려고 합니다. 이 책에서 박 목사님이 쓴 인상 깊은 문장이 있습니다. 바로 “복음이란 내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입니다.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나 연약하고 어리석어 진리에서 벗어나 거짓에 속아 죄를 짓습니다. 여기서 크게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 반대의 오류도 있습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강박적이고 부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또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부디 오늘 함께 읽은 통해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존재 자체를 품어 안으십니다. 이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려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영혼 깊이 품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받은 사랑에서 전하는 사랑으로, 감싸 안기는 인생에서 또 다른 누군가를 끌어 안는 인생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기도참 사랑의 주 하나님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통해 모든 사람이 짊어진 죄와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 대신 거짓의 꾀임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정결히 지키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동시에 저희의 모든 한계와 결핍을 온전히 품으시는 주님의 사랑에 기꺼이 안기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지치고 상한 이들을 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에게서 벗어나 이웃과 세계를 향해 시선을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숱한 상처와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 걸음을 내딛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2025-12-03 |
|
창세기 2장 "한 몸을 이룰지로다"
2025년 12월 2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2장 "한 몸을 이룰지로다"고대인들은 현대인들과 달리 글을 읽고 쓰는 사람들이 매우 적었습니다. 따라서 그 시대 사람들은 듣고 이해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배려하는 글쓰기와 말하기가 성경 전반에 깔려 있습니다. 대표적인 표현법이 같은 뜻의 문장을 표현만 약간 바꾸어 반복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2장도 그러합니다. 어제 읽은 창세기 1장에 이미 천지창조가 웅장하게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장인 창세기 2장에서 또 다시 하나님의 창조를 언급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가요? 그만큼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창세기 1장과 달리 좀더 세밀한 시선으로 주님의 창조를 들여다 봅니다. 특별히 에덴 동산의 풍경을 아름답게 묘사합니다.그 절정은 바로 “아담과 하와”입니다. 18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혼자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휘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그런 다음 잠들어 있는 아담의 갈빗대를 가져다가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로 데려갑니다. 이때 아담은 너무나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23절 함께 읽겠습니다.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아담이 말합니다.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후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었다고 성경은 알려줍니다. 단지 생물학적인 몸의 결합만이 아닙니다. 한 존재와 다른 존재가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본문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러 사정으로 결혼을 안 했거나 혹은 못한 걸 두고 비난 하는게 아닙니다.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삶의 형태를 인정하십니다. 동시에 본문을 통해 거듭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합과 화합을 기뻐하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류 두 사람의 만남을 우주 창조 전체의 정점으로 올려 두었습니다.그렇다면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화평을 이루는 존재입니까? 아니면 혹시 다툼과 분란의 중심은 아닐까요?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얼마나 충실히 따르느냐를 나누는 기준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늘 기쁘고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 싸움을 누그러 뜨리고 극복하는 사람들이 있는 가하면, 다툼을 키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한 몸을 이루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창조의 섭리를 세우는 창조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도 각자의 삶에서 차별과 소외가 아닌 섬김과 사랑을 실천하여 따뜻한 공동체를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마음 다해 소망합니다. 기도창조주 하나님.주님께서 온 우주를 지으신 창조의 섭리 정점에 아담과 하와의 만남이 놓여 있음을 성경을 통해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한 교제와 평안의 나눔을 이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이에 집중하여 배제하고 소외하는 폭력이 아닌, 아름다운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섬김과 헌신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특별히 우리 자녀들 삶에 선한 만남 가득하길 구합니다. 진심을 담아 서로에게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고백할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좋은 만남을 통해 인생 풍성한 결실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 어디서나 평강의 본이 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2025-12-02 |
|
창세기 1장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2025년 12월 1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창세기 1장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창세기 1장 1절을 아마 대부분 외우실 겁니다. 창세기 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시작 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동시에 솔직히 뻔하고 식상하게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이 본래 쓰인 배경과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바벨론 포로기입니다.이스라엘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 성전이 무너지고 낯선 땅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들은 그 험난한 고난의 시기에 조상들로부터 전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아 성경으로 엮는 위대한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문장은 하늘에 뚝 떨어진 고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이것은 바벨론 제국의 창조 신화와 질서에 대한 저항입니다.바벨론 사람들은 ‘마르둑’이라는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믿었습니다. 마르둑의 권세와 능력을 찬양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이룬 거대한 제국의 화려한 승리와 업적은 다름 아닌 마르둑의 창조 능력의 결과라고 믿고 소리 높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에서 끌려온 포로들은 눈물겹도록 담대하게 이렇게 외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즉 태초에 마르둑이 아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위대한 신앙입니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화려한 제국을 이루었다고 선전하는 우상이 아니라, 마치 자기들을 버리고 영영 떠나버린 듯한 하나님, 쓰라린 패배와 상실을 안겨준 야훼 하나님이 온 우주를 지우셨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창조 신앙을 또한 우리의 것임을 고백합니다. 물론 우리는 바벨론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마르둑 신화와 무관한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시대의 마르둑에 둘러싸여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많은 돈이, 강력한 권력이, 화려한 명예가 삶의 중요한 원동력이고 바탕인 것처럼 속이는 거짓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거듭 마음을 다해 고백해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능력을 더욱더 신뢰하며, 오늘 우리를 통해 이루실 주님의 섬리와 뜻을 펼쳐 나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기도창조주 하나님.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마음 다해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화려한 무언가가 세상을 지은 것처럼 속이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주님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를 삶의 바탕으로 삶으려는 욕망에 휩쓸려 지나기도 합니다. 혼탁한 시대, 더욱더 진리를 붙잡기 원합니다. 저희 개인과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손길을 더욱더 신뢰합니다.주님의 창조 섭리를 깨닫고 고백하는 오늘 하루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혼돈을 멈추고 새로운 질서를 이루어 가시는 주님의 권능을 신뢰하며 저마다 겪는 여러 시련을 믿고 일어난 용기와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2025-12-01 |